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아빠 이야기
속여도 기분 좋고 속아도 불쾌하지 않은 만우절. 2003년 4월 1일 <패왕별희>, <해피투게더>, <아비정전>, <영웅본색>, <천녀유혼> 등 수많은 걸작을 남긴 배우 장국영이 홍콩 만다린 오리엔탈 호텔 24층에서 스스로 몸을 던져 46세로 세상을 떠났다. 많은 이들은 거짓말 같았던 장국영의 죽음을 언론사의 만우절 거짓말 이벤트라고 의심했지만, 그는 우리 곁을 정말 떠나버렸다. 1년 뒤인 2004년 4월 1일 내게도 비슷한 일이 찾아왔다.
예년과 별다른 것 없는 떠들썩한 만우절 아침을 보냈다. 먼 복도에서 담임 선생님이 모습을 드러내자 누가 먼저라고 할 것도 없이 각자 자기 책상을 180도 회전해 칠판을 등지고 앉았다. 공교육 마지막 12년 차인 고등학교 3학년씩이나 되어서 이렇게 진부할 수가 없다. 티 나게 당황한 척하는 선생님의 모습에서 대체 누가 누굴 속인 것인지 헷갈리기만 하다.
지루한 수업 시간을 견디고 힘겨운 야자를 마친 뒤 밤 10시에 학교 현관에서 신발을 갈아 신었다. 지극히 평범한 하루였다. 그런데 갑자기 부슬부슬 비가 내렸다. 가로등 불빛이 비추는 보슬비는 꽤 을씨년스러웠다. 4월 초는 제법 쌀쌀했고 많은 비는 아니지만 그대로 맞으면 감기에 걸리기에 십상이었다. 집에까지 어떻게 갈지 고민하고 있는데 후문에서 동생이 우산을 들고 기다리고 있었다. 이 정도 비에 학교까지 마중을 오다니 웬일이지? 싶었지만 어찌나 반갑던지. 우산을 건네며 동생이 말했다.
“아빠가 다치셨어. 일하다 떨어지셨대”
내 귀를 의심했다. 믿고 싶지 않았다. 언니로서 동생에게 따끔하게 일침을 가했다.
“아무리 만우절이라도 그런 농담하는 거 아니야.”
동생의 철없는 거짓말이길 바랐지만 결코 농담이 아니었다. 사실이었다.
아파트 건설 현장에서 근무하던 아빠는 사고로 추락했고 목숨을 겨우 건졌다. 그조차도 기적이라고 했다. 최소 몇 차례의 수술이 기다리고 있었다. 엄마는 병간호하느라 당분간 집에 오시기 힘들다고 했다. 내게, 우리 가족에게 왜 이런 불행한 일이 벌어졌는지 속상했고, 앞으로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몰라서 불안했다. 막연해서 불안했고, 불안해서 두려웠다. 울음소리가 밖으로 새 나가지 않도록 베개에 얼굴을 파묻고, 눈물로 베갯잇을 흥건하게 적실만큼 꺼이꺼이 울었다. 그런데 순간적으로 저 깊숙이 나쁜 마음도 올라왔다. ‘그냥 사라져 버리지’. 아주 짧은 순간이었지만, 이런 생각이 스쳐 지나간 나 자신을 처음으로 혐오했다.
아빠는 장점이 많은 사람이다. 부지런하고 정직하며 성실하다. 어른을 공경하고 책임감도 강하다. 약간 손해 본다는 생각으로 세상을 살아가는 것이 결국은 득이 된다고 믿는다. 시골에서 상경했을 때 참외 장사를 했는데 이 사람은 이래서, 저 사람은 저래서 한두 개씩 더 끼워주는 바람에 손해 보고 결국 장사를 접었다고. 마음씨 좋고 우직해서 약삭빠르게 이윤을 좇아야 하는 장사꾼 체질은 영 아니다.
아빠는 세상에 거저 얻는 일은 절대 없으며 사필귀정(事必歸正)이 세상 이치라고 믿는다. 과욕을 부리기보다 제 분수를 지키며 만족할 줄 아는 현명한 사람이다. 10살 즈음까지 부모님과 한 방에서 생활했는데 새벽 5시면 형광등이 켜졌다. 아빠는 늦어도 오전 5시에 일어나서 꼭 국이나 찌개를 곁들인 아침을 드시고 6시 전에는 출근하셨다. 그의 경제적 헌신 덕분에 우리 가족은 여유롭지는 않아도 부족함 없이 살아왔다. 사고 이후 현장 일을 그만두셨는데도 일찍 일어나는 습관이 오래 몸에 배 여전히 새벽에 기상하신다.
말도 못 하는 골초였는데 2000년 밀레니엄 시대를 맞이해 금연을 선언하곤 담배를 감쪽같이 끊으셨다. 흡연하기는 쉬워도 한번에 금연은 어렵다고 들어서 자신이 내뱉은 말을 책임지고 약속을 지키는 모습이 존경스러웠다.
사고를 당하고 이 년에 걸쳐서 세 차례 큰 수술을 받았고, 한창때인 40대 중반에 뜻하지 않게 평생 하던 일을 그만두었다. 대학 병원을 퇴원한 후에는 동네 병원에 입원해 다시 이 년 동안 재활에 매진했다. 어지간한 정신력과 긍정적인 성격으로는 해내지 못할 일이다. 다시금 아빠는 대단한 사람이라고 마음속으로 되뇌었다. 나이가 들수록 아빠께서 물려주신 무형의 자산은 내 안에서 또렷하게 나타난다. 비록 그가 가진 능력의 1/10에도 미치지 못하지만 내 삶을 지탱하는 근원이다.
그런데 그는 이 모든 장점을 상쇄할 만한 치명적인 단점이 있었다. 과음이 잦았고, 그가 거나하게 취해서 귀가한 날이면 온 가족이 괴로웠다. 엄마는 고된 현장 일을 감내하는 아빠에게 술마저 없다면 삶의 낙이 없다며 아빠를 이해하라고 우리를 다독였다. 정작 자신은 한밤중 한바탕 전쟁을 치르고 다음 날 머리를 싸맨 채 종일 방에 몸져누웠으면서. 비상식적인 상황을 이해하라는 말은 어쩌면 우리가 아니라 엄마가 살기 위해 자신에게 암시를 건 주문이었는지도 모르겠다. 훗날 엄마는 그렇게 말했으면 안 되었다며 자신이 우리에게 한 말을 후회한다고 고백했다.
아빠가 평소보다 귀가가 늦어지면 슬슬 불안했다. 자정 즈음 밖에서 쿵쿵 누군가 계단으로 올라오는 소리가 들리면 재빨리 내 방 형광등을 껐다. 방문이 잘 닫혔는지 확인하고 이불 속으로 들어가 자는 체했다. 잔뜩 예민해져서 제발 그가 아이스크림을 사 왔다거나 여타 다른 이유로 나를 깨우지 않기를 마음속으로 빌고 또 빌었다. 제발 이대로 곧장 잠들어서 만일 그가 깨워도 일어날 수 없기를, 거실에서 벌어지는 일을 들을 수 없기를 빌고 또 빌었다. 기도가 무색하게 정신은 또렷했고 하이드처럼 변한 그가 거실에서 짐승처럼 울부짖는 소리가 귓가에 꽂혀왔다.
갑자기 오줌이 마려울 때가 가장 난감했다. 방에서 화장실까지 몇 발자국에 불과한데, 그가 거실에서 버티고 있는 한 결코 나갈 수 없었다. 얼마나 서럽던지 울고 또 울었다. 간신히 버티다 거실에서 싸우는 소리가 잦아들고, 거실 형광등을 꺼서 방문 틈으로 가늘게 들어오던 불빛이 사라지면 기회였다. 그가 깰까 싶어서 도둑고양이처럼 방을 살금살금 빠져나가 재빨리 화장실에 다녀왔다.
시험 기간이라 졸음을 쫓으며 늦게까지 공부할 때도 그의 어김없는 술주정 소리가 들려왔다. 아빠라는 사람이 자식 교육이나 미래에 관심이 없다는 생각에 내 신세가 처량해서 또 눈물을 한 바가지 쏟았다. 어느 날은 홀로 거실로 불려 나가 자신을 무시하냐는 그의 말에 꿇어앉아 고개를 떨군 채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닭똥 같은 눈물만 뚝뚝 흘렸다. 잊히지도, 지워지지도 않는 지긋지긋한 악몽이다. 그가 불의의 사고로 치료를 위해 어쩔 수 없이 집을 비웠을 때, 비로소 나는 악몽에서 벗어나 처음으로 온전히 평화로운 시간을 누릴 수 있었다.
악감정을 묻어두고 아빠를 그럭저럭 대하기까지 십여 년은 걸린 것 같다. 그의 잘못된 행동을 용서하거나 우리 부녀가 화해한 것은 아니다. 손찌검하거나 물건을 부수지 않고, 가족에게 고함을 치는 정도에 그쳐서 고맙다는 생각이 드는 사람을 어떻게 쉽게 용서할 수 있을까. 잘 키워줘서 고맙다는 마음과 한때 존재 자체가 거북했던 양가적인 감정, 묵직한 부채 의식과 마음속 응어리를 동시에 남겨준 사람을 어떻게 사랑할 수 있을까. 용서란 미움에게 방 한 칸만 내주면 되는 거라지만…… 나쁜 기억이 얼마나 깊이 각인되었는지 머리보다 몸이 먼저 거부하는 걸 난들 어떡해. 평생 쌓아 올린 공(攻)이 아무리 크더라도 비록 딱 한 번 뿐일지언정 치명적인 과(過)가 결국 자신의 모든 공을 덮어버릴 수도 있다.
이런 이유로 이십 대 때는 부모님께 벗어나고 싶었는데, 한 살씩 나이를 먹으면서 애당초 불가능한 생각이었다고 깨닫는다. 세상을 더 알아갈수록 내가 가진 것, 누리는 모든 것은 결국 부모님에게 비롯되었다고 알게 된다. 어긋난 조각을 맞추기까지 참 오랜 시간을 돌아왔다. 몇 개 남은 조각은 아직도 맞추는 중이지만. 별로 유쾌하지도 않은, 어찌 보면 감춰야 할 이야기를 왜 털어놓느냐면, 나와 비슷한 성장기를 경험한 누군가에게 말해주고 싶었다. 어른이 되었지만 여전히 괜찮지 않아도 괜찮다고. 죄책감을 안고 살아가는 것이 결코 우리 잘못은 아니라고. 내 묵은 감정을 한번은 공유하고 싶었다.
*용서란 미움에게 방 한 칸만 내주면 되는 거니까
: 영화 <내 머리 속의 지우개(이재한 감독, 2004)> 수진(손예진 扮) 대사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