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업 성적이 좋은 아이의 경우
남편과 그 가족의 이해할 수 없는 말과 행동을 곱씹고 생각에 생각을 거듭하니, 돌고 돌아서 나와 우리 가족을 성찰하고 있다. 등잔 밑이 어둡다더니 지금 남의 가족을 생각할 때가 아니라 우리 가족이야말로 문제 투성이고 엉망진창이라고 깨달았다. 항상 가족이 좋을 순 없다고 문제없는 가족이 어딨냐고 할 수도 있지만, 바로 평생을 그런 생각으로 문제의 본질을 회피하고 일반화해서 일축해버려서, 곪은 상처가 터지기 일보 직전인, 가족 모두 심각한 상태에 처했다는 사실을 이제야 인식했다.
시어머니의 말 몇 마디로 남편은 아마도 성장과정에서 끊임없이 다른 사람과 비교당하고, 부모가 너무나도 완고한 성격이라서 자신의 의견을 피력하거나 속마음을 털어놓기 어려웠을 것이라고, 그래서 ‘어차피 말해봤자 안 돼’라는 지레 포기하거나 회피하는 성격으로 굳어진 듯하다고 추론했는데(관련 글: 돌이켜보니 싸했던 순간들: 시어머니 편), 문득 ‘그럼 우리 집은? 우리 부모님은 어떤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최근 어쩌다 보니 부모님을 관찰하고 엄마와 많은 이야기를 나누고서 그들 부모와 완전히 같은 행동 패턴은 아닐지라도 본질적으로 우리 부모님도 크게 다르지 않다고 깨닫고, 꽤 충격을 받고 상당한 혼란을 느꼈다.
이게 참 아이러니한데 내가 ‘우리 부모님은 다른 부모님과 달라’라고 그러니까 ‘우리 부모님은 공부하라고 강요하거나 공부 때문에 다른 아이들과 비교하지 않아. 그저 우리에게 건강이 가장 우선(부모님의 이 가치관은 사실일 것이다)이라고 말씀하셔’라고 착각한 건 운이 좋다고 해야 할까. 학창 시절에 우리 부모님은 나와 동생을 다른 아이들과 비교할 동기가 없었기 때문인데, 그 동기는 바로 ‘학업 성적’이다. 여전히 그런지(몇 년 전 <스카이 캐슬> 같은 드라마가 제작된 것을 보면 아마도 20년 전과 현재도 크게 달라지지는 않은 듯하다), 다른 나라도 그런지는 잘 모르겠지만, 우리나라 초중고등학생은 성적이 곧 권력이고 특권의 수단이며 일종의 면죄부다.
나와 동생은 부모님이 ‘열심히 공부해라’라고 하기도 전에 어찌 된 영문인지 학창 시절 내내 최상위권 성적을 유지했다. 전국 1% 이런 정도로 뛰어나지는 않지만, 나 자신을 돌아보며 최근에야 이렇게 생각하게 되었는데, 나와 동생 모두 타고나길 머리가 좋은 편이고, 이해력도 빠르고, 경쟁을 좋아하지는 않지만 확실히 승부욕도 있는 편인 것 같다. 한마디로 둘 다 엄마를 닮아서 공부 머리가 있는 편이라 일반계 고등학교에서 (물론, 공부를 열심히 한 것도 사실이고) 상위권 성적을 유지하는 일이 크게 어려웠던 것 같지는 않다.
사정이 이러하니(아이들이 알아서 열심히 하고 결과도 그만큼 뒤따르니. 부모 자신들의 기대치보다 더 좋게) 부모님은 우리에게 딱히 ‘공부를 열심히 해라. 옆집 ○○는 밤새서 공부한다더라. 앞집 □□는 이번에 몇 점을 받았다더라. 너 그렇게 공부 안 해서 커서 뭐가 되려고 그러니’ 이런 류의 말을 할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우리가 공부를 잘하지 못해도 별말씀 없지 않았겠냐고? 아니다. 왜냐하면 가만히 생각해보니 우리보다는 성적이 좋지 않았던 막내는 종종 부모님에게 ‘너는 대체 뭐가 되려고 그러니. 게임 그만하고 공부 좀 해라. (이런 식의 말이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이런 뉘앙스의) 누나들하고는 왜 이리 다른지……’ 이런 류의 말을 들었다. 사실 많은 부모들이 걱정하고 안타까운 마음에 자식에게 이런 말을 하지만…… 입장 바꿔서, 비난하고 비교하는 말을 상처받지 않고 달갑게 받아들이는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그런데 여기서 또 하나 아이러니가 있는데, 나 같은 경우 성적에 편차도 별로 없이 늘 좋은 점수를 유지해서인지, 공부를 잘한다고 부모님께 크게 칭찬을 받은 적도 없다. 그냥 ‘잘했구나’ ‘이번에도 고생했다’ 이런 정도였다. 부모님의 속마음이 어느 정도로 와닿지 않았냐면, 부모님께서 공부 잘하는 자식을 대견하고 자랑스러워하고, 그분들의 자부심이었다는 사실을 20여 년이 지난 최근에 엄마와 이야기를 하다가 알게 되었다. 엄마가 말하길 늘 너희가 자랑스러웠는데 으레 잘하니까 그러려니 하고 별말씀 없으셨다고. 말씀을 하지는 않았지만 자신에게는 참으로 행복한 시절이었다고. 그때 너무 행복해서 지금 이렇게 힘든 시간을 겪는 모양이라고 하셨다. (한편, 나와 동생은 엄마와는 달리 그 시절이 그리 행복하지 않았고, 특히 중고등학생 때는 성적 때문이 아니라 불우한 가정환경 때문에 지옥이었고, 지금도 그 고통에서 헤어나지 못했는데 이 이야기는 추후 하려고 한다.)
이게 장단점이 있는데 우선 가장 큰 장점은 아이들이 때로는 부모의 인정과 사랑을 받으려고 무언가 노력을 하고, 이것이 공부일 때도 있는데, 나는 부모님을 만족시키려고 또는 부모님의 인정을 받으려고 공부를 하고 성적에 연연한 적이 없다. 나름 공부를 열심히 한 동기는 여러 가지가 있는데 때때로 공부가 재밌기도 했고, 내면의 결핍을 공부로 채우려고 했고(이건 최근에 깨달은 건데, 뭔가 사고를 치지 않고 공부 쪽으로 몰입했다는 건 꽤 다행이다 싶다), 아무튼 누군가를 위해서가 아니라 바로 나 자신을 위해서 공부할 수 있었다.
또 다른 장점이자 단점은 공부를 잘한다고 내가 잘났다든가 똑똑하다는 생각을 하지 않고, 성적(점수) 같은 것으로 사람의 우열을 가린다는 생각도 해본 적이 없고, 겸손한 사람으로 성장했다고 생각한다. 뭐, 학업성적이 좋고 나쁘고, 어느 대학교를 졸업했든, 대졸이든 고졸이든 정말로 별 편견이 없었다고 해야 할까. 그래서 처음부터 알고 만난 건 아니지만. 소개팅 첫 만남에서 남편이 고졸자라는 사실을 알고도 별로 개의치 않았었다. 여기에는 부모님의 배경도 영향을 미쳤는데, 부모님 두 분 다 학력이 높지 않아서 ‘우리 부모님도 그러신대, 뭐’라는 판단 착오를 했다. 아! 그리고 또 다른 장점이자 단점은 공부든, 일이든, 집안일이든 무엇이든 간에 기본적인 기준이 다른 사람보다 높다(이것도 최근에 깨달았다). 그래서 스트레스도 많이 받지만 성취 정도가 높은 편인 것 같다.
부모의 짧고 간결한 칭찬(이라고 쓰고 인색한이라고 읽는)이 나에게 어떤 악영향을 미쳤냐면, 내가 거둔 성과나 성취를 스스로 별것 아닌 것으로 치부하는(좋게 보면 겸손함이지만), 피땀 서린 내 ‘노력’을 자신 스스로 간과하는, 그러니까 학업 성적에 한해서 말하자면 다른 사람이 볼 때는 분명히 ‘대단하다!’ 싶었을 텐데, 나 자신은 ‘그냥 당연한? 별것 아닌?’ 성취로 여겼다는 점이다. 그러다 보니 엄마가 남자 친구의 학력을 이유로 결혼을 반대했을 때, 엄마가 지금까지 학업 성적으로 누군가를 비교하거나 차별한 말을 들어본 적이 없다 보니, ‘이거 대체 뭐지? 내가 알던 엄마는 이런 사람이 아닌데?’ 싶어서 충격이었고 매우 실망했다.
나는 여전히 학벌주의와 성적지상주의는 사라져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수차례 심리 상담을 거치면서 이제는 그와는 별개로 대졸자와 고졸자는 어찌 되었든 학창 시절 학업 성취를 거두려는 노력과 의지에서 차이가 있다는 점을 인식하고, 둘은 결코 같지 않다고 이상적인 생각을 좀 더 현실적인 사고로 바꾸었다. 나는 남편이 ‘고졸이어도 상관없어. 학력으로 사람을 판단할 수는 없어’에서 더 나아가서 왜 그 사람이 대학교에 진학하지 않았는지, 어떤 학창 시절을 보냈는지 좀 더 그 이면을 들여다봤어야 했다. 게다가 우리 부모님과 비교해서 ‘괜찮다’라는 생각이 판단 착오였다는 것은 부모 세대보다 우리 세대는 대학 진학률 자체가 다른데, 동일선상에서 높고 비교한 건 분명히 당시 그야말로 눈에 콩깍지가 씌어서 뭔가 중요한 점을 간과했다고밖에 할 수 없다.
모든 일에는 정도가 중요하듯이 부모님이 너무 과하게 칭찬했으면 그건 또 그거대로 내가 너무 오만해진다거나 그래서 공부를 열심히 하지 않고 적당히 한다든가 부모의 인정을 받으려고 성적에 집착하든가 하는 부작용이 있었겠지만, 그래도 내가 한 성취가 얼마나 특별한지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게 해 주시고, 특히 내가 한 ‘노력’에 대해서 좀 더 인정하는 말씀을 해주셨다면, 내가 내 노력의 가치를 스스로 인정하듯이 다른 사람이 한 노력이나 하지 않은 노력도 좀 더 객관적으로 바라보고 판단하는 사람으로 성장하지 않았을까, 라는 생각이 든다. 특히, 배우자를 선택할 때 좀 더 신중했을 것도 같고. 아! 그냥 그렇다는 거지 이 부분은 이제 와서 딱히 부모님을 탓하는 건 아니다. 내가 여전히 부모님을 탓하는 건 그분들의 ‘완고함’인데 이건 다른 글에서 풀어보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