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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마일펄 Dec 18. 2022

우리는 왜 헤어졌을까

평생 감추고 싶은 밑바닥(결함)을 드러낸다는 것

새하얀 첫눈이 흩날리는 날, 예쁜 카페에서 친구와 따뜻한 자몽차를 마시고 있었다. 엄밀하게 일기예보에 따르면 올해의 첫눈은 아니지만, 밤새 내린 어설픈 눈은 아침이 되기 전 흔적도 없이 녹아 사라지곤 했다. 평소 마음을 터놓고 지내는 좋은 친구와 우연히, 제대로 된 의미의 첫눈을 함께 감상하는 추억을 하나 더 쌓아서 행복했다.


친구는 몇 년 사귄 애인과 결혼을 해야 할지 혼란스럽다고 했다. 이전 애인과 결혼 직전에 관계가 파탄이 나 힘든 시간을 겪은 상처를 몇 년이 지났지만 아직 다 회복하지 못한 듯했다. 친구도 이 두려움은 현재의 애인이 아니라 자신의 내면 문제인 것 같다는데 동의했는데, 나는 친구가 지금보다 좀 더 자신의 이러한 감정이나 생각을 애인에게 솔직하게 고백하고 의논하면 좋을 것 같다고 했다.


한마디로 조그만 부스러기 하나 남기지 말고, 불안과 우울로 점철된 자신의 밑바닥을 탈탈 털어놓기. 내 안의 가장 인정하고 싶지 않고, 드러내고 싶지 않은, 가장 찌질하고 불편한 감정을 최대한 솔직하고 담담하게 고백하기이다.




내 지난 결혼생활을 돌아보니 우리는 결혼 전 서로 상대방이 절대 알지 않기를 바라는 쪽팔린 모습을 공유하는 이 가장 중요한 과정을 빠뜨렸다. 결혼의 종지부를 찍은 표면적인 이유는 수없이 많지만, 결국 내가 이혼을 선택한 궁극적인 이유는 ‘신뢰의 붕괴’였는데, 이는 달리 말하면 상대방이 끝끝내 자신만의 19호실, 즉, 가장 가까워야 할 아내에게조차 밑바닥을 드러내지 못할 사람이라는 데 판단이 섰기 때문이었다.


‘서로의 치명적인 밑바닥을 남김없이 드러내고 온전히 이해받기’라는 가장 중요한 절차를 빠뜨린 대가로, 지난 결혼생활은 나에게 기다림의 연속이었다. 나도 불안정한 성장기를 보냈고, 부모와의 관계가 편하지 않고, 결코 행복한 가정환경은 아니었기에, 나와 비슷하다고 여긴 그의 불행한 성장 과정을 이해하고 있다고 믿었다. 그가 혼란한 마음을 정리하고 중심을 잡고 언젠가는 ‘우리 가정’으로 ‘나’에게로 돌아오리라고 참고 기다렸다.


그것은 나의 오만이었고, 기다림은 방치에 불과했다. 그가 용기 내서 자신만의 19호실을 열기 전에는 결코 나아지지 않을, 내가 어찌할 수 없는 상대의 깊은 불안과 우울, 상처와 아픔을 오만하게 내 몫이라고 여겨서 지나치게 오래 끌어안고 있었다. 이는 진정한 사랑이라고 착각한 자기파괴적 행위에 지나지 않았다. 결코 획득할 수 없는 허망한 신기루에 불과했다. 그 대가로 내 정신은 갈수록 피폐하고 건강은 서서히 악화됐는데, 어느 순간부터 이런 상황과 감정에 익숙해서 나 자신이 무너지고 있다고 눈치채지 못할 지경이 이르렀다.


모순적이게도 그가 먼저 강력히 이혼을 원해서 비로소 이 상황에서 벗어날 수 있었는데, 만일 나 자신을 그 비참한 극한의 상황에 계속 방치했다면 과연 나는 지금 어떻게 되었을지…… 그 생각만 하면 지금도 아찔하고 소름이 돋는다.




서로의 밑바닥을 남김없이 드러내기. 이는 달리 말하면, 자신이 가장 인정하고 싶지 않은 부모의 가장 추악하고 나약한 모습 즉, 부모의 밑바닥을 인정하고 드러내기라고 할 수 있다. 이를 제대로 인정하는 순간, 비로소 부모와의 감정적인 탯줄을 완전히 끊어내고, 부모는 부모로, 나는 나로 완전한 별개의 개체로 살아갈 수 있게 된다.


그 누구에게도 드러내지 않던 내 오랜 밑바닥은 알코올의존증 아버지였고, 나의 19호실을 처음으로 꺼내 보인 사람이 바로 전남편이었다. 비슷한 상처를 안고 있는 사람이라서 나의 감정과 마음을 이해하고, 앞으로도 이해할 수 있다고 믿었는데, 그의 상처는 이런 나조차 헤아릴 수 없을 만큼 깊고 어두웠던 것 같다. 이혼하고 나서야 뒤늦게, 차마 밝히지 못한 그 자신의 상처가 너무나 커서, 내가 드러내서 양해를 구한 나의 19호실을 그는 단 한 번도 제대로 인정하거나 수용하지 못했다고, 즉, 나는 결혼한 그날부터 이혼하는 순간까지 단 한 번도 제대로 이해받거나 존중받지 못했다고 깨달았다.


그는 끝끝내 자신의 19호실을 나에게 밝히지 않았는데, 아주 우연한 계기로 이혼 직전에 그가 그토록 감추고 싶어 한 진실을 알게 되었다. 그토록 감추고 싶어서 전전긍긍한 밑바닥을 결국 나에게 들켰다는 사실을 그도 알고 있는지는 모르겠다. 자신의 알량한 자존심을 지키고자 한 그의 판단은 우습게도 맞기도 하고, 틀리기도 하다. 만일, 그가 용기 내서 자신의 19호실을 열었다면, 과연 나는 그의 밑바닥을 인정하고 받아들일 수 있었을까. ‘그렇다’라는 대답이 선뜻 나오지는 않는다. 아마도 나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당장 관계를 정리했을 것이다.


이것이 그를 향한 나의 사랑의 한계이자, 내 인간 됨됨이의 한계였다. 우리의 무른 사랑과 옅은 신뢰는 환상에 사로잡힌 착각과 달리 단 한 번도 공고하거나 단단한 적이 없었다. 그의 입장에서 내가 그를 있는 그대로 수용할 수 없고, 신뢰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기 때문에 끝끝내 자신의 밑바닥을 드러낼 수 없었던 것 같다. 그런데 모순적이게도 상대방이 떠날까 봐 밑바닥을 드러내지 않고 꽁꽁 감춰둔다면 결국 그토록 우려했던, 상대방이 자신을 떠나는 불행한 일은 언젠가, 반드시 닥치고 만다. 해야 할 말을 하지 않고 그 시기를 모면하고 지나가버리면, 관계가 그럭저럭 이어지는 것 같지만, 속으로는 이미 틈이 벌어지기 시작해 이별을 유예하는 과정에 접어든 것에 불과하다.




부모는 좋든, 싫든 나를 낳아서 세상에 존재하게 하고, 넘치든 부족하든 한 사회의 구성원으로 자리 잡도록 키워준 존재라서, 우리는 부모의 치명적인 결함을 나의 약점이라고 착각해서 고통받고 좌절하고 갈등하고 괴로워한다. 자식과 부모는 서로 다른 존재이지만, 자식은 부모의 영향을 받지 않고 자랄 수는 없다. 부모의 결함이 치명적이면 치명적일수록 ‘혹시, 나도 지금 당장은 아니더라도 언젠가 부모님처럼 되는 건 아닐까?’라는 불안과 공포에 휩싸인다. 점점 더 자신의 19호실을 아무도 보지 못하게 꽁꽁 싸매서 자신조차도 눈치채지 못할 만큼 깊고 깊은 어둠 저편으로 밀어내 버리고 마치 괜찮은 것처럼, 멀쩡한 사람인 것처럼 그렇게 살아간다. 사실은 매 순간이 외줄에 올라 평가받는 것만 받고, 조금만 삐끗하면 고꾸라지고 마는 살얼음판을 걷는 것 같아서 전혀 괜찮지도, 멀쩡하지도 않은데 말이다.




그런데 내 존재 자체를 뒤흔들고 위협할 만큼 거대한 공포와 불안으로 느낀 밑바닥을 막상 타인에게 드러내면 우습게도 ‘내가 그동안 별것도 아닌 일로 왜 이렇게 전전긍긍하며 힘들었을까.’, ‘그동안 대체 허상을 붙잡고 무엇을 했던 걸까’라는 허망함이 밀려온다. 그동안 19호실에 지나치게 집착해서 에너지를 쏟느라 보이지 않던 새로운 세상과 관계가 보이기 시작한다.


그 누구에게도 공개하지 않은 19호실을 내비쳤을 때, ‘상대가 나를 떠나면 어떡하지’, ‘그래서 내가 또 상처받으면 어떡하지’, ‘역시 세상은 불공평해. 나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아’라는 두려움은 ‘만일 상대가 떠나면 어쩔 수 없지. 그건 그 사람의 한계인 거야. 흔히 가질 법한 편견이니까 이해해. 하지만 나는 괜찮아. 나는 결코 부모와 같은 사람이 아니거든’이라는 의연함으로 변하게 된다.


인생은 모순의 연속인 것이, 자기 내면의 얽히고설킨 실타래를 잘 풀어서 정갈하게 정리해서 자신의 19호실을 공개해야 할 사람에서 이처럼 의연하게 보여준다면, 아마도 우려하던 대로 모든 상대가 떠나버리는 일 따위는 벌어지지 않을 것이다. 인간의 욕망이 향하는 방향은 제각각이라 100% 모든 사람이 곁에 남는다고 장담할 수는 없다. 그러나 오랜 연인이나 부부의 경우 겉으로는 경제적인 이유나 그 외 다른 이유로 헤어지는 것처럼 보이지만, 면면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괜한 자존심에 자신의 밑바닥을 드러내기를 거부하고 솔직하지 못해서, 즉, 반복된 거짓말로 신뢰가 완전히 깨져버려서 관계가 끊어지는 것이지, 오랜 관계에서 여타 다른 상대의 부족한 점들은 나 또한 마찬가지기에 별 문제가 되지는 않는다.




우리는 연애 때 피상적으로 서로 좋은 모습, 잘 통하는 모습에 속아 결혼을 한 뒤, 그제야 서로의 밑바닥을 체감하며 혼란과 갈등을 겪는다. ‘결혼이란 내가 생각했던 것과 너무 다른데?’라며 고통받고 후회하는데 때는 이미 늦었다. 만일 누군가 나에게 ‘어떤 사람과 결혼해야 할까요’라고 묻는다면, ‘서로의 밑바닥을 고스란히 드러내고 온전히 수용하기로 했을 때’라고 대답해야겠다. 만일, ‘왜 이혼하셨어요?(왜 헤어지셨어요?)’라는 물음에 꼭 답해야 한다면, ‘서로의 밑바닥을 제대로 보지 못해서, 온전히 수용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말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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