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노 사회, 화병 사회, 정신이 병든 사회
지난해 5월 동생과 세계적인 소프라노 조수미 콘서트를 보러 갔다. 5월 초의 봄볕은 따스했고, 예술의 전당 콘서트홀 앞의 너른 잔디는 싱그러운 봄바람을 따라 산들거렸다. 콘서트홀 맞은편의 분위기 좋은 야외 레스토랑 모차르트는 행복한 표정의 사람들로 왁자지껄했다. 어떤 사람에게 1인당 10~20만 원에 달하는 티켓 값은 적당한 수준일 수 있지만, 나에게는 약간은 부담스러운 가격이다. 그럼에도, 이날 일 년에 한두 번은 내 경제력을 넘어서는 고급문화를 즐기자고 마음먹었다. 사람들이 분출하는, 어디에서도 느낄 수 없는 기분 좋은 에너지를 만끽했기 때문이다. 설마, 조수미 정도의 공연을 싫은데 억지로 관람하러 온 경우는 극히 드물 것이다. 대부분은 나처럼 손꼽아 기다린 일생일대의 공연이라 아마도 자신이 가진 가장 좋은 옷을 맵시 있게 차려입고, 설레고 들뜨는 기쁜 감정으로 공연장을 찾았을 것이다. 여기 모인 사람들도 저마다 가슴속에 묻고 사는 상처와 아픔이 없지 않겠지만, 이날만큼은 모두가 세상에서 가장 해맑고 행복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멋지게 차려입은 사람들의 행복한 순간, 그 순수한 기운을 함께 느끼는 기쁨을 때때로 누리고 싶어졌다.
며칠 전 정지우 감독의 영화 <해피 엔드>를 봤다. 1999년 개봉한 이 영화에서 주연 배우 최민식, 전도연, 주진모의 20~30대 젊은 시절 모습만큼 24년 전의 예전 서울 중산층의 모습을 엿볼 수 있었다. 극 중 서민기(최민식 扮)와 최보라(전도연 扮)는 태어난 지 얼마 안 된 딸이 하나 있는 젊은 부부이고, 최보라와 김일범(주진모 扮)은 대학시절 애인 사이로 현재는 내연 관계이다. 서민기와 최보라는 넓은 아파트에 살고 있으며, 자가용이 있다. 서민기는 최근 실직했지만 전직 은행원이었고, 최보라는 원어민 영어 학원의 성공한 원장이다. 보라는 백화점 쇼핑을 즐기고, 민기는 대형 마트에서 장을 본다.
아파트 거주나 자차 소유, 백화점이나 대형마트, 복합쇼핑몰에서의 쇼핑이 지금은 서울의 일상적인 생활양식이지만, 24년 전만 하더라도 일부 중산층 이상이 누릴 수 있는 경제적 성공의 기준이었을 것이다. 현재의 시각으로 보면 경제적으로 부유한 축에 속했을 보라가 거주하는 아파트는 그리 고급스럽지 않고, 그녀가 가는 고급 카페도 세련되지 않으며, 자동차도 너무 구형이다. 서울 시내의 건물은 낮아 보이고, 거리는 심지어 한산해 보인다. 2023년 지금의 보통 아파트, 보통 자동차, 보통 카페, 보통 쇼핑몰이 아마도 1999년 경제적 상층이 누리던 여러 물질적 요소를 훨씬 뛰어넘고도 남을 것이다. 감독의 의도와 전혀 다르게 예전 영화에서 현재 우리나라가 경제적으로 얼마나 발전하고 부유해졌는지 새삼 실감했다.
작년 공연의 뭉클한 행복감은 옅어지고, 밖에 1~2분만 서 있어도 모낭부터 발가락 끝까지 땀이 차는 게 느껴지는 무더위만큼이나 지독한 슬픔과 우울의 나날을 이어가고 있다. 최근 머릿속에서 지워지지 않고 이따금 떠올라 여전히 간혹 눈물짓는 이유는 새내기 초등학교 선생님이 자신이 가르치던 학급에서 자살을 한 사건 때문인데, 감히 깊이를 짐작할 순 없는 그녀의 무력감이나 외로움에 그 나이대 내 모습이 겹쳐 보여서인 것 같지만, 오늘 말하려는 주제는 아니다. 요즈음 무더위는 어쩌면 온실가스 때문이 아니라 사람들이 평생 분출하지 못하고 가슴속에 쌓은 분노감이 응축된 결과가 아닐까 싶은 마음마저 든다.
다른 사람들도 자신처럼 불행해지길 바라서 대낮에 번화가 한복판에서 버젓이 흉기를 휘둘렀다. 충격이 가시기도 전에 일상공간인 대형쇼핑몰에서 (범행 동기는 다르다고 파악하고 있지만) 비슷한 범죄가 일어나 더 많은 사람이 목숨을 잃거나 중상을 입었고, 일상의 불안감은 더욱 높아졌다.
유명 웹툰 작가가 자폐 아동인 자식을 정서적 학대를 했다며 학교 선생님을 고소한 사건도 며칠째 포털 메인 뉴스를 도배하고 있다. 이 사건의 현재 쟁점은 ‘교사가 아이에게 한 말이 정서적 학대에 해당하는가’이고, 내가 생각하는 본질은 ‘어른인 교사의 말이 (법적으로 정서적 학대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실제로 아이에게 상처가 되었는지’, ‘아이의 정서가 현재는 괜찮아졌는가’이며, 사건 당사자가 아닌 대중은 당시의 상황과 현재의 아이 상태를 제대로 알 수 없기에 실체적 진실에 접근할 수 없다. 그럼에도, 주된 반응은 웹툰 작가와 웹툰 작가의 아이를 강자, 선생님을 약자로 규정해 웹툰 작가를 지나치게 비난하고 있는데, 나는 여기에서 사람들의 ‘약자로서의 자신’이 평소 강자에게서 쌓인 저마다의 분노감과 억울함, 사회적 약자인 장애 아동을 향한 혐오를 이따금 마주했다.
최근 우리 사회는 너나 할 것 없이 분노가 목전까지 차오른 것 같다. 폭발 직전의 화를 어찌할 수 없어서 먹잇감을 기다리는 맹수처럼 ‘누구 하나 걸려라’하고 사납게 째진 눈을 하고 대기하고 있는 것만 같다. 물질적 풍요 속 상대적 박탈감을 더는 견디지 못할 때, 불특정 다수를 향한 무차별적인 폭력을 행사하거나, 나보다 강자나 약자라고 ‘믿는’ 만만한 사람을 직간접적으로 집요하게 물어뜯는 분풀이를 반복하고 있다. 분노 사회, 화병 사회, 정신이 병든 세상을 살아가고 있다.
분노로 가득 차 불안으로 점철된 사회는 결국, 누구도 믿을 수 없는 각자도생이 일상이 되고 만다. 서로 의심하고 불신하고 탓하고 낙인을 찍어야 살아남을 수 있는 서글픈 세상이다. 경제적으로 궁핍하지 않고, 개인이 누릴 수 있는 물질적 자원이 분명 과거보다 훨씬 늘었는데도 불구하고 다수가 불행하고 억울하다고 느끼는 비통한 세상이다. ‘기쁨은 나누면 배가 되고 슬픔은 나누면 반이 된다’는 속담이 있다. 그런데 누군가의 행복이 타인의 마음도 물들여 행복이 배가 되기보다, 가까운 이의 시기와 질투를 넘어서 낯선 이에게조차 혐오의 대상이 돼 생명의 위협마저 느끼는 괴이한 세상이다. 행복감을 함부로 내비치지 말고 감춰야 하는…… 무섭고 슬픈 세상을 지나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