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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마일펄 Apr 12. 2021

기억 못 하는 간담이 서늘한 흔적들

10년 전 메모와 인터넷 게시글

#1. 쓰다가 만 노트


책꽂이에서 일기장으로 쓸 노트를 찾다가 에메랄드색 하드커버로 덮인 스프링 노트를 하나 집었다. 오래된 노트는 앞에 석 장만 낙서처럼 두서없는 메모가 적힌 거의 새것이나 다름없었다. 첫 장에 2011년 4월 13일이라고 적힌 날짜를 보니 10년 전에 사용하려다가 그만둔 모양이었다. 노트를 넘기다가 세 번째 장에 적힌 메모를 보고 경악했다.


살찌기 돌입, 다이어트 No!

칼슘 섭취(우유, 멸치) – 골다공증 예방

규칙적인 운동 – 체중부하 운동(혈액 순환↑, 골세포 자극 및 칼슘 농도 증가)

스트레스↓

매실 마시기 – 염증성 장 질환 방지

산부인과 진료

잠 충분히


20대 중반에 골다공증 예방과 혈액 순환, 골세포 자극을 염려하다니…… 대체 무슨 자료를 읽었던 거야. ‘어떻게 하면 살이 찔 수 있을까’가 고민이었던 마른 시절이 떠올라서 웃음이 피식 나왔다.





#2. 이글루스


구글링을 하다가 찾던 정보의 단서를 한 이글루스 블로그에서 발견했다. 글 작성자에게 질문하려고 댓글을 작성하려니 로그인을 하란다. 이글루스를 사용한 적이 없어서 회원가입을 하려는데 ‘회원님은 이미 가입이 되어있습니다. 비밀번호를 찾고 싶으시면 여기를 눌러주세요’라는 안내창이 떴다. 난 이글루스에 가입한 적이 없는데…… 일단 자주 사용하는 아이디와 비밀번호를 입력했다. 그러자 기억 속에서 지운 내 블로그가 떡하니 나타났다. 2009년 8월 17일 오전 10시 33분에 가장 마지막으로 작성한 글의 제목은 ‘복숭아’였다. 그 일주일 전에 쓴 글의 제목은 ‘핸드폰’, 그로부터 다시 일주일 전에 작성한 글의 제목은 ‘서점’이었다. 사이트에 가입한 적 없다는 내 기억은 완전히 틀렸다.


글은 달랑 세 개가 전부였다. 자의식으로 가득 찬 만연체 문장으로 주저리주저리 쓴 글을 읽었다. 내가 썼는데도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도무지 파악이 되지 않는다. 별로 본 사람도 없지만 창피한 감정이 머리끝까지 차오른다. 이제는 볼 사람이 없는데도, 누가 볼 새라 번개처럼 공개글을 비공개로 바꾸었다. 머리를 쥐어뜯고 쥐구멍에 숨고 싶은 심경이었다.





#3. 네이버 지식인


결혼 준비 비용과 업체, 유의할 점을 엑셀 표 한 장으로 정리해서 블로그에 올렸다. 막상 정리를 끝마치니 그럴듯해 보였다. 결혼 준비 예정자에게 도움 될 내용이라고 확신했다. 적극적으로 홍보해서 더 많은 사람이 읽기를 바라는 욕심이 생겼다. 고민하다가 네이버 지식인 관련 질문에 답변한 뒤 내 블로그 링크를 남겨 홍보하기로 했다.


난생처음 네이버 지식인에 답변을 남기려니 괜스레 설레었다. 그런데 나의 확신은 다시 한번 무너졌다. 나는 이미 2010년 11월 13일에 두 번 답변한 전적이 있었다. 나의 답변 목록에 기록이 고스란히 남아있었다. 10여 년 전에 온라인에서 대체 무슨 말을 지껄인 거지? 머리가 쭈뼛 서고 마음이 불안했다. 두 답변 모두 채택된 것을 보면 다행히 허튼소리는 아닌 모양이다.


Q. 수능 전날 어떻게 해야 할까요? (디렉터리: 대학 입시, 진학)


A. 수능을 앞두고 계시는군요.

남은 기간 지금껏 공부한 내용을 잘 정리해서 좋은 성과 거두시기를 바랍니다.


수능을 비롯한 중요한 시험을 일주일 즈음 앞두고는

신체 리듬을 조절하고 심리적 안정을 유지하는 일이

공부 못지않게 중요합니다.

당일 집중력을 최대한 발휘할 수 있도록

신체 리듬을 수능일 시험과 점심간에 맞춰서 조절하세요.


오전 9시에 시험이 시작한다면 3시간 전인 오전 6시 정도에는 기상하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잠에서 깨서 맑은 머리로 활자에 집중하려면 3시간 정도는 필요할 거예요.

보통 7~8시간 잠을 잔다고 하면 오후 10~11시에는 잠자리에 들어야겠지요.

사람마다 신체 리듬은 다르니 취침과 기상 시간은 자신에게 맞게 조절하면 됩니다. ^^


식단은 소화가 잘되고 머리가 맑아지는 음식을 섭취하면 좋을 거예요.

수능 때 시험을 잘 치라는 의미에서 찹쌀떡을 선물 받곤 하는데

감사한 마음으로 보관했다가 수능이 끝난 후 먹는 게 어떨까 싶어요.

시험 당일 간식은 초콜릿이나 귤처럼 간편한 음식이 좋습니다.


열심히 노력하신 만큼 자신의 기량을 최대한 발휘하시길 기도할게요. 파이팅!


기억났다. 2010년이면 직장인 1년 차였다. 수능을 앞둔 심정을 완전히 잊기 전에 누군가에게 작은 도움이라도 될까 싶어서 남긴 답변이었다. 찹쌀떡은 감사한 마음으로 보관했다가 수능이 끝난 뒤에 먹으라니. 상상도 못 한 조언이다.




Q. 가슴 찡한 일본 영화 좀 없을까요? (디렉터리: 로맨스, 멜로 영화)


A. 도쿄 타워: 드물게 모자(母子)간 사랑을 그리고 있습니다. 긴 상영 시간 141분이 하나도 길다고 느껴지지 않습니다. 일본 영화 특유의 무미건조한 연출을 곱씹을수록 오히려 마음이 아려옵니다.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 몽환적인 수족관 침대 장면이 기억납니다. 우연히 만나서 서로 점차 끌리고 사랑하다가 가슴 아프게 헤어지는 전형적인 사랑과 이별의 과정을 따르지만, 감동과 여운이 남는 영화입니다.


마을에 부는 산들바람: 순수한 소년과 소녀의 사랑 이야기입니다. 고등학생 주인공들은 어른스러운 면도 있고요. 황순원 소설 <소나기>가 떠오릅니다. 영화가 전체적으로 밝고, 잘될 듯 자꾸 어긋나는 타이밍이 안타까워서 점점 이야기에 빠져들게 됩니다.


냉정과 열정 사이: 너무 유명한 영화라서 이미 보셨을 것 같습니다. 이탈리아 피렌체를 아름답게 담아냈습니다. 인물의 세밀한 감정을 섬세하게 표현하는 조명과 소품이 조화롭습니다.


하나와 앨리스: 10대 시절 아오이 유우가 등장합니다. 한 남자를 사랑하는 두 소녀 그리고 발레…… 순수하던 10대일 때 아련한 사랑의 기억이 떠오릅니다.


오래전 내가 남긴 생경한 답변을 보며 ‘이때는 이렇게 생각했구나’라고 사진 앨범을 들춰보듯이 반추했다. 앞선 수능 답변 후에 하나만 더 답변해보자고 고른 질문이었던 것 같다.




단정한 글씨로 또박또박 '골다공증 예방'이라고 10여 년 전 끄적인 메모, 알고 보니 이미 가입한 블로그 사이트, 처음인 줄 알았는데 기억나지 않는 답변을 남긴 경험을 깨닫고 간담이 서늘해졌다. 내 기억에서는 사라졌지만 다른 이의 기억에는 남아있는 과거에 존재한 사건을 마주치는 일은 긴장되고 때때로 두렵다. 매사 말과 행동에 신중하려고 노력을 기울이는 정도로는 부족하다. 인간은 불완전한 망각의 동물이니까. 영화 <올드보이>에서 이우진(유지태 扮)이 오대수(최민식 扮)를 복수 대상으로 낙점한 이유도 학창 시절 오대수가 무심코 흘린 말 한마디 때문이지 않은가.


이우진: 여태까지 최면 때문에 그날 일을 기억 못 한다고 생각한 거예요? 정말? 당신이 그날 일을 기억 못 하는 진짜 이유가 뭔 줄 알아? 그건 말이야. 그냥 잊어버린 거야. 왜? 싱거운가요? 하지만 사실이야. 당신은 그냥 잊어버렸어. 왜? 남의 일이니까. 


인터넷에는 내가 기억하지 못하는 얼마나 많은 흔적이 남아있을까. 살면서 내가 한 수많은 말 중 누가 어떤 말을 가슴속에 간직하고 있을까. 부디, 타인에게 상처 준 말은 열 손가락으로 꼽을 수 있기를 바란다.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이것은 지나친 욕심이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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