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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마일펄 Jun 15. 2023

착하고 잘해주는데 유독 불편한 사람

헌신하고 좋은 사람 같지만, 독립심을 저해하는 '인에이블링'의 무서움

엄마니까 괜찮아”라는 인에이블링의 무서움


엄마의 말과 행동은 억울하거나 불편한 감정이 들면 자신의 입장과 상황을 자식에게 투사해 ‘자식 탓’을 하며 감정과 책임을 전가하고 죄책감을 불러일으켜 통제하려는 가스라이팅에 해당하는 면도 있지만, 엄밀하게는 ‘인에이블링(enabling)’에 더 가깝다.


인에이블링은 한국어로 ‘조장(助長)’이라고 해석하고, 인에이블링을 하는 사람을 인에이블러(enabler) 즉, 조장자라고 한다. 인에이블러는 사랑한다면서 되레 상대방을 자신에게 지나치게 의존하도록 망치는 사람이다. 겉보기에는 헌신하고 희생하는 착하고 좋은 사람 같지만, 도움이 필요 없는 사람에게 도움과 돌봄을 제공하며 상대방이 스스로 해내는 기쁨을 누릴 기회를 박탈하고, 독립심을 저해한다. 사랑한다면서 상대방을 자존감이 낮고 무책임하며 무기력한 사람으로 만들고 방치한다.




지금까지 쓴 글 가운데 엄마의 인에이블링을 묘사한 주요 표현들을 모으면 다음과 같다.


- 엄마는 선량하고 좋은 사람이다. 성격은 유순하고 말수는 적고 타인에게 잘 맞추는 편이라서 어지간한 사람이라면 좋아하지 않을 수 없다.


- 엄마는 누군가에게 진심으로 관심이 있거나 좋아해서가 아니라 자기만족을 위해서 애정을 ‘베풀고’, 정신적으로 ‘지배할’ 대상을 끊임없이 갈구하고 있었다. 엄마에게 애정할 대상이란, 일종의 도구나 마찬가지라 그 대상이 어떤 사람인지는 크게 중요하지 않을 것이다. 엄마에게 사랑이란 주고받는 것이 아니라 불쌍하고 안쓰러운 대상에게 시혜적으로 베푸는 것에 가깝다.


- 엄마의 진심은 자식들이 영원히 자신에게 의존하는 어린아이 같은 존재로 남아있기를 바랐다. 성인이 된 자식에게 어린아이에게 하듯이 강한 애착을 나타내는 엄마는 자식들의 독립을 지연시키고 무기력감을 불러일으켰다. 그런데 엄마는 이것이 엄마로서의 역할이자 의무이고 사랑이라고 굳게 믿었다.


- 자신과 자식을 분리하지 못하고, ‘엄마’와 ‘사랑’, ‘희생’과 ‘헌신’이라는 미명으로 자기 인생은 내팽개치고 평생 온 신경이 자식들의 일거수일투족에 가 있으니, 자식들이 제대로 독립하지 못하고 다 커서도 ‘나는 엄마 인생의 전부야. 엄마는 나 없으면 못 살아’라고 생각할 수밖에. 엄마는 자식에게 끝없는 부담감과 죄책감을 심어서 정상적인 자립심을 짓밟고 정신을 좀먹어 서서히 병들게 하는 무서운 사람이다.




인에이블러는 헌신의 탈을 쓴 가스라이터와 비슷하지만, 가스라이팅과는 달리 ‘관계’에 집착한다. 자신의 이익을 위해 상대방을 교묘하게 조종해 착취하는 가스라이터와 달리 인에이블러는 오히려 상대방을 위한 헌신적이고 선한 마음이 가득하다. 그래서 엄마의 인에이블링을 눈치채거나 파악하기도 어려웠고, 엄마의 선한 의도를 거부하는 죄책감이 필연적으로 따라서 쉽게 빠져나올 수도 없었다.


인에이블러는 내면 깊숙이 버려지는 것에 두려움이 자리 잡고 있다. ‘상대방이 나를 떠나면 어떡하지’라는 불안감 때문에 과도하게 상대방의 비위를 맞추려고 한다. 그런데 정작 상대방이 요청하지 않은 도움을 제공해 난감하거나 눈치가 없다는 인상을 받기도 하는데, 본인은 아랑곳없이 ‘나는 괜찮고 쓸모있는 사람이야’라며 일방적으로 베푸는 행위에서 자신의 존재 가치를 느끼고, 사람들에게 ‘좋은 사람’, ‘착한 사람’이라는 평판을 얻으려고 한다.




착하고 잘해주는데 유독 불편한 사람이 있지 않은가. 엄마가 바로 전형적인 그런 사람이다. 하지 않아도 되는 행동을 하거나 선행을 베풀어서 상대방에게 부담감을 주고 죄책감을 심는 것은 인에이블러의 가장 대표적인 특징이다. 남에게 잘해주고 욕먹는 사람이나, 착한데 주변에 괜찮은 친구가 없는 사람은 인에이블러일 확률이 높으니 거리를 두고 지켜볼 필요가 있다.


인에이블러는 우리 가족처럼 알코올 중독자가 있거나 도박중독, 가정폭력 등 문제가 있는 가정에서 대를 이어 만들어질 가능성이 높다. 가족 내에 심각한 문제가 있는데도 불구하고 역기능적으로나마 가정을 유지하려면, 가족 구성원 가운데 절대적으로 헌신할 누군가가 필요하다. 사회에서 기대하는 성역할 때문에 사회 통념상 아무래도 가장 유력한 인에이블러 후보는 ‘어머니’이다. 만일, 가족을 돌보지 않는 데 많은 죄책감을 느낀다면, 내가 바로 인에이블러일 수도 있다.




“아버지가 힘들게 일을 하시고, 그 스트레스를 해소하는 유일한 방법이자 낙은 술이다. 아버지는 자신이 힘들게 일하는 만큼 즉, 가족을 위해서 희생하는 만큼 자신이 주정하는 모습을 가족들이 이해해야 한다고 믿는다. 엄마는 어쩔 도리가 없고(엄마도 아빠를 바꿀 수는 없고), 그러니 우리가 아버지를 이해해야 한다.”


도저히 납득할 수 없었던 엄마의 이 말은 언뜻 알코올 중독 아버지를 이해하고 위하는 것 같다. 하지만 다른 각도에서 보면 알코올중독 행위를 방치하는 것을 넘어서 조장하고 지지하고 있다. 거칠게 표현하면 (물론, 어린 자식들을 고려한 점이 가장 컸겠지만) 남편을 계속 술독에 빠져 살게 하고, 그 덕분에 일을 하고 돈을 벌도록 해서 엄마는 자신의 생계를 해결했다고 할 수 있다. 자신이 직접 돈을 버는 고생을 하는 것보다 남편의 술주정을 견디는 편이 자신의 생존을 위해서 낫다고 판단했기 때문에 남편의 알코올 중독을 계속 방치하고 조장했다고 할 수 있다.


알코올 의존증 아빠와 결혼해서 한평생 고생한 엄마가 안쓰럽고 안 돼 보였는데, 어쩌면 엄마는 어른이라서 아빠의 술주정이 어린 자식들보다 여러 면에서 견딜 만했구나 싶다. 같은 공포 상황을 아이들은 어른보다 훨씬 크고 위협적으로 느끼니까. 게다가 우리 삼 남매는 아버지의 술주정에 그대로 노출돼 방치됐지만, 엄마는 그때마다 방문 닫고 들어가서 드러누우면 그만이었다. 두려웠고 상처받은 우리 삼 남매의 마음은 아무도 보살펴주지 않았지만, 다음날 아빠는 엄마에게 사과하며 화가 난 엄마의 마음을 헤아리려고 무진장 노력했다. 아빠가 알코올 중독자라는 사실은 변함없지만, 같은 상황에서 엄마와 나는 전혀 다른 경험을 했다. 이것이 아빠를 바라보는 엄마와 나의 좁힐 수 없는 입장 차이인가 싶다.


생각이 여기에 미치자 더 이상 엄마가 안쓰럽거나 불쌍하다는 마음이 들지 않는다. 엄마는 그저 자신의 생존 본능에 충실해 이에 가장 유리하고 손쉬울 것 같은 선택을 한 이기적 유전자를 보유한 사람이고, 자녀를 안전하게 보호하고 자립심을 기르도록 동기 부여하는 부모 본연의 역할은 제대로 하지 못한 부모 자격 미달인 사람이라는 생각밖에 들지 않는다.


*다음 글: https://brunch.co.kr/@smilepearlll/370



이번에 <부모님과 헤어지는 중입니다> 책을 만들면서 추가로 새롭게 작성한 원고입니다.

책 출간 전에 브런치에 원고 일부를 먼저 공개합니다. ^^


'인에이블링'은 매우 쓰고 싶었던 주제인데 설명하기가 약간 난해해서 어떻게 풀어야할지 몰라서 마음속 과제로 남겨둔 채 미루고있다가 거의 책 작업 마지막에 완성할 수 있었습니다.

책에서는 좀 더 구체적인 사례와 그래서 제가 어떻게 엄마의 인에이블링을 눈치채고 벗어났는지 과정에 대한 이야기도 만나실 수 있습니다.


♠ 종이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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