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대 중반 급격한 노화에 따른 삶의 태도 변화
어머니가 말씀하셨다.
산다는 건 늘 뒤통수를 맞는 거라고.
인생이란 너무 참 어처구니가 없어서 절대로 우리가 알게 앞통수를 치는 법이 없다고.
나만이 아니라 누구나 뒤통수를 맞는 거라고. 그러니 억울해 말라고.
어머니는 또 말씀하셨다.
그러니 다 별일 아니라고.
하지만 그건 육십 인생을 산 어머니 말씀이고.
아직 너무도 젊은 우리는 모든 게 다 별일이다, 젠장
_ 노희경 극복, <그들이 사는 세상> 중에서
만 36세. 조선시대 같았으면 적어도 애 서넛은 낳고 어쩌면 손주까지 봐서 할머니 소리 들으며 생의 후반부를 시작하고도 남았을 나이. 2023년에는 사회와 언론의 시선에서 30대 후반까지 MZ세대라는 희한한 용어로 묶어서 청년 취급을 하지만, 내가 경험한 20대와 30대는 결코 같지 않다. 외모는 젊어서 20대 같은 청년 행세를 할 수도 있겠지만, 30대 중반은 급격한 노화를 겪으며 ‘이러다가 돌연 죽는 거 아니야?’ 싶은 공포에 가까운 불안감에 한 번 즈음 사로잡히는 시기이다.
검은 머리카락 사이로 어느 날 문득, 도드라져 보이는 흰 머리카락은 더는 새치가 아닌 앞으로 염색이 아니면 감출 수 없는 흰머리이다. 입술과 양볼 사이, 코에서 이어진 팔자주름이 깊어져 나이 듦을 실감하고, 웃을 때 눈가 주름은 이미 생긴 지 오래다. 전보다 이도 시리고, 손목 통증은 만성이고, 사는 데 아직 지장은 없지만 한쪽 무릎의 연골이 닳아감을 느끼며, 상처나 멍이 생기면 완전히 아무는데 한 달은 기본이라 몸을 사리고는 한다. 몇 살 더 많은 40세 전후 언니들을 만나면 자궁근종 수술을 했거나, 갑상선기능이상이나 녹내장 등을 진단받아서 약을 먹거나, 허리나 목 디스크 진단을 받아 1년 간 휴직했다는 근황을 심심치 않게 전해 듣고는 한다.
50~60대 이상의 어른에게 30대 중반은 한창 좋은 나이일지 몰라도, 막상 이 나이대를 지나는 사람은 나이 듦과 질병, 죽음 같은 실존적인 문제를 난생처음 구체적으로 고민하고는 한다. 연구 결과에 따르면 실제로 노화는 만 26세부터 시작돼 만 34세, 만 60세, 만 78세에 급속도로 진행된다고 하니, 30대 중반에 갑자기 확 늙어가는 자기 자신을 느끼며 질병과 죽음에 대한 일시적인 공포감에 사로잡히는 것은 누구나 경험할 수 있는 지극히 자연스러운 인간의 성장과정 가운데 하나인가 싶다.
나이가 든다는 건 서글프기만 한 줄 알았는데 그렇지만은 않다. 우선, 삶의 군더더기를 덜어낼 수 있다. 20대 중반 이후, 원래도 실속 없는 모임에는 거의 참여하지 않고, 정서적 교감 없이 형식적이거나 이용하려는 목적이 보이는 인간관계는 멀리했는데, 그때보다도 체력이 더 저하된 만큼 개인 시간에는 ‘나에게’ 진정으로 소중한 사람들과 주로 교류하고, 나머지 시간은 나 자신에게 집중하며, 나 자신과 소통하고 마음을 비우고 채우는 시간이 늘고 있다.
예전에는 목표를 정하면 빨리 달성하고 싶은 욕심이 앞서서 무리한 계획을 세워 스스로 다그치고 채찍질하고는 했는데(그때는 내가 무리하고 있는 줄도 몰랐다), 계획은 갈수록 무의미하다고 느낀다. 고갈된 체력이 넘치는 의욕을 따라잡지 못해 계획을 세워도 어차피 그대로 실행할 수 없다. 하루의 에너지를 소진한 순간, 좋아하는 일이든, 하고 싶은 일이든 일단은 전부 뒷전으로 미루고 이제는 휴식에 전념해야 일상을 유지할 수 있다. 굳은 의지와 강한 정신력으로는 나 자신을 더 이상 통제할 수 없다. 신체가 정신을 따르지 못하는 현실을 처음에는 받아들이지 못해 화가 났는데, 이제는 오히려 순간에 집중하고, 순간을 느끼는 힘이 더 커진 것 같다. 어떻게 살지, 무엇을 해서 살지 같은 인생의 밑그림은 계속 그리면서 수정해 가지만, ‘이번 일을 제대로 못 마치면 어떡하지?’처럼 불안한 미래에 대한 막연한 고민은 갈수록 덜 한다. 체력이 떨어지니 아직 오지 않은 내일에 대한 생각은 접어두고, 감사한 마음으로 진정한 오늘, 현재를 살아가는 것 같다.
대신, 여러 자기계발서나 에세이에서 한 목소리로 강조하는 ‘인생은 속도가 아니라 방향이 중요하다’라는 의미를 어렴풋이 실감하는 것 같다. 예전처럼 원한다고 과속을 할 수 없고, 곁길로 샜다가 금세 돌아오기도 어려운 한계 때문에 ‘내가 진심으로 무엇을 원하는지’, ‘나는 진정 어떻게 살기를 바라는지’ 마음의 목소리에 더 자주 귀 기울이며, 방향을 제대로 설정하고 있는지 때때로 점검을 한다. 속도를 낼 수 없게 되자 오히려 나만의 페이스가 더 중요해졌다. 원래도 인생은 겨루기나 경쟁이 아니지만, 타인과의 비교는 갈수록 무의미해 나 자신과 내 인생에 더욱 집중하고 있다.
나이가 들수록 노희경 작가가 드라마 <그들이 사는 세상>에 쓴 ‘아직 너무도 젊은 우리는 모든 게 다 별일이다, 젠장’이라는 대사가 귓전을 맴돈다. 누군가를 좋아하거나 싫어하는 것, 무엇인가를 좋아하거나 싫어하는 것, 어떤 일에 한껏 욕심부려서 대단한 업적을 남기거나 성취를 해내겠다는 것, 세상은 온통 문제투성이이고 불합리로 가득 차 보이는 것, 사람이나 사물, 세상의 마음에 들지 않는 부분을 내 마음대로 바꾸고 싶은 마음 – 별것이 다 별일인 이 모든 감정에는 엄청난 에너지가 든다. 산술적으로 계산할 순 없지만, 특히 타인을 좋아할 때보다 싫어할 때는 몇 백 배의 에너지를 소진하는 것 같다. 상대의 말 한마디에도 쉽게 상처받거나 내 감정을 인정받고 싶은 마음, 상대는 틀리고 내가 맞다고 따져 묻는 마음은 여전히 혈기 왕성하다는 증거일 지도 모른다.
나처럼 예민도가 높은 사람에게 나이가 들고 체력이 떨어져 가장 좋은 점은 기력이 쇠한(?) 만큼 민감도도 낮아져 인생의 난이도가 줄었다는 점이다. 한마디로 고집은 덜하고 성격은 유해졌다. 남들에게 별것 아닌 일조차 나에게는 다 별일이었는데, 이제는 ‘네 마음은 그렇구나’,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지’라며 어느 정도 타협점을 찾은 것도 같다. 이러한 변화는 아마도 나이 듦과 줄어든 체력처럼 세상에는 나 자신이 어찌할 수 없는 즉, 통제할 수 없이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야 하는 일도 무수히 존재한다는 사실을 깨닫는 과정이기 때문일 것이다. 특히, 가까운 사이에서 심지어 그 자신에게 명백히 손해일 선택을 하더라도, 그 시점에 누군가가 간절히 결핍을 채우고자 향하는 욕망이나 욕구를 막을 수는 없기에, 타인의 생각이나 행동을 변화시킬 수 없음을, 다시 말하면 내가 통제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님을 알게 되었다. 나는 이것이 외면이나 회피, 포기이거나 감정이 둔해졌다기보다 예전보다 융통성과 지혜가 늘었다고 믿고 있다.
지혜란 경험이 쌓여서 예측할 수 없는 여러 상황에 대처할 수 있는 유연한 선택지가 늘어난, 여유로운 태도라고 생각한다. 처음 경험하는 일이라도 겉으로 드러난 사물이나 사람, 사건에서 다른 측면과 본질을 이해해 문제를 자신만의 방법으로 정확하고 창의적으로 해결하는 것이라고도 생각한다. 나이 든다는 것이 나 자신과 타인, 세상에 이로운 뚜렷한 신념과 가치관을 고수하되, 유연하게 지혜롭고, 여유로운 마음씨의 동의어였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