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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마일펄 Mar 18. 2024

"엄마니까 괜찮아"라는 독이 되는 위로의 말

관계에 중독된 엄마(인에이블러)에게서 벗어난 구체적인 과정

*앞선 글: https://brunch.co.kr/@smilepearlll/293




엄마는 “엄마니까 괜찮아”라는 말을 자주 했는데, 이 말이 의지가 되거나 든든하기보다 늘 뭔가 애매하고 불편했다. 특히, 내가 큰 좌절이나 실패, 상실을 겪어서 너무 힘이 들 때 “엄마니까 괜찮아. 하고 싶은 말을 다 해도 돼”라며 약해진 마음을 기막히게 파고들었다. 마치 어렸을 때 친구끼리 비밀 얘기를 공유하며 돈독한 우정을 다지는 것처럼, 엄마는 내 속마음을 들여다보는 것으로 나와의 친밀감을 강화하는 것 같았다. 처음에 몇 번은 감정이 해소되는 것 같았지만, 엄마와의 대화를 거듭할수록 ‘내가 왜 이런 얘기까지 하고 있지?’ 싶었다. 부모-자식이라도 자기 혼자만 간직하는 감정과 생각이 있고, 자식이 성인이 되면 더욱 부모가 알지 못하는 자신만의 세계와 사생활이 있기 마련이다. 그런데 엄마와 대화의 물꼬를 한번 트자 어느 순간 이 경계는 희미해졌고, 정서적으로 엄마에게 기대는 마음은 자꾸 커졌다. “엄마니까 괜찮아. 무슨 이야기든지 다 털어놓아도 돼”라는 짐짓 나를 위하는 것 같은 말로 엄마는 내가 속마음을 더 드러내며 자신에게 더욱 의존하도록 부추겼다. 이 같은 의존적인 관계로 엄마 자신의 정서적 공허함을 메꾸려고 했다. 언제든 기꺼이 내 이야기를 들어주는 고마운 엄마의 존재는 실은 마치 마약과 같아서 불안한 마음을 일시적으로 진정하는 효과는 있었지만, 그뿐이었다. 엄마에게 정서적으로 의존할수록 오히려 문제의 근본 원인에 접근하지 못하고 방치하며, 문제 해결은 요원했고 나는 갈수록 무기력해졌다.


사랑한다면서 상대방을 자신에게 지나치게 의존하도록 해서 망치는 전형적인 인에이블러인 엄마를 벗어나는 데는 굳은 의지가 필요했다. 뒤에서 구체적으로 나올 일화인데, 엄마는 지금까지 믿었던 것과 달리 내가 힘들 때 궁극적인 힘이 돼 줄 수 있는 사람이 아니라고 깨닫는 충격과 배신을 느낀 계기가 있었다. 그런데 엄마와의 관계가 정말 마약 같았던 게 이혼 뒤 막상 견딜 수 없는 외로움이 엄습하자 익숙한 습관대로 엄마에게 전화하고 싶은 욕구가 솟구쳤다. 마치 관계에 중독된 것처럼 엄마에게 전화해서 내 마음을 털어놓지 않으면 안 될 것만 같은, 죄책감도 아니고 의무감도 아닌 희한한 감정에 몸과 마음이 붕 뜬 것처럼 느껴졌다. 사실 엄마에게 내 모든 감정을 말해야 하는 것도 아닌데 손이 자꾸 스마트폰으로 가고 정신은 어지럽고, 손바닥에서는 식은땀이 나는데 몸은 또 한기가 들어 덜덜 떨렸다. 이때 비로소 불행한 결혼생활을 꾸역꾸역 유지하며 정서적으로 너무 지쳤던 최근 몇 년 동안 내가 엄마에게 얼마나 의존했는지 깨달았다. 엄마와의 관계는 혼자 처리할 수 있는(처리해야 하는) 감정을 제대로 다루지 못하고 방치하도록 해 독립심을 저해하는 치명적인 독이었다.


엄마에게 정서적으로 의존하고 싶었던 즉, 전화를 해서 내 감정을 마구 털어놓고 싶었던 위기의 순간을 몇 번 버티자, 비슷한 감정이 들어도 더 이상 엄마에게 전화하고 싶다는 마음이 들지 않았다. 비로소 외로움이나 불안감, 우울감 같은 감정을 혼자서 어떻게 다뤄야 하는지 조금씩 터득할 수 있었다. 엄마를 향한 비정상적인 의존 욕구는 점차 사그라들고, 오히려 엄마에게 기댔을 때는 느낄 수 없었던 진정한 심리적 안정을 되찾을 수 있었다. 엄마는 일종의 감정 쓰레기통을 자처한 셈인데, 남들은 벗어나고 싶어 하는 역할에서 되려 정서적 결핍을 채우고 안정감을 느낀다는 것은 결코 건강한 심리 상태라고 할 수 없다. 엄마가 줄기차게 강조하던 “엄마니까 괜찮아” 이 말은 이제는 너무 두렵고 소름 끼치는 말이다.




한편, 나야말로 엄마의 의존성을 강화하고 조장한 또 다른 인에이블러는 아니었을까. 내가 엄마에게 심리적으로 의존할수록 엄마는 정서적 결핍을 채우는 관계였으니, 내 존재가 도리어 엄마가 알코올 의존증 아빠를 좀 더 견디게 하는 역할을 했던 것 같다. 어렸을 때 부모의 보호를 받으며 사는 건 당연하지만, 어쩌면 그 시기 별 다른 말썽 한 번 부리지 않은 착하고 성실하고 순응적인 우리 삼 남 매 덕분에 엄마는 그 불행한 시기를 버틴 건 아닌가 싶다. 그래서 엄마는 문제의 본질을 해결하기보다 방치하고 점점 무기력에 빠져든 건 아닌가 싶다.


힘든 시기에 맺은 인간관계는 더욱 애틋하고 존재감이 크지만, 달리 말하면 서로 의존할 만큼 고통스러운 일이 있어야만 성립하는 관계라는 의미이기도 하다. 즉, 불행에서 벗어나면 더 이상 가치를 발휘할 수 없는 관계인 셈이다. 이러한 인간관계는 일시적일 수는 있지만, 한 사람의 상황이 불행에서 행복으로 변한 만큼 다른 사람의 상황도 변하지 않으면 지속되기는 어렵다. 그런데 나는 어린 시절 불행한 환경에서 엄마와 형성한 건강하지 못한 의존적인 관계를 성인이 된 지금까지도 애써 끌어왔던 것 같다. 이제는 나 자신도 변하고, 주변 환경도 변했는데 가족 관계에서는 유독 고통스러웠던 과거에 머물렀던 것 같다. 인에이블러인 엄마가 변하지 않는 한, 엄마와 나는 최대한 떨어져야 지독한 의존성에서 벗어나 그나마 조금씩 독립성을 키우며 제대로 살아갈 수 있는 그런 관계였는데 말이다.



인에이블러(enabler)


인에이블링은 한국어로 ‘조장(助長)’이라고 해석하고, 인에이블링을 하는 사람을 인에이블러(enabler) 즉, 조장자라고 한다. 인에이블러는 사랑한다면서 되레 상대방을 자신에게 지나치게 의존하도록 망치는 사람이다. 겉보기에는 헌신하고 희생하는 착하고 좋은 사람 같지만, 도움이 필요 없는 사람에게 도움과 돌봄을 제공하며 상대방이 스스로 해내는 기쁨을 누릴 기회를 박탈하고, 독립심을 저해한다. 사랑한다면서 상대방을 자존감이 낮고 무책임하며 무기력한 사람으로 만들고 방치한다.


인에이블러는 헌신의 탈을 쓴 가스라이터와 비슷하지만, 가스라이팅과는 달리 ‘관계’에 집착한다. 자신의 이익을 위해 상대방을 교묘하게 조종해 착취하는 가스라이터와 달리 인에이블러는 오히려 상대방을 위한 헌신적이고 선한 마음이 가득하다.


인에이블러는 내면 깊숙이 버려지는 것에 두려움이 자리 잡고 있다. ‘상대방이 나를 떠나면 어떡하지’라는 불안감 때문에 과도하게 상대방의 비위를 맞추려고 한다. 그런데 정작 상대방이 요청하지 않은 도움을 제공해 난감하거나 눈치가 없다는 인상을 받기도 하는데, 본인은 아랑곳없이 ‘나는 괜찮고 쓸모있는 사람이야’라며 일방적으로 베푸는 행위에서 자신의 존재 가치를 느끼고, 사람들에게 ‘좋은 사람’, ‘착한 사람’이라는 평판을 얻으려고 한다.


착하고 잘해주는데 유독 불편한 사람이 있지 않은가. 하지 않아도 되는 행동을 하거나 선행을 베풀어서 상대방에게 부담감을 주고 죄책감을 심는 것은 인에이블러의 가장 대표적인 특징이다. 남에게 잘해주고 욕먹는 사람이나, 착한데 주변에 괜찮은 친구가 없는 사람은 인에이블러일 확률이 높으니 거리를 두고 지켜볼 필요가 있다.


인에이블러는 알코올 중독자가 있거나 도박중독, 가정폭력 등 문제가 있는 가정에서 대를 이어 만들어질 가능성이 높다. 가족 내에 심각한 문제가 있는데도 불구하고 역기능적으로나마 가정을 유지하려면, 가족 구성원 가운데 절대적으로 헌신할 누군가가 필요하다. 사회에서 기대하는 성역할 때문에 사회 통념상 아무래도 가장 유력한 인에이블러 후보는 ‘어머니’이다. 만일, 가족을 돌보지 않는 데 많은 죄책감을 느낀다면, 내가 바로 인에이블러일 수도 있다.



심리에세이 <부모님과 헤어지는 중입니다>에서 발췌한 내용입니다.

책을 구매하시면 더욱 풍성한 이야기를 읽으실 수 있습니다.


이 책의 부제는 '알코올 중독 아버지와 가스라이팅 어머니로부터의 해방일지'입니다. 

억압하고 지배적이며 자기중심적인 부모에게서 정서적으로 독립한 과정을 그린 개인적인 경험담입니다.

부모에게 제대로 사랑을 받지 못했는데도 불구하고, 온전한 사랑을 제대로 주고받는다는 의미와 진정한 행복이란 무엇인지 깨달은 과정을 쓴 책으로, 착취하는 관계에서 나 자신을 보호하는 법도 담고 있습니다.


좀 더 자세한 책 소개는 각 온라인서점을 확인해주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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