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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학벌로 차별하고 무시할까?

성적은 상위권이지만 성품은 하위권인 이들의 속마음

by 스마일펄

일 때문에 알게 된 방송국 PD와 식사를 하고 건물을 나서다가 깜짝 놀라고 말았다.

“공부를 안 했으니까 저런 일이나 하고 있지.”

출입문에서 근무를 하고 있는 보안 직원을 두고 한 말이었다. 방송국과 언론사 정규직도 고학력자가 많은 대표적인 직종이고, 그 PD는 알고 보니 나와 동문이기도 했다. 일 때문에 연락을 끊을 수는 없지만 필요한 업무 외에 개인적으로 가까워질 사람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대학병원에서 근무하는 친구가 말하길, 외부에서 볼 때는 다 같은 대학 교수이고 고학력자에 사회적 지위가 높은 사람들이지만, 개중에는 20~30년 전 의대 성적을 아직도 들먹이며 다른 교수를 깎아내리는 이도 있다고 했다.

“그때는 성적이 안 돼서 저 과에 갔으면서 잘난 체하고 있네”라며.


알고 보니 그 방송국 PD는 일 밖에 모를 만큼 일에 매진하며 산 사람이었는데, 중요한 승진에서 미끄러진 모양이었다. 의대 성적을 아직도 들먹이는 대학 교수도 일이 거의 인생의 전부인 사람이었는데, 시대가 변해서 과거에 성적이 좋아야 지원할 수 있었던 현재 자신이 속한 과의 인기는 떨어진 반면, 과거에 낮은 성적으로도 합격할 수 있었던 과는 현재는 환자 수요가 늘어서 병원 내에서 승승장구하고 있는 듯했다.


이 둘은 학벌밖에 내세울 게 없다는 공통점이 있다. 엄밀하게는 인생에서 학벌(시험 점수)에 지나친 가치를 둬서 다른 소중한 가치를 외면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아마도 이들은 누구보다 열심히 일하며 살았을 것이다. 좋은 대학에 합격하기 위해 학창 시절 오로지 공부만 했던 것처럼 더 높은 자리에 오르고자 일만 바라보며 내달리고, 조직 내에서 분명 성과도 인정받았을 것이다. 그래서 승진에서 누락되거나 타 진료과가 잘 나가자 배가 아파 질투가 났을 것이다. 내 몫이라고 여긴 성취와 인정이 좌절되자 상처 입은 자존감을 학벌(시험 점수)을 내세워 만회하고자 했을 것이다.




지난 9월 연고전을 앞두고 온라인 커뮤니티에 지방 캠퍼스 소속 학생을 비하하고 차별하는 글이 올라왔다는 기사를 읽었다. ‘지방 캠퍼스(연세대 원주캠퍼스) 소속이면서 왜 우리(연세대 신촌캠퍼스)만 누려야 할 대학축제에 굳이 끼려고 하냐, 그런다고 너희가 우리처럼 정품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냐’ 같은 선 긋기와 우월감을 표출한 내용이었다. 지난 5월 고려대 응원제 입실렌티 준비 과정에서도 서울캠퍼스 총학생회장이 세종캠퍼스 재학생을 ‘학우’가 아닌 ‘입장객’으로 표현했다는 주장도 있었다. 심지어 같은 학교 내에서도 수능과 수시, 특별전형, 편입 등 입학 전형에 따라 우열을 구분하는 이들도 있다던데, 이들의 미래가 앞선 방송국 PD와 대학교수의 모습과 겹쳐 보였다.




좋은 학교를 다니고 좋은 직업을 얻은 사람 가운데 이처럼 특권의식을 내세워 쓸데없이 타인을 깎아내리며 차별을 당연시하는 사람은 소수일 것이라고 믿고 있다. 대부분은 그렇지 않으니까 이처럼 일부의 강력한 차별 발언이 회자되고, 가십거리 기사로 소모되고 있을 것이다. 물론, ‘나는 저들과 달라. 저들이 공부 안 하고 놀 때 나는 열심히 공부해서 이 자리까지 왔잖아. 저들이 차별받는 건 당연해’라며 속으로는 차별을 지지하는 사람이 많을 지도 모르지만, 대놓고 차별을 옹호하는 사람과 속으로만 생각하는 사람은 결코 같지 않다고 생각한다.


예전에는 이런 부류의 사람을 보면 ‘어떻게 타인에게 상처 주는 말을 저렇게 함부로 할 수 있지’라며 화가 났다. 그런데 세상 어디를 가든 굳이 자신과 타인을 비교해서 남을 깎아내려 자신을 높이고자 하는 사람은 존재한다. 방송국 PD, 대학교수, 명문대생처럼 남부럽지 않은 좋은 직업에 좋은 학벌을 가진 이들도 예외는 아니다. 이미 많은 것을 가진 이들 가운데도 그 소중한 가치를 모르고 가진 것을 빼앗길까 봐 오히려 전전긍긍 불안한 마음에 타인을 배척하는 방식으로 자기 자신을 지키고자 한다. 여전히 시험 성적과 타인의 인정이 세상의 전부이고, 사회적 지위는 높을지라도 식견이 좁은 사람이다. 이들은 물질적, 사회적으로는 풍요로울지 몰라도 마음이 가난한 사람이다. 마음이 가난해서 이미 획득한 물질적, 사회적 풍요조차 진정으로 누리지 못하고 있다. 이를 깨닫자 외부를 향해 바짝 날이 선 이들을 언젠가부터는 불쌍한 시선으로 바라보게 되었다. 뭐가 저렇게 자기 마음에 안 들고 불안하고 힘들어서 바짝 웅크린 채로 목에는 잔뜩 힘이 들어가 안간힘을 쓰고 있나 싶어 안타까울 때도 있다.


때로 내가 무시받는 상황에 처하면 기분이 좋지는 않지만 내가 문제가 아니라 무시를 한 사람의 마음이 복잡해서라는 것을 알기에 ‘해결되지 않은 마음의 문제가 있어서 찌질하게 화풀이를 하나 보다. 무엇인지는 모르지만 저 사람이 보기에 내가 뭐 자기보다 잘난 점이 있나 보다. 그래서 질투를 하나 보다.’라고 (속으로 또는 안 보는 데서) 한번 씩 웃고 대수롭지 않게 지나가고는 한다. 누군가가 무시하고 차별한다면 정작 우월감을 느껴야 할 사람은 무시하는 상대방이 아니라 무시받고 있는 내가 될 수도 있다.




학벌에 집착하고 맹신하는 사람은 학창시절 하고 싶은 거 안 하고, 놀고 싶은 거 안 놀고 ‘노력’한 결과로 좋은 학력자본을 획득했기에 그렇지 않은 사람과 다른 대우, 좀 더 특별한 대접을 받아야 한다는 우월감을 느끼고 싶은 욕구가 있는 것 같다. 이러한 특권의식의 밑바탕에는 학창 시절 자신을 억압하고 억제했다는, 인생을 희생을 했기에 일종의 합당한 보상을 받아야 한다는 잘못된 사고방식이 깔린 듯하다. 현대사회가 끝없는 경쟁을 부추기고 승자에게 화려한 조명을 비추는 방식으로 작동하고 있기에, 학창 시절 열심히 공부하기로 한 결정을 100% 개인의 선택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결론적으로는 그 경쟁에서 승리해서 최종 선택을 받지 않았는가. 좋은 학교에 다니고, 좋은 직업을 얻은 자체로 차별화된 좋은 대우를 누리며 살고 있는 셈인데, 굳이 먼저 나서서 선 긋고 차별까지 해야 하는지, 대체 무슨 의미가 있는지 나는 잘 모르겠다.


‘학력위계주의’를 정당화하는 근거로 수능처럼 객관적인 점수로 환산되는 노력을 들고 있는데, 인생에서 노력과 성과가 늘 비례하면 얼마나 좋을까. 운 좋게 노력이 성과와 비례할 때면 그 뿌듯함은 이루 말할 수 없지만, 아무리 노력해도 안 되는 일도 있고, 조금만 노력을 기울여도 잘 풀리는 일도 있으며, 절박하게 매달리며 노력을 집착적으로 쏟아부을수록 일이 어긋나는 경우는 부지기수이다. 자신만의 경직된 틀에 갇혀서 다양한 사람들과 교류하며 더 넓은 세상을 탐험할 기회를 잃는다면 이것이야 말로 시대의 흐름을 역행하는 게 아닐까. 우리나라에는 공부 좀 그만하고, 일도 좀 줄이고, 한마디로 일과 공부에 집착을 덜 하고, 제대로 쉬고 잘 놀아야 하는 사람이 사방에 널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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