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스마일펄 Jun 16. 2023

부모와 관계를 끊는 심리 과정

'늪지에서 빠져나온 생존자'라는 자부심

부모와 관계를 끊는 심리 과정


아버지를 마주하면 여전히 어떤 폭력적인 말과 행동을 할지 몰라서 두렵다. 예전처럼 몸을 아예 가누지 못할 만큼 고주망태가 되지 않는다고는 알지만, 그와의 식사 자리에서 식탁에 놓인 작은 소주잔이 눈에 들어올 때면 숨이 턱 막히고 심장 박동은 빨라진다. 이렇게 글을 쓰면서 그 장면을 떠올리기만 해도 땀이 차올라 손끝이 끈적끈적해진다. 삼십 대 중반이 되었는데도 아직 어린 시절의 트라우마에서 벗어나지 못했고, 과연 치유를 완전히 할 수 있을지도 의문이다.




이제 더는 아버지가 자초하는 불미스러운 상황을 감수하고 싶지 않다. 만취해서 눈은 퀭하고 혀는 꼬여서 상대방의 말은 전혀 듣지 않고, 표정도 살피지 않는다. 두 시간이고 세 시간이고 맥락 없고 재미도 없는 말을 끝도 없이 늘어놓는다. 알코올 중독자의 술주정을 더는 한마디도 듣고 싶지 않다. 욱하는 마음을 더는 참지 못해서 싫은 내색을 비치면, 엄마가 중간에서 내 눈치를 보며 안절부절못하는 것도 싫다.


인내심의 한계치에 도달해 결국 갈등을 빚으면 엄마는 “아버지에게 무슨 말버릇이냐”라며 나를 나무란다. 세월이 흘렀지만, 아무것도 변하지 않았다. 엄마는 자신을 위하는 선량한 딸이 아니라 여전히 술주정뱅이 남편이 우선이라 그를 편든다. 엄마는 정신이 온전치 않은 술망나니 남편은 불쌍하고 안쓰럽고, 딸은 무슨 말을 하든 남편의 의사에 반하면 감히 부모의 권위에 도전하는 예의 없는 것이 된다.


아버지와 잘 지내기를 바라는 엄마의 바람에 부응하고자 노력하지만, 마지막에는 늘 나만 불효막심한 나쁜 자식이 되고 만다. 이 드라마의 각본은 주연 인물의 성격과 상황 설정상 자웅동체처럼 한편인 부모 입장에서 당돌한 자식은 악한으로 결말을 맺도록 흘러갈 수밖에 없다. 그런데 순진한 나는 주연 인물의 성격이 이번에는 달라질 거라고, 조금은 다른 결말이 펼쳐질 거라는 일말의 기대감을 놓지 못하고 있었다.


엄마가 나에게 볼멘소리를 하며 나무라는 순간, 기억 저편으로 미뤄두고 평생 봉인하고 싶은 깊은 트라우마가 의식으로 떠오른다. 나는 다시 고통의 바다에 빠져서 허우적거리고 뭍으로 빠져나오려고 홀로 발버둥 치기를 반복한다. 어리석게도 가족을 믿었던 만큼 다시 또 가족에게 버려졌으며, 세상에 믿을 사람은 하나도 없고 혼자 덩그러니 남겨졌다는 서글픔과 분노감, 억울함이 치밀어 몸이 부들부들 떨린다.




나에게 하나도 득이 될 것 없는 이 반복되는 악순환의 구조를 깨닫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다. 술 취한 사람은 누구든지 간에 피하는 게 상책인데, 괜히 만취자와 매번 부딪혀서 쓸데없는 마음의 상처와 정신적인 스트레스를 입고 있었다. 알코올 중독자 아버지와 자식이 잘 지내기를 바라는 엄마의 실현 불가능한 바람을 이뤄주고자 부단히 애쓰며 소중한 인생을 낭비하고 있었다. 이 세상에는 즐겁고 행복하고 가치 있는 일과 사람이 얼마나 많은데! 이제 더는 소중한 시간과 에너지를 잠재적인 폭력 상황을 견디는 데 함부로 버리고 싶지 않다.


부모가 자식을 자주 보고 싶고 곁에 두고 싶어 하는 마음을 알기에 자주 찾아 뵙지 못하는 죄책감을 갖고 있었다. 부모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자식 된 도리를 하고자 했었다. 그러나 자식을 만난 기쁨에 더 행복하고자 반드시 술을 마셔야 하는 아버지, 어렸을 때 아버지가 자행한 정서적 학대 때문에 아버지 앞에 놓인 작은 소주잔만 봐도 고통스러운 자식, 이제 이 고통에서 벗어나려고 한다. 마땅히 해야 한다는 사회적 의무감이나 도리에 더는 사로잡히지 않으려고 한다.


몇 달 전만 하더라도 최소한 아버지가 내가 집에 가서 점심 한 끼나 저녁까지 두 끼를 먹고, 몇 시간 머무는 동안만이라도 금주하시기를 바랐다. 그러나 더는 헛된 희망에 기대지 않으려고 한다. 평범한 사람에게 술 취하지 않은 상태로 3~4시간 생활하는 건 아무 일도 아니지만, 알코올 중독자에게 몸에 술 성분이 남아있지 않은 상태로 3~4시간을 버티는 건 견딜 수 없는 고역이다. 해가 서쪽에서 뜨고 죽은 사람이 살아 돌아오기를 기대하는 것만큼 불가능한 일이다.


아버지가 변할 가능성은 희박하니 비상식적인 상황과 불편한 감정에서 벗어나서 아버지와 잘 지내려는 노력을 안 하는 방향으로 이제는 내가 변하려고 한다. 술을 끊을 수 없는 아버지의 한계를 인정하고, 엄마와는 달리 그런 그를 수용할 수 없는 나의 한계를 인정하고, 이제는 내 마음속에서 아버지를 놓아드리려고 한다. 그가 술을 끊지 않는 한 아버지와 나는 만나지 않는 편이 낫다. 그것이 우리의 관계 설정의 최선이다.




모든 가족이 따뜻하고 애틋하지는 않다. 오히려 만나서 불행한 가족도 흔하다. 만나지 않는 편이 나은 가족 아닌 가족들이다. 우리 사회는 가족애를 유난히 강조한다. 혈연에 기반한 가족에게 집착하는 경향도 짙다. 그러나 가족이라도 인연이 다 했으면 자연스레 흘러가도록 놓아주어야 한다. 주위를 둘러보면 절연하고 사는 부모-자식, 남보다 못한 가족이 생각보다 수두룩하다. 그러니 가족이라도 마음 가는 대로 관계를 정리한다고 괜한 죄책감을 갖지 않아도 된다.


물론, 가족이라는 관계는 유일무이하고 특별한 인간관계이다. 그러나 유일무이하다고 모두 자신에게 가치 있거나 어울리지는 않는다. 세상에 한 벌만 존재하는 아무리 값비싸고 특별한 옷이라도 내 몸에 맞지 않거나 어울리지 않으면 결국 내 몫은 아니다. 하물며 과거에 정서적 학대와 방임을 일삼은 부모, 심지어 현재에도 같은 상황을 반복하고 있다면 더 이상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이러한 부모 또는 가족과 거리를 두고 내 몫의 인생을 살아가려는 마음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감정이자 합당한 선택이다.




최근에 ‘애착외상’을 주제로 한 트라우마 특강을 들었다. 외상이나 트라우마라고 하면 충격적인 사건이나 사고, 신체적 학대, 왕따, 성폭력처럼 극단적인 상황에서 유발된다는 생각과 달리, 부모의 정서적 학대 또는 방임에서 비롯한 애착외상도 심각한 트라우마로 분류하고 있었다. 가정에서의 신체적 학대, 성적 학대, 언어폭력, 각종 정서적 학대와 방임이 아이의 정상적인 성장을 저해하는 것은 물론이고, 내가 겪은 ‘심리적 부재’는 가장 미묘하면서도 심각한 형태의 학대였다고 알게 되었다. 이처럼 폭력과 학대가 만연한 가정에서도 친구, 선생님, 이웃, 조부모, 성직자 등과 좋은 관계를 경험하면 상대적으로 안정된 애착을 형성할 수 있는데, 강사님은 이것이 기적에 가깝다고 몇 번이나 반복해서 강조했다. ‘아… 나는 깊이를 알 수 없는 구렁텅이에서 살아남은 생존자구나. 지금 나는 기적을 이루고 있구나’ 싶은 자부심이 들었다.



심리에세이 <부모님과 헤어지는 중입니다> 중 '부모와 관계를 끊는 심리 과정'에서 발췌한 내용입니다. 

<부모님과 헤어지는 중입니다>를 구매하시면 더욱 풍성한 이야기를 읽으실 수 있습니다.


<부모님과 헤어지는 중입니다> 온라인서점에서 판매하고 있습니다.

교보문고 온라인, 예스24, 알라딘, 인터파크도서에서 예약 구매하실 수 있습니다.

책은 6월 22일(목) 발송 예정으로 예정일 이후 1~2일 이내 수령하실 수 있습니다.


좀 더 자세한 책 소개는 각 온라인서점을 확인해주세요. ^^



이전 07화 부모가 가해자일 때 자식이 벗어나지 못하는 슬픈 이유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