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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마일펄 Mar 09. 2023

로즈가 '굿바이, 마더'라고 좀 더 일찍 말했다면...

<타이타닉>처럼 아름답고 낭만적인 영화는 탄생하지 않았겠지.

지난달에 25주년 기념으로 재개봉한 영화 <타이타닉(제임스 카메론, 1997)>을 극장에서 3D로 봤다. 상영 시간이 3시간이 넘어서 미루고 미루다가 간신히 재개봉 마지막날에 봤는데, 재개봉 영화는 관객 수나 인기에 상관없이 보통 2주간 상영한다고 새롭게 알게 되었다.


사실, <타이타닉>은 지금까지 서른 번도 넘게 본 영화이고, 극장 관람은 2012년 재개봉에 이어서 두 번째인데, 그때는 국내에 막 소개된 4D 상영관에서 영화를 봤다. 영화를 오감으로 느낄 수 있다는 홍보와 달리 영화에서 배가 흔들릴 때 의자가 같이 흔들리고, 물에 빠질 때 의자에서 갑자기 얼굴로 물이 분사되는 등 조악한 4D 기술 때문에 오히려 영화에 제대로 집중할 수 없었던 썩 유쾌하지 않은 기억으로 남아있다.


처음으로 오로지 영화에만 집중할 수 있는 어두운 상영관에서 넓은 스크린 화면으로 이 영화를 본 덕분인지, 이미 서른 번도 넘게 영화를 본 누적된 경험치 때문인지, 그것도 아니면 나이가 들면서 인생 경험이 쌓여서 시야가 넓어졌는지 이번에는 영화를 좀 다른 시각에서 볼 수 있었다. 지금까지는 잭과 로즈의 낭만적이고 아름다운 사랑 이야기, 실화에 기반한 초호화 유람선 타이타닉호의 침몰을 그린 재난 영화, 이 둘을 전후반부로 적절히 나눠 탄탄하게 구성한 스토리 흡입력이 대단한 오락 영화로 즐겼다면, 이번에는 로즈가 잭이라는 운명의 상대를 만나 자아정체성을 발견하고 구원받으며 단단한 어른으로 성장하는 장면들이 유독 눈에 들어왔다.




남들이 부러워할 만한 모든 것을 다 갖춘 듯 화려한 겉모습과 달리 로즈의 답답한 심경과 억압받은 감정, 자신의 뜻대로 전혀 흘러가지 않는 그녀가 처한 상황과 입장, 앞으로 어떤 이야기들이 펼쳐질지에 대한 영화의 주제는 영화 초반 나이 든 로즈가 타이타닉에 승선하는 자신의 과거의 모습을 회상하는 짤막한 내레이션에 전부 함축돼 있다.


타이타닉은 모두에게 꿈의 배였고
내겐 노예선이었다오.
족쇄를 차고 미국으로 송환되는……
겉으로는 나도 요조숙녀였지만
속으로는 비명을 질렀죠.


로즈는 누구보다 똑똑하고 진취적이며 강인하고 사리분별이 분별하며, 자유로운 여성이다. 이런 그녀가 바다에 뛰어들어 죽고 싶을 만큼 숨 막히는 가운데도 정체성의 혼란을 느끼며 맞지 않는 옷에 자신을 억지로 끼워 넣으려고 노력하며 벗어나지 못하는 가장 큰 이유는 바로 유약한 엄마라는 무거운 존재 때문이다. 로즈와 엄마의 관계, 엄마의 성격은 다음의 대화에서 잘 드러나는데, 심지어 로즈는 엄마가 자신에게 무리한 의무를 지우며 짐을 떠넘기고 있다고도 분명히 알고 있다. 요즘으로 치면 엄마는 로즈에게 가스라이팅을 일삼으며 지배하고 소유하려고 하는데, 로즈는 이를 알면서도 선뜻 벗어나지 못하고 망설이며 자신의 불합리한 처지를 수용하기로 마음먹는다.


- 엄마: 아버지가 남긴 빚을 우리 이름값으로 막고 있어. 우리에겐 그 이름밖에 없어. 널 이해 못 하겠구나. 하클리 가문은 훌륭해. 우리도 살아남을 수 있어.
- 로즈: 왜 제게 그런 짐을 주세요?
- 엄마: 넌 왜 그리 이기적이니?
- 로즈: 제가 이기적이라고요?
- 엄마: (울먹이며) 내가 재봉사로 일하는 걸 보고 싶니? 그걸 원하는 거야? 우리 물건이 경매에 넘어가는 걸 보고 싶어? 우리 추억을 날려버리고 싶니?
- 로즈: 불공평해요.
- 엄마: 그야 당연하지. 우린 여자니까. 여자에게 선택권은 없단다. 


엄마는 체면을 너무 중시하고 사고(思考)는 편협하며, 자신의 빈 껍데기를 감추는데 급급해서 위선을 떠는데 익숙하고, 현실 감각은 떨어지는 사람이다. 로즈를 사랑하지 않거나 행복하지 않기를 바라지는 않겠지만, 자신은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서 자식을 자신의 불만족스러운 현실을 구제할 대리자이자 수단으로 여기고 있다. 이 영화의 시간적 배경은 1912년이지만 편협한 낡은 사고방식을 자식에게 강요하고, 이를 따르지 않으면 ‘이기적인 자식’이라고 죄책감을 자극해 착하고 마음 여린 자식이 결국 부모에게 복종하고, 고통받는 패턴은 어딘가 익숙하다. 로즈와 엄마의 관계는 고속 성장하며 가치관과 사회환경이 급변한 우리나라의 부모-자식 간에서 흔히 나타나는 극심한 갈등과 혼란을 보는 듯했다.


로즈처럼 부모가 자신에게 불합리한 짐을 지운다고 알면서도, 자신의 처지를 비관해 급기야 울먹이며 ‘내가 결국 재봉사로 일을 해야겠니? 그걸 원하는 거야’라고 말하는 부모에게 ‘네, 재봉사로 일을 해야 하는 처지라면 하셔야죠. 못할 게 뭐예요?’라고 냉정하게 말할 수 있는 자식이 얼마나 될까. 하지만 나는 영화의 내용을 알면서도 이 장면에서 속으로 ‘로즈, 엄마에게 외쳐. 재봉사로 일해야 한다면 해야죠. 그게 우리가 당면한 현실이라면 해야지 못할 건 또 뭐예요? 라고 네 의사를 당당하게 밝혀. 넌 할 수 있어. 그게 네가 그토록 원하는 독립의 시작이야.’라며 로즈가 엄마의 올가미에서 빠져나오길 응원하고 있었다.




침몰하는 타이타닉에서 엄마가 구명정에 오를 때 로즈는 결국, 엄마에게 영원한 작별을 고한다. 로즈와 엄마가 마지막으로 같이 등장하는 장면에서 생각이라고는 전혀 없는 용납하기에는 한계를 넘어버린 엄마의 극단적으로 위선적이고 가식적인 모습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 엄마: 구명정도 선실 등급이 있나요? 붐빌까 봐 걱정이네.
- 로즈: 제발 좀 닥쳐요! (Shut up!) 아직 모르겠어요? 바닷물은 찬데 구명정은 모자라요. 절반밖에 못 탄다고요. 이 배의 승객 절반은 죽을 거예요.


- 마거릿: 로즈, 어서 와요. 아직 자리가 남았어요. 어서 와요. 당신 차례예요.
- 엄마: 보트로 와라, 로즈.
- 로즈: 잘 가요, 어머니. (Goodbye, mother.)



자기 자신을 사랑하고 사람을 있는 그대로 수용하며 본질을 볼 줄 아는 잭을 만난 로즈는 엄마의 정신적 억압에서 벗어나 조금씩 변하면서도 오랫동안 몸에 밴 엄마를 향한 의무감과 일말의 죄책감을 완전히 떨치지는 못하고 여전히 약간의 혼란감을 느끼고 있었다. 그런데 사람들의 목숨이 경각에 달린 재난 상황에서조차 엄마는 1등급 승객으로서 침몰하는 배에서 먼저 탈출하는 특혜를 누리면서도 감사하기는커녕 구명정의 선실 등급 운운하며 진절머리 나는 특권의식을 드러낸다. 허세와 위선에 절은 엄마의 밑바닥을 본 덕분에 로즈는 냉정한 현실감각을 깨치고 미련 한 점 없이 ‘굿바이, 마더’라는 짧은 작별인사를 건넨다. 비로소 엄마에게 완전히 벗어나 인생의 키를 오롯이 자신이 쥐고 자기라는 배의 선장이 돼 인생이라는 망망대해를 제대로 항해하게 된다.


자식에게 의존하는 성향이 짙은 통제, 소유하려는 요구가 강한 반면, 표정과 온몸으로 자신의 유약한 면모를 고스란히 드러내며 죄책감을 자극하는 것이 타고나길 몸에 밴 엄마(사람)에게 ‘굿바이, 마더’라고 진정으로 말하고, 정서적으로 독립하는 과정이 얼마나 고되고 숨 막히고 혼란스러운지 누구보다 잘 알기에 ‘굿바이, 마더’라는 인사를 끝으로 자신을 갈망하는 눈초리를 보내는 엄마에게 냉정하게 등을 보이며 뒤돌아서는 로즈의 모습이 긴 여운으로 남은 것 같다. 만일 로즈가 좀 더 일찍 '굿바이, 마더'라고 외쳤다면 어땠을까? 그럼, <타이타닉>처럼 아름답고 낭만적인 사랑을 그린 영화가 탄생하지 않았겠지? 하지만 현실의 로즈들은 결코 자신이 해소할 수도, 책임질 수도 없는 죄책감과 무거운 짐을 내려놓고 '굿바이, 마더'라고 당당하게 목소리를 높이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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