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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마일펄 Jun 15. 2023

"나 좀 내버려둬. 이제는 제발 좀 행복해지고 싶어"

술주정은 결코 사랑이 아니다

아버지가 알코올 중독이라고 자각하지 못한 이유(2)


“엄마, 정신 차려. 아빠는 알코올 중독이야. 모르겠어?”

“……”

“이렇게까지 말하고 싶지는 않지만 나에게 아빠는 가정폭력범이나 다름없다고. 내가 꼭 이렇게 강하고 거칠게 말해야지만 이해하겠어, 어? 술을 좋아하고 많이 마시고 술 없으면 못 살고 술을 끊지 못하는 것, 이게 알코올 중독이지 뭐야. 언제까지 자식더러 알코올 중독자와 사이좋게 지내라고 집착하고 매달릴 거야? 그게 가능한 일이기나 해?”

“맞아, 그러고 보니 엄마도 처음에 결혼했을 때 너무 충격적이었는데…. 다 잊고 있었던 것 같아. 미안해, 엄마가 정말 부모 자격이 없다.”

“어, 맞아. 엄마 부모 자격 없어. 그러니까 제발 나 좀 그냥 내버려둬. 이제는 나도 제발 좀 행복해지고 싶어.”


앙칼진 대화로 엄마와의 통화를 종료했다. 내 심정을 더도 말고 덜도 말고 있는 그대로 솔직하게 내지르자 속이 다 후련했다.




너무 사랑해서 때리고 상처 준다는 말은 옳지 않다. 누군가를 정말로 사랑한다면 뭔가 하나라도 더 잘해주고 싶고, 함께 소중한 시간을 보내고 싶지, 어떻게 폭력을 휘두르겠는가. 보호하고 아껴주고 싶지, 가슴이 미어져서 어떻게 감히 고통을 주고 상처를 입히겠는가. 세상에 단점 없는 사람이 없고, 모든 인간은 불완전하지만, 애정 관계에서 일어나는 폭력은 어떤 말로도 정당화될 수 없다. 폭력은 그저 폭력일 뿐이다.


같은 맥락에서 아버지는 과연 자신이 믿는 것처럼 자식과 아내를 진정 사랑했을까. 너무 사랑해서 자신이 술 취해 행패를 부리는 모습을 나머지 가족들이 이해해야 한다고 강요한 것일까. 백번 양보해서 아무리 아버지를 이해하고 싶어도 40대 어른이 만취해 10대 아이에게 어떻게 고성을 지르고 위협적인 공포 분위기를 조성했는지 내 상식으로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고, 앞으로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지 않다. 술 취해 가족 앞에서 난동을 부리는 것, 이건 결코 사랑도 뭣도 아니다. 어떤 이유로도 정당화할 수 없는 폭력이고, 뉘우치고 사죄해야 할 잘못이다.




아버지는 지금도 술을 마시지 않는 날이 거의 없다. 매 식사에서 반주는 기본이며, 친구들과 약속에서도 술은 거의 빠지지 않는다. 조금이라도 술기운이 올라오면 눈을 게슴츠레하게 뜨고 기분은 고조돼 몇 시간이고 자기 할 말만 끝없이 늘어놓는다. 누가 봐도 주량이 세고 과음이 잦은 알코올 의존증이다. 그런데 이를 자각하지 못한 가장 단순한 이유는 횡설수설하고 제정신이 아닌 아버지의 모습이 익숙했기 때문이다. 알코올 의존증이 왜 알코올 의존증이겠는가. 술을 마시지 않고는 견디지 못하기 때문에 굳이 알코올 의존증이라는 정신의학적인 병명을 붙인 것이다.


충격적이게도 술 취한 아버지만을 평생 보아왔기 때문에 술에 취하지 않은 아버지의 모습은 잘 떠오르지 않는다. 그러고 보면 아버지가 정신이 멀쩡한 날이면 ‘오늘은 무슨 일이래? 해가 서쪽에서 뜨려나?’ 생각했다. 폭력에도 자주 노출되면 시나브로 젖어 들듯이, 주정꾼 아버지가 당연해서 어느새 주정꾼을 주정꾼이라고 인식하지 못하는 단계에 이르렀다.


아버지는 젊은 시절처럼 인사불성이 돼 가족에게 고함을 치는 난폭한 행동은 거의 하지 않고, 주량도 예전보다는 줄어들었다. 아버지의 극단적 상태를 기준으로 현재의 상태가 ‘많이 나아졌다’, ‘좋아졌다’, ‘이만하면 사람 됐다’라는 인지 왜곡이 일어나서 현재의 상태에 만족하고 한동안 방치했었다. 그러나 아버지가 과거보다 나아졌다고 현재 상태가 과연 괜찮은 것일까. 이제는 알코올 의존증에서 벗어났다고 할 수 있을까. 건강검진에서 금주를 하라는 의사의 권고를 무시하고 그래도 한잔은 괜찮다며 어김없이 막걸리를 꺼내 드는 사람인데?




한때는 아버지의 사과가 부녀관계 회복의 출발점이라고 생각했다. 상담 선생님은 아버지처럼 피해의식과 자격지심이 크고, 자신이 희생했다는 믿음이 강하며, 불행한 사고를 겪어 세상에 원망이 가득한 사람은 결코 사과하기 쉽지 않으리라고 말씀하셨다. 나도 두말없이 그 말씀에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는 더 이상 아버지의 사과를 기대하지 않는다. 화해하고 싶은 마음도 없다. 부디, 미숙하고 부족한 아버지를 마음으로 용서하고, 헝클어진 내 마음에 정갈한 평온이 찾아오기만을 바랄 뿐이다.



심리에세이 <부모님과 헤어지는 중입니다> 중 '아버지가 알코올 중독이라고 자각하지 못한 이유(2)'에서 발췌한 내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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