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 안의 소중한 수많은 잭 도슨을 발견하시기를!
이제 여러분도 잭 도슨이란 사람이 있었다는 걸 알고
내 인생을 송두리째 구해줬다는 것도 알죠.
난 잭의 사진도 없어요.
그는 오직 내 기억 속에만 존재하죠.
영화 속에서 잭 도슨이라는 사람의 흔적은 어디에도 남아있지 않다. 포커게임에서 타이타닉의 3등실 티켓을 운 좋게 손에 넣어 승선했으니 탑승객 명단에도 없고, 배가 침몰한 뒤 결국 목숨이 다해 저 깊은 바닷속에 묻혀서 실제로 세상에 더는 존재하지 않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잭은 오로지 로즈의 기억 속에만 존재하는데, 잭은 로즈의 목숨은 물론이고 영혼까지 송두리째 구해준 유일무이한 사람이다. 생존한 로즈는 이름을 확인하는 승무원에게 자신을 ‘로즈 드윗 부카터’가 아니라 ‘로즈 도슨’이라고 밝힌다. 로즈는 잭이라는 사람과의 짧은 인연을 계기로 오랜 자아정체성의 혼란을 종식하고, 자신이 바라던 모습으로 거듭나며 비로소 자기 인생을 살아간다.
사실, 잭 도슨이라는 매력적인 인물은 연기를 한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의 외모 전성기 시절의 미모를 빼고 생각하더라도, 건강한 자아상을 가진 이상적인 인물에 가깝다. 그는 10대 중반에 부모를 여의었고 가난하지만 인생의 예측불가함을 일찍이 깨달아 현재 가진 것의 소중함을 알고, 현실에 충실한 사람이다. 자유로운 영혼으로 세상 경험이 풍부해서 사고방식이 유연하고 인간이나 사물의 겉모습이 아니라 본질을 볼 줄 안다. 그렇다고 대책 없는 낙관주의자나 낭만주의자는 아니며, 세상물정도 잘 알고, 남들이 바라보는 자신의 모습은 어떨지 자기 이해도 높은 사람이다.
(경험에서 깨닫고 내면으로 체화한 근거 있는) 자존감이 높고, 유연한 사고방식으로 상황 파악과 대처 능력이 뛰어난 잭이 하루가 다르게 변해서 예측할 수 없고, 한편으로 도처에 기회가 널린 현대 사회에 태어났다면 아마도 사회적으로도 성공했을 가능성이 높지 않았을까 싶다. 잭의 됨됨이는 멋지게 차려입고 1등실 만찬장에서 로즈의 지인들과 식사를 할 때 로즈의 엄마와 주고받는 대화에서 가장 직접적으로 드러난다.
- 로즈 엄마: 정처 없이 떠도는 생활이 마음에 드나요?
- 잭: 네, 그렇습니다. 전 필요한 건 다 가졌어요. 제가 숨 쉴 공기와 그림 그릴 종이도 있죠. 더욱 행복한 것은 하루하루가 예측 불가능이며, 누굴 만날지도 모르고 어딜 갈지도 모른다는 거죠. 어젯밤에는 선교 밑에서 자고 있었는데, 지금은 세계 최고의 배에서 여러분과 샴페인을 들고 있잖아요. 인생은 축복이니 낭비하면 안 되죠. 미래는 아무도 모르는 법입니다. 어떤 일이 일어나든 대처하는 법을 배워요. 순간을 소중히 해야죠(To make each day count).
인생은 예측할 수 없으니 순간을 소중히 해야 한다(To make each day count)’는 잭의 대사는 제임스 카메룬 감독이 이 영화에서 관객에게 가장 하고 싶은 말이자 이 영화의 주제일 것이다. 잭의 말이 사회적 지위가 높은 부자인 사람들 틈에서 열등감을 애써 감추고 알량한 자존심을 세우려는 자기 합리화가 아니라 설득력 있는 진심으로 다가오는 이유는 영화 내내 그가 일관성 있는 말과 행동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특히 식사 장면 이전에 로즈와 처음으로 서로에 대해 짧지만 깊이 있는 대화를 나눈 모습 때문도 인상적인데, 로즈는 잭이 그린 그림을 보며 서로 이런 대화를 주고받는다.
- 로즈: 이 여자를 좋아했군요. 여러 번 그렸잖아요.
- 잭: 손이 정말 아름답죠?
- 로즈: 이 여자를 사랑했었군요.
- 잭: 아뇨, 손만 사랑했죠. 이 여자는 외다리 창녀였어요. 보이죠?
- 로즈: (당황스러움을 애써 감추려는 표정을 지으며)
- 잭: 유머 감각은 있었죠.
- (다시) 잭: (다른 그림을 보여주며) 이 여성은 매일 밤 술집에 왔고 가진 보석을 전부 매달고 잃어버린 사랑을 기다리고 있죠. ‘보석 부인’이라고 불렀어요. 옷은 다 낡았죠.
- 로즈: 재능이 있네요, 잭. 정말이에요. 사람을 보잖아요.
(You have gift, Jack. You, doo. You see people.)
잭은 어느 여인이 외다리 창녀로 불린다고 아는 현실감각은 있으면서도, 그 여성이 손은 아름답고 유머 감각이 있다는 또 다른 면모를 발견하고 수용할 줄 알았고, 낡은 옷에 보석을 치장하고 매일 밤 술집에서 시간을 보내는 여성의 외로움을 볼 줄 알았다. 로즈 또한 보통 사람들처럼 겉모습으로 누군가를 섣불리 판단하지 않고 균형 잡힌 시각으로 내면을 살필 줄 아는 잭처럼, 잭이라는 사람의 본질을 꿰뚫어 볼 줄 아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잭처럼 능력 있는 화가를 믿고, 몸에 오로지 고귀한 다이아몬드 목걸이 하나만을 걸친 자신을 그림 속 외다리 창녀처럼 그려 달라고 부탁했을 것이다.
한편, 로즈에게 잭은 자신이 그토록 환멸과 염증을 느끼던 기존 세계관을 뒤흔들고, 자신이 원하는 삶의 방향으로 나아가도록 깊은 영향을 미치고 이끌어 준 사람이지만, 타자의 세계관에 갇혀서 갈등하고 고통받던 로즈를 수렁에서 구한 사람은 결국 로즈 자기 자신이다. 로즈와 잭이 뱃머리에서 양팔을 벌리고 입맞춤을 하며 사랑을 고백하던 세기의 낭만적인 장면이 펼쳐지기 전에, 로즈는 실은 엄마와 약혼자의 강압에 못 이겨 기존 세계를 선택하기로 마음먹는다. 이때 잭은 자신과 로즈가 처한 상황과 감정을 정확하게 꼬집는다.
- 로즈: 난 약혼했어요. 칼과 결혼할 거예요. 그를 사랑해요.
- 잭: 로즈, 당신은 대하기 힘든 여자예요. 게다가 버릇도 없죠. 그렇다 해도 당신은 정말 놀랍고도 굉장한 여자예요.
- (다시) 잭: 난 바보가 아니에요. 세상이 어떤지도 알죠. 내 주머니엔 단돈 10달러뿐이죠. 당신에게 줄 게 없다는 건 저도 알아요. 이해합니다. 하지만 너무 늦었어요. 당신을 따라 뛴다는 말 기억하죠? 당신이 괜찮다는 말을 듣기 전엔 돌아설 수 없어요.
- 로즈: 전 괜찮아요.
- 잭: 당신은 덫에 걸렸어요. 덫을 벗어나지 않으면 죽어요. 당신은 강하니까 바로 죽진 않겠지만, 언젠가 되었든 내가 사랑하는 당신 안의 열정이 다 소진할 거예요.
- 로즈: 날 구하는 것도 당신 소관은 아니에요.
- 잭: 그렇죠. 당신만이 구할 수 있죠.
지난해 이혼의 상처를 위로받고 싶어서 찾아간 부모님께 오히려 더 큰 상처를 입고 말았다. 믿음이 컸던 만큼 마음의 상처가 얼마나 깊은 지 억울함과 배신감에서 잘 회복되지 않았다. 가족이란 힘들 때 곁을 지키는 사람들이라는 굳은 믿음은 산산조각 나버렸다. 한 발자국 떨어져서 부모라는 사람들을 다른 각도에서 새롭게 바라보자, 그 결과는 더 처참했다. 로즈처럼 자신의 인생이 끝나버렸다는 극단적인 생각까지 몰리지는 않았지만, 로즈와 그녀의 엄마와의 관계가 지금까지 내가 부모님과 맺었던 관계였다. 잭이 지적한 대로 나는 평생을 덫에 걸려서 살고 있었다. 나도 로즈처럼 강한 사람이라 지금까지 어느 정도는 견뎠지만, 그들의 짙은 의존성과 교묘한 통제 욕구가 점차 내 숨통을 죄여오고 있었다. 그것이 오랜 갑갑함과 불안감, 내 뜻대로 인생을 살면서도 때때로 마치 다른 사람의 인생을 사는 것과 같은 혼란스러움의 근원이었다. 그래서 서른 번도 넘게 본 영화인데 불현듯 로즈에게 감정이입을 하게 된 것 같다.
깊은 외로움과 슬픔이 엄습하자 ‘잭처럼 나를 끝까지 믿어주고, 믿을 수 있는 사람이 인생에 단 한 명이라도 있었다면 아무리 힘든 일이 닥치더라도 그 사람이 나에게 보내준 무한한 믿음을 떠올리며 어떻게든 잘 헤쳐나갈 수 있을 텐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면서 다시 또 이 역할을 제대로 해주지 못한 부모를 향한 원망이 고개를 빼꼼히 드는 순간 문득, ‘하지만 나에게 한 명의 굳건한 잭은 없지만, 도움이 필요할 때마다 내 마음을 오고 간 수많은 작은 잭들이 나를 지켜주고 자극하고 위로하며 현재의 나를 만들지 않았을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돌이켜보니 이혼해서 힘든 시간을 보내는 자식을 위로하기는커녕 심지어 내 성격을 탓하거나 자신들의 감정을 살펴달라고 떼쓰며 충격과 배신감을 안긴 사람은 부모가 거의 유일했다. 부모를 제외한 거의 대부분의 친구들, 선생님, 선후배들은 자신이 할 수 있는 한 아낌없는 위로를 건넸고, 나는 그들에게 따뜻한 진심을 느꼈으며, 오히려 내 이혼을 계기로 소중함을 깨닫고 더 가까워진 사람도 많았다. 부모가 안긴 결핍에 지나치게 몰두해서 집착하는 것은 그동안 나를 위로하려고 애쓴 사람들에 대한 예의가 아니었다. 나는 다른 성숙한 부모가 해줄 수 있는 이상의 것들을 그들에게 받았는데, 부모에게 받은 상처를 계속 끌어안고 있다면 이는 어린아이가 징징거리는 것과 다르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처럼 내 인생을 스쳐 지나간 내 안의 무수히 많은 소중한 잭들을 깨닫자 내 근본을 뒤흔들 만큼의 강력한 불안감과 처절한 외로움은 찾아오지 않았다. 지금까지 차곡차곡 쌓아온 나의 지지기반은 이제는, 실은 부모가 아니라 주변의 수많은 불완전한 좋은 사람들이었다. 이처럼 나의 단단한 진짜 뿌리를 발견하자 때때로 외롭지만 더 이상 외롭지 않았다. 오랫동안 끌어안은 깊은 상처가 조금은 더 치유되고, 불안감을 잦아들며 심리가 안정되는 것 같았다. 앞으로 어떤 일이 닥치더라도 잭이 남긴 유산을 가슴속에 품고 사는 로즈처럼 견디고 버티고 나아갈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러분도 운명처럼 내 인생을 구원하러 찾아올 단 한 명의 잭이 아니라, 자기 안의 조그마한 여러 명의 잭을 발견하고 소중하게 아껴주기를 바란다. 그럼, 고단한 인생이 조금은 더 포근하고 따뜻해질 것이다.
관련 글
* 로즈의 성장기로 바라본 <타이타닉> 해석을 영상 소개로도 만나보세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