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 친구 M과의 특별한 우정
“내가 많이 늦었지? 미안, 미안. 10분에 출발한다는 게 그새 약속 시간을 착각한 거야. 요새 내가 이렇다니까. 뇌의 일부를 어디에 두고 다니는 거 같아.”
“나는 또 하도 안 오길래 내일 오는 줄 알았지. 나만 너 만난다고 기대한 줄 알았다니까.”
다른 사람이었다면 약속에 늦은 무례함에도 ‘괜찮아. 그럴 수 있지. 왔으니까 됐어.’라며 짜증난 마음을 애써 감춘 가식적인 인사치레로 오히려 어색한 분위기를 견뎌야 했을 것이다. 몇 년 만에 재회한 대학 친구 M에게는 나도 모르게 에두른 표현이긴 해도 신경질난 심정을 툭 솔직하게 내비쳤다. 오랜만에 만났어도 솔직함을 무기로 서로 놀리고 삐치며 장난치는 우리 관계는 여전하구나 싶었다.
“진짜 미안해. 나도 너 만나기를 얼마나 기다렸는데. 어떻게 내 마음을 꺼내서 보일 수도 없고. 내가 널 얼마나 생각하고 보고 싶어 했는지 모를 거야. 일단, 식당부터 가자. 내가 생각해 둔 식당이 있지요.”
친구 M은 나를 몸보신시키겠다며 숙련된 운전 솜씨로 복잡한 서울 시내를 익숙하게 주행해 눈여겨본 식당으로 데리고 갔다. 이날의 만남이 나 혼자 고대한 짝사랑은 아니었구나 싶은 마음에 비로소 안도했다.
친구 M과는 고등학생 때부터 알던 사이였다. 우리는 같은 동네에서 서로 다른 고등학교를 다녔는데, 엄밀히 말하면 그때는 ‘아는데 모르는 사이’라는 표현이 더 정확하다. 개인적인 친분은 전혀 없지만 소문으로 이름과 명성을 접해본 관계, 우리 인연은 그렇게 시작됐다.
소문으로 들은 M은 나에게 일종의 동경의 대상이었다. M은 내가 갖지 못한 여러 재능을 발휘해 다양한 경험을 하고 있었다. 고등학생인데도 TV 청소년 토론 프로그램 진행을 맡는 등 이미 사회 활동을 활발히 하고 있었고, 학교에서는 전교 부회장에 방송반 멤버로도 활약하고 있었다. 학교 공부에만 충실한 우물 안 개구리이자 완전한 모범생인 나에 비하면 적극적이고 진취적인 M은 대단히 멋지고 화려해 보였다.
우리는 지금은 이름도 생각나지 않는 동네의 어느 학교 교실에서 처음 만났다. 지금은 학벌주의를 부추기는 차별 정책이라는 생각도 드는데, 시(市) 차원에서 각 학교에서 수시를 준비하는 상위권 성적 학생을 대상으로 약 2달가량 매주 무료 논술과 면접 특강 프로그램을 제공했다. 한편, 가정형편이 넉넉하지 않고 부모님이 대학 입시 정보에 어두워 모든 것을 혼자 찾아보고 결정해야 했던 나는 이 특강이 꽤 유익했으니 일종의 균등한 교육 기회를 보장하고자 한 실질적인 복지정책이었던 것도 같다.
그런데 이때도 엄밀히 말하면 M과는 만났다기보다는 스쳤다는 표현이 더 정확할 것 같다. 같은 교실에서 수업을 들었지만 같은 조는 아니었기에 처음으로 ‘아~ 저렇게 생긴 아이구나’ 서로 얼굴을 확인한 정도에 그쳤으니 말이다. 한편, 십 대 때부터 동경하고 부러워하던 친구 M은 이때 자신이 오히려 나에게 얼마나 충격을 받고, 질투와 위기감을 느꼈는지 20년 가까운 세월 동안 지겹지도 않은지 했던 얘기를 하고 또 하고 있다.
“그때 네가 앞에 나와서 모의 면접에서 얼마나 대답을 잘하던지 깜짝 놀랐다니까. 우리가 또 같은 대학교 같은 과를 지원하고 있었잖아. 수시 합격 인원은 가뜩이나 적은데 우리처럼 작은 지역에서 두 명이 다 뽑히긴 어려울 것 같았거든. 나는 연세대 신방과를 정말 가고 싶었는데…… 얼마나 위기감과 질투를 느꼈는지 모를 거야.”
“내가 그렇게 잘했다고? 그냥 평이했던 거 같은데…… 너야말로 외부활동도 많이 하고 워낙 유명해서 늘 대단하다고 생각했어. 그래서 너와 나를 아예 비교도 안 했던 거 같아. 나한테 연대 신방과는 너무 높은 학교이고, 최상의 결과여서 준비하는 동안 누구를 비교하고 질투하고 할 여력도 없었던 거 같아.”
“야, 그게 더 자존심 상해. 나한테는 그때 네가 얼마나 큰 경쟁 상대였는데, 나를 아예 신경조차 안 썼다니 너는 정말…… 무슨 운명의 장난인지 우리 수능도 같은 교실에서 봤잖아. 그때 나는 수능 망쳐서 끝나자마자 울고 있는데 너를 딱 봤더니 시험지를 모아서 세로로 책상에 탁탁 내리쳐 정리하면서 환하게 웃고 있는 거야. 표정이 어찌나 밝던지 내가 더 작아지더라.”
M의 말처럼 운명의 장난인 듯 우리의 관계는 끊어질 듯 끊어지지 않고 이어지더니 결국, 같은 학교 같은 과에 진학한 대학교 친구가 되었다. 마침내 십 대 시절 오랜 염탐과 썸의 과정을 지나 스무 살에 ‘진짜 친구’가 되었고, 성격 다른 우리는 또 끊어질 듯 끊어지지 않고 지금까지 질긴 인연을 이어오고 있다.
대학교 입학 전 2박 3일 오리엔테이션에서 몇 십 명의 과 친구들 가운데 또 무슨 운명처럼 같은 기숙사 방을 배정받아서 언제 경쟁자였냐는 듯 내내 숙식을 함께하며 붙어 다녔다. 대학교에서는 같이 수업 듣고 과제하고 술 마시고 엠티 가고 아카라카와 연고전에서 미친 듯이 응원하고, 가끔은 동네에서 편하게 깜짝 데이트도 했다. 두 명이서 같이 하는 공동 과제 때문에 공학원 벤처 사무실에서 날밤을 세서 꾀죄죄한 민낯을 공유했다. 볼살 때문에 별명이 다람쥐인 친구 M이 단풍과 은행으로 물든 백양로를 같이 걷다가 자신을 정말 다람쥐로 착각했는지 엉뚱하게도 도토리를 집어먹고 캑캑거려서 등을 두드려준 기가 막힌 일도 있었다. 일 때문에 잠시 미국에 머문 M이 외롭다며 전화를 걸어오기도 했고, 해외에서도 내 생일을 기억해 시차에 맞춰 축하 전화를 하기도 했다. 창업을 하느라 졸업이 늦은 M이 내가 먼저 졸업할 때 찾아와 활짝 웃으며 함께 찍은 기념사진은 아직도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다. 졸업 뒤에는 친구 M이 경영하는 스타트업에서 잠시 근무하면서 M의 새로운 면모를 알게 되기도 했다.
사실, 우리는 매일 만나거나 전화 통화를 하며 서로의 일상이나 연인 관계, 인간관계 등을 미주알고주알 털어놓고 공유하는 친구 관계였던 적은 없다. 그럼에도, 가치관이나 내면의 성장 속도가 비슷해서 만날 때마다 서로의 고민을 털어놓고 공감과 위로, 조언을 주고받을 수 있는 솔직하고 편안한 관계라서 지금까지 '가늘고 긴 깊은 관계'를 이어온 것 같다. 미숙하거나 잘 몰라서 실수를 할지언정 어떤 삶의 지혜나 가치를 깨달았다면 분명히 옳고 그름을 분간하고 더 나은 사람이 되려는 방향으로 나아가려는 좋은 성품은 변치 않을 것이라는 일종의 믿음을 형성하고 있는 것 같다.
사랑이란 자신의 세계를 사랑하는 사람에게 경험하게 해주는 거라면, M은 나에게 우정의 형태로 깊은 사랑을 느끼도록 해준 귀한 친구이기도 하다. 가장 일하고 싶었던 일산의 한 출판사로 이직했을 때 한달음에 일산까지 달려와 저녁을 사주며 아낌없는 축하를 보내주었다. 계속 어긋났던 불행한 결혼생활을 결국 이혼으로 종지부를 찍고 불안과 우울의 늪에서 헤맬 때는 ‘자신은 언제든 연락을 기다리고 있다’라는 M의 덤덤한 한마디는 큰 힘과 위로가 되었다. 그는 구체적인 상황을 묻거나 만나자고 재촉하지 않고 내가 먼저 연락할 때까지 믿고 기다려주었다. 상처에서 어느 정도 회복돼 한참 뒤 연락을 하자 기꺼이 나라는 존재를 여느 때처럼 환대했고, 이번에는 든든한 점심을 사줬으며, 그간의 나의 이야기를 귀 기울여 듣고는 ‘힘든 이야기를 자신에게 털어놔 줘서 고맙다’는 뭉클한 마음을 전했다. 친구 M은 스쿠버다이빙 전날 ‘물속에서는 코가 없다’라고 생각하라며 스노클링 장비로 수중 호흡법을 가르쳐준 사람이기도 하다. M의 코칭 덕분에 겁 많은 나는 다음날, 스킨스쿠버에 생각보다 잘 적응했고, 난생처음 진짜로 바다에 사는 신비로운 바다거북을 봤으며, 거대한 물고기 떼가 물기둥을 자아내는 평생 잊을 수 없는 경이로운 바닷속 세상을 알게 되었다.
“나는 네가 사준 자잘한 선물도 다 간직하고 있다고. 그만큼 너는 나에게 소중한 친구야. 너는 여전히 너 자신의 가치를 잘 모르는 것 같지만, 너와의 대화는 다른 사람과는 깊이 자체가 달라. 내가 손에 꼽는 슈퍼 스마트라니까.”
친구 M은 일찍이 나를 좋아하는 콩깍지가 눈에 단단히 쓰인 것 같지만, 좋은 사람인 M의 눈에 대단한 사람으로 보인다면 나 역시 멋지고 좋은 사람이 아닐까. 외향적이고 사업을 하느라 수많은 사람을 만나고 별의별 일을 겪은 친구 M의 말을 믿고서 나도 이제는 나의 소중한 가치를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수용하기로 했다.
“진주야, 뭐 하고 있어?”
“나…… 떡볶이 사 먹으려고”
“떡볶이가 좋아, 내가 좋아?”
(정적)
“너!”
“와…… 고민한다고? 대답까지 30초 걸렸어. 대충격”
“30초 아니야. 20초야.”
“이제 떡볶이 한동안 미워할 거야.”
“떡볶이는 죄가 없어. 너는 정말 내 삶의 활력소라니까.”
대학교 면접장 화장실에서 마주쳤을 때 흠칫 놀라며 처음으로 ‘안녕하세요?’ 어색한 인사를 주고받던 때가 생각난다. ‘저 아이가 합격하면 내가 떨어지는 건 아닐까’ 불편한 경쟁자였던 친구 M과 서로 장난치고 싶어서 안달난 친밀한 관계로 발전하리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 우리 두 사람은 성격도 참 다른데 변함없이 티격태격하는 애틋하고 유쾌한 할머니가 되어있을 모습이 그려지는 것 보면…… 아무리 생각해도 우리 우정은 불가사의다. 친구 M을 다음엔 뭐라고 놀릴지 상상만 해도 벌써부터 두근거리고 미소가 지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