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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마일펄 Jun 05. 2022

아버지가 알코올 중독이라고 왜 자각하지 못했을까(3)

어렸을 때부터 '원래' 술 취한 아버지가 일상이자 당연했다

아버지를 향한 애정, 아버지가 좋은 아빠라고 믿고 싶은 마음은 어찌 보면 인지부조화에서 오는 깨진 균형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몰라서 혼란스러워하다가 결국 합리화했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이런 복잡한 생각을 떠나서 아버지가 알코올 의존증이라고 자각하지 못한 단순한 이유는 아버지는 술을 많이, 자주 마셨기 때문에 이 모습이 익숙했기 때문이다. 아버지는 ‘원래’ 술을 좋아하고, 자주 만취해서 가족에게 행패를 부려서 나에게는 이런 아버지가 ‘당연’했다. 아버지는 운전을 하거나 운전해야 할 때를 제외하면 앞에서도 썼듯이 가족과 있을 때 거의 늘 술에 취한 상태였다. 오히려 아버지가 멀쩡하면 ‘오늘은 무슨 일이시래? 해가 서쪽에서 뜨려나?’ 생각이 들 정도였으니, 이 정도면 말 다하지 않았을까.


이번에는 신이 내린 망각이라는 축복의 수혜를 톡톡히 입어서 어렸을 때 아버지가 자행한 정서적 폭력과 학대를 거의 잊어서 구체적인 장면이나 상황은 잘 떠오르지는 않는다. 정서적으로 얼마나 공포스럽고 충격적이었는지 딱 하나 결코 잊히지 않는 사건은 다른 글에서 여러 번 언급한 만취 해서 고성을 지르고 폭언을 하는 아버지를 거실에서 중학생이었는지 고등학생이었는지 십 대 중반에 나 혼자 맞닥뜨린 일이었다. 여느 때처럼 아버지는 자정이 넘어서 잔뜩 술에 취해 몸도 잘 가누지 못하며 집에 돌아왔고, 다른 가족은 이 지긋지긋한 상황을 모면하려고 저마다 자기 방으로 뿔뿔이 흩어졌다. 미성년자인 나를 보호해야 할 어른인 어머니와 할머니도 어린 나를 외면하고, 폭력적인 상황에 그대로 노출되도록 방치했다. 그런데 이 상황에서 나는 무섭거나 원망하는 마음보다도 ‘그래, 이젠 엄마도 할머니도 힘이 드시니까. 그리고 아빠는 저러다 마니까. 손찌검하거나 물건을 던지고 부수지는 않으니까. 오늘은 나 혼자 견디면 돼. 이 지옥 같은 시간도 곧 끝나. 내가 무릎 꿇고 앉아서 고개도 못 들고 눈물을 훔치는 시간이 한두 시간을 넘지는 않겠지’라고 생각했으니, 이런 일이 얼마나 잦았던 건지 짐작조차 되지 않는다. (관련 글: 어렸을 때 내가 정신적 학대를 당했다고?)




남편에게 맞고 사는 아내의 사연을 접할 때면 ‘왜 그러고 살지? 폭력은 어떤 이유로도 정당화될 수 없어. 얼른 도망쳐!’라고 똑 부러지게 생각하고는 했다. 그 아내도 결혼 뒤 남편이 처음 폭력을 휘둘렀을 때, 무척 당황하고 놀랐을 것이다. 대번에 폭력은 나쁜 행동이고 남편은 이상한 사람이며 대체 이 비이성적인 상황을 어떻게 대처할지 혼란스럽고 두려웠을 것이다. 그런데 남편이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 현실을 부정하고 싶고, 배우자를 제대로 선택하지 못했다고 믿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폭력이라는 명백한 잘못을 저지른 사람은 상대방인데 누구보다 신뢰해야 할 관계인 배우자에게 맞았다는 사실을 수치스럽다고 여겨서 타인에게 자신의 고통을 털어놓지 못했을 것이다.


여기에서 남편이 자신의 경제적 문제(생계)를 책임지고, 이성을 잃고 폭력을 자행한 뒤 제정신이 들었을 때 자신이 미쳤다며 싹싹 빌며 사과하고, 이를 용서하는 행위를 몇 번 반복하다 보면 자신도 모르게 이 상황에 익숙하고 빠져든다. 처음 폭력을 경험했을 때는 남편이 잘못된 행동을 저질렀다고 분명히 이성적인 사고를 하지만, 결혼을 유지한 상태로 생존하려는 욕구가 비정상적인 상황을 벗어날 용기를 앞지르면 어느 순간 남편의 폭력을 ‘어쩔 수 없다’라고 정당화하고 합리화하며 당연하다고 생각하기에 이른다. 심지어 자신은 남편을 너무 사랑하고, 남편은 세상 무엇보다 소중하며, 나아가서 남편은 안쓰럽고 불쌍한 존재라서 자신이 반드시 옆을 지켜야 한다는 자기기만과 강박에 빠진다. 이는 엄마가 결혼 뒤 알코올 의존증 남편과 살면서 결국 자기기만에 빠진 과정과 정확히 일치한다.


‘아빠가 술밖에 낙이 없으셔서 그래. 술 빼면 아빠는 살아가실 수가 없어. 일이 너무 고돼서 그러신 거야. 엄마도 결혼 전에는 아빠가 이런 사람인지 몰랐어. 엄마 친정에는 주사가 심한 사람이 아무도 없었거든. 아빠는 자신의 이런 행동을 가족이 이해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계셔. 엄마도 어떻게 할 수가 없구나. 너희가 아빠를 좀 이해하면 안 되겠니?’

_브런치 글 <아버지가 알코올 중독이라고 왜 자각하지 못했을까(1)> 중에서


폭력 상황은 아니었지만 결혼생활 동안 전남편을 향한 내 감정이 왜곡된 과정과도 완전히 같은데, 나는 더 나아가지는 않았지만 아마도 이다음 단계는 이것인 듯하다. ‘그는 항상 나를 사랑한다고 말하잖아. 그는 틀림없이 나를 사랑해. 그는 잘못이 없어. 내가 맞을 만해서 그가 때리는 거야. 나를 바로잡고 잘되라고 그러는 거야. 그는 나를 사랑하기 때문에 때리는 거야.’ 누군가를 정말로 사랑하는데 어떻게 때릴 수 있겠는가. 뭔가 사소한 하나라도 더 잘해주고 싶고, 함께 시간을 보내며 아끼고 보호하고 싶지, 가슴이 미어져서 어떻게 내 손과 발로 고통을 주고 상처를 입힐 생각을 감히 하겠는가. 폭력은 무엇으로도 결코 정당화될 수 없다. 폭력은 그저 폭력일 뿐이다.


이런 맥락에서 아버지는 과연 자신의 생각과 말처럼 자식들을 사랑했을까. 백번 양보해서 아버지도 부모에게 사랑을 받아본 적이 없어서 자식을 제대로 사랑하는 방법을 몰랐다고 치자. 그런데 몰라서 그랬더라도 술 취해 부린 난동 때문에 자식이 입은 마음의 상처는 지워지지 않는다. 이것은 무엇으로도 정당화될 수 없다. 잘못은 그저 잘못일 뿐이다. 그리고 만취해서 행패를 부리는 건 결코 사랑이 아니다. 이유야 무엇이든간데 뉘우치고 사죄해야 할 크나큰 잘못이다.




이성적으로 사고할 수 있는 어른도 애정을 기반으로 한 친밀한 관계에서는 비상식적인 상황에 물들고 마는데, 부모가 세상의 전부이던 시절, 부모의 익숙한 비상식적인 행동을 아이가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일은 지극히 당연하다. 세상에서 부모라는 존재는 거의 유일하고, 어릴수록 비교군도 없으니까 아이에게는 부모의 비상식적인 말과 행동조차 상식이자 가치판단의 기준으로 자리 잡는다. 술을 좋아하고, 평소 거의 술에 취해 있고, 어렸을 때는 만취해서 가족에게 행패를 부리는 아버지가 나에게는 최근까지도 ‘당연’했듯이 말이다.


아버지는 지금도 하루라도 술을 마시지 않는 날이 거의 없다. 매 식사에서 반주는 기본이며, 친구들과 약속에서도 술은 거의 빠지지 않는다. 조금이라도 술기운이 올라오면 눈을 게슴츠레하게 뜨고 기분이 고조돼 몇 시간이고 자기 할 말만 끝없이 늘어놓는다. 누가 봐도 주량이 세고 과음이 잦은 알코올 의존증(중독)인데 대체 왜 이를 자각하지 못했을까. 계속 말했듯이 이 상황과 아버지의 모습이 평생 익숙했고, 과거보다 훨씬 나아졌기 때문이다. 아버지가 젊은 시절처럼 완전히 만취해서 고주망태가 돼 가족에게 고함을 지르는 난폭한 행동은 하지 않고, 주량도 예전보다는 줄었기 때문이다. 아버지의 극단적인 상태를 기준으로 삼다 보니 현재의 행동을 ‘많이 좋아졌다’, ‘이만하면 괜찮다’, ‘그러니 이 정도는 이해해야 한다’라는 인지 왜곡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그런데 과연 아버지가 과거보다 나아졌다고 현재 행태를 ‘괜찮다’라고 할 수 있을까. 건강검진에서 금주를 하라는 의사 권고를 무시하고 그래도 한 잔은 괜찮다며 어김없이 막걸리를 꺼내 드는 행동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과거보다 나아졌다고 하더라도 괜찮지 않은 건 결국 괜찮지 않다고 말해야 한다. 무엇보다 내가, 아버지가 주량이 줄었든 어떻든 상관없이 이제는 술을 한 모금이라도 입에 대는 아버지를 견딜 수 없다. 내가 더 이상 괜찮지 않다.


몇 달 전만 하더라도 아버지가 과거 행동을 사과하기를 바랐는데, 이제는 용서를 고민하고 싶은 마음조차 들지 않는다. 아버지가 사과를 한 적이 없으니 나는 감히 용서를 꿈꿀 수 있는 사람도 아니다. 나는 아버지의 사과가 부녀관계 회복의 출발점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상담 선생님은 아버지처럼 피해의식과 자격지심 크고, 자신이 희생했다는 생각이 강하고, 불행한 사고와 몇 차례 큰 수술을 경험해 세상에 원망이 가득한 사람은 사과하기 결코 쉽지 않으리라고 말씀하셨다. 나도 두말없이 그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직접적으로 이렇게 말씀하시지는 않았지만 이제는 아버지를 평생 보고 살지 않아도 된다고, 그래도 괜찮다고, 그 누구도 나에게 불효자식이라고 손가락질할 수 없다고 확신이 서고 마음이 갈수록 기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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