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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마일펄 May 18. 2021

'제발, 한국 땅에 무사히 착륙만 해주세요'

불안한 비행이 남겨준 교훈

2014년 10월 5일, 내가 탄 세부발 인천행 대한항공 KE632는 착륙 1분을 앞두고 있었다. 인천공항으로 활강하는 비행기 창문 너머로 영종도와 섬을 감싸고 있는 서해가 보였다. ‘이쯤이면 만일 비행기 엔진이 멈춰서 바다에 비상 착륙을 한다고 해도 목숨은 건질 수 있지 않을까. 최소한 공항에 상주 중인 구조대가 급파되진 않을까.’라는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착륙하는 마지막 순간까지 긴장의 끈을 놓지 못한 채 양손은 땀으로 축축했다.


친구들과 떠난 세부 여행에서 회사 업무 때문에 K 언니와 나는 며칠 먼저 한국에 돌아오기로 했다. 막탄 세부 국제공항까지 배웅을 나온 친구 몇 명과 아쉬운 작별 인사를 나누었다. 악몽의 밤이 펼쳐지리란 사실을 꿈에도 모른 채. 물리적으로는 1분의 길이가 같지만, 인간의 심리가 시간의 영역에 개입하는 순간 같은 1분이라도 훨씬 늘어나기도, 매우 짧아지기도 한다. 이날 비행기에서 벌어진 분 단위로 생생하게 기억 속에 각인된 일을 기록으로 남겨두었다.




- (새벽) 1시 10분: 탑승 수속 시작


- 1시 35분: 이륙 예정


- 1시 50분: 이륙 지연 15분. 갑자기 엔터테인먼트 장치 꺼진 후 기내 전체 정전. 아무것도 보이지 않자 당황한 고객들이 무슨 일인지 격양된 목소리로 항의. “이륙을 앞두고 엔터테인먼트 장치 결함을 발견해 관련된 보조 동력 점검 중. 항공기는 이상 없음. 보조 동력과 관련된 에어컨이 운행 중 작동하지 않아 기내가 더울 수 있으니, 양해 바람”이라고 안내 방송. 그러나 기내 엔터테인먼트 장치와 조명이 작동-정전-작동-정전을 반복하자 탑승객의 불안감은 고조된다.


- 2시 15분: 승무원에게 강력히 항의해 결국 승객 약 100여 명은 탑승 대기 라운지로 탈출(Emergency Exit). 거세게 현재 상황 구체적인 해명 요청. 안전이 보장된 대체 비행기와 숙박권 등 요청


- 2시 30분: 기장으로 추측되는 항공사 직원이 라운지로 나와 상황 설명. “이륙에는 문제없으니 재탑승 권고. 원할 경우 숙박 마련할 것. 대체 비행기는 없으며, 오늘 미탑승 시 내일 같은 시각(새벽 1시 30분)에 같은 기종 이용 가능”


- 3시 30분: 일부 승객 재탑승

     (폐쇄된 기내 공간에서 불안한 마음에 라운지로 탈출했던 K 언니와 짧은 상의 끝에 재탑승하기로 결정)


- 4시: 이륙 예정 방송. 비상 상황 발생 시 대피 요령 안내

     (드디어 출발한다는 생각에 한편으로 안도함)


- 4시 30분: “항공기 균형 맞추는 중”이라고 기내 방송

     (다시 서서히 불안해짐)


- 5시: “엔터테인먼트 장치 점검 중, 30분 소요 예상”이라고 기내 방송

     (기다리다 지친 일부 승객은 의자의 받침대를 올리고 일렬로 빈 좌석에 아예 드러누워서 잠을 청함. 이륙 예정을 앞두고 여전히 같은 문제로 점검을 하는데, 과연 이 비행기를 타도 될는지 다시 의문이 들어서 불안감 고조)


- 5시 30분: 다시 “항공기 균형 맞추는 중”이라고 기내 방송

     (약간 포기 상태. 지금이라도 다음 비행기를 탄다고 요청할지 잠시 갈등. 겉으로는 평온한 척했지만 내적으로는 안절부절못함. 한편으로 항공사에서 성급하게 출발하지 않고 안전에 우려가 될 만한 사항을 꼼꼼하게 점검하는 것이라고 믿음)


- 6시: 이륙

     (이제 주사위는 던져짐.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음. 그저 별일 없이 무사히 인천에 착륙하길 바랄 뿐. 4시간 30분 지연 끝에 마침내 이륙. 제대로 출발했다면 인천에 도착해야 할 시각)


- 11시: 인천 국제공항 도착




무사히 도착해 비행기에서 내린 후 짐을 찾고 공항의 입국 라운지로 나왔다. 비행기 재탑승 후부터 말이 없던 언니와 나는 누가 먼저라고 할 것도 없이 서로 꼭 안아주었다. ‘고생했다고, 다행이라고’ 짧은 두 마디에 새벽 1시부터 오전 11시까지 10시간 동안 마음 졸이며 긴장한 마음고생이 고스란히 녹아 있었다. 둘 다 불안하긴 마찬가지인데 그 마음을 내비쳤다가 상대방이 더 두려워할까 봐 비행기 안에서 기약 없는 이륙을 기다리는 내내 침묵할 수밖에 없었다. 서로 침묵하는 상황을 공감하고 있기에 애써 말을 붙이지 않고 각자의 두려움을 스스로 감내했다.


아무것도 할 수 없이 그저 항공사의 주장을 일방적으로 ‘믿을 수밖에 없는’ 상황에 답답하고 무력감을 느꼈다. 집에 가려면 어쨌든 비행기를 타야 하고, 하룻밤을 보내고 내일 간다고 하더라도 결국 같은 기종을 타야 한다. 항공사에서는 비행에 문제가 없다며 재탑승을 권고하고, 조종사와 승무원도 결국은 같은 비행기를 타고 간다. 하지만 이륙은 거듭 지연되고, 승객이 탑승한 채로 몇 시간째 항공기 점검을 계속하니 불안하지 않을 수 없다. 내가 할 수 있는 선택은 고작 이 비행기를 탈지, 내일 비행기를 탈지, 아니면 아예 다른 항공사 탑승권을 구매할지 정도이다. 상황은 내 통제 범위를 벗어났는데, 만에 하나 불상사가 벌어지면 책임은 고스란히 내 몫인…… 그야말로 난감한 진퇴양난에 놓여있었다.


착륙 1분을 앞두고 창문 너머로 영종도와 서해가 보였을 때 눈을 질끈 감고 ‘제발 무사히 인천 땅에 내릴 수 있게 해 주세요. 그럼 더는 바라는 거 없이 착하게 살겠습니다’라고 마음속으로 빌었다. 그때의 진심이 무색하게 나는 지금 자신과 주변 사람들에게 많은 것을 바라고, 그다지 착하게 사는 것 같지도 않다. 더 잘하고 싶고 더 잘나고 싶은 ‘욕심’에 곁에 있는 소중한 것을 별로 소중하게 여기고 있지 않은지도 모르겠다. 종교도 없으면서 비행기에서 절박한 심정으로 가지런히 두 손을 모아 기도하던 순간을 자주 떠올려야 할 것 같다. 그럼, 별일이라고 여겼던 것이 별일이 아니게 되면서 어지럽던 마음이 정돈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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