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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마일펄 Jun 16. 2023

부모가 가해자일 때 자식이 벗어나지 못하는 슬픈 이유

폭력 부모에게 (피해자) 자식이 갖는 양가적인 감정과 강력한 트라우마

아버지가 알코올 중독이라고 자각하지 못한 이유(1)


악감정을 묻어두고 아빠를 그럭저럭 대하기까지 십여 년은 걸린 것 같다. 그의 잘못된 행동을 용서하거나 우리 부녀가 화해한 것은 아니다. 손찌검하거나 물건을 부수지 않고, 가족에게 고함을 치는 정도에 그쳐서 고맙다는 생각이 드는 사람을 어떻게 쉽게 용서할 수 있을까. 나를 건강하게 잘 키워줘서 고맙다는 마음과 아버지의 존재 자체가 거북한 양가적인 감정, 시리도록 채워지지 않는 외로움과 묵직한 부채 의식을 동시에 남겨준 사람. ‘용서란 미움에게 방 한 칸만 내주면 되는 거라지만….’ 나쁜 기억이 얼마나 깊게 각인되었는지 몸이 먼저 거부하는 걸 난들 어떡해. 이런 사람을 대체 어떻게 용서하고 사랑할 수 있을까.




언젠가 아버지를 향한 양가적인 감정을 일기로 남긴 기록이다. 나는 아버지의 그릇된 난폭한 언행과 괴롭힘, 마음속 응어리와 깊게 파인 상처, 악몽 같은 기억을 오롯이 간직하고 있었다. 그런데 왜 최근까지도 아버지가 알코올 의존증이며 폭력적인 성향이 있다고 제대로 인정하지 못했을까. 왜 아버지를 용서하거나 화해하지 못하고, 사랑하지 못한다며 줄곧 자책했을까. 왜 계속 어긋난 관계를 봉합해서 좋은 관계를 형성해야 한다는 집착을 버리지 못했을까. 애증의 감정에서 오는 혼란스러움 때문이었을까. 그것은 아마도 아버지를 오랫동안 사랑했기 때문일 것이다.


나는 순수한 아이의 마음으로 우리 아버지는 좋은 사람이고 멋진 사람이라고 끝끝내 믿고 싶었던 것 같다. 아버지가 나를 진정으로 사랑하지 않고 폭력적인 상황에 내몰았으며, 그렇게 내가 버려졌다는 도저히 받아들이기 어려운 사실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던 것 같다. 그럼에도 나를 낳고 키워준 아버지니까, 아버지를 마음 놓고 싫어하거나 미워할 수 없어서 그가 내보인 최악의 모습을 어떤 식으로든 부정하고 싶었던 것 같다. 내 무의식의 세계는 쓰레기 같은 아버지를 둔, 남 부끄러운 사람이 돼 사람들에게 약점을 잡힐까 봐 두려웠던 것 같다. 그래서 아버지의 존재를 있는 그대로 인정하기를 한사코 거부하고 끊임없이 왜곡하며 긍정적인 환상을 부풀렸던 것 같다. 언젠가는 아버지가 내가 바라는 아버지상에 근접하는 날이 찾아올 것이라는 일말의 기대감과 희망을 놓지 않았던 것 같다.


망각은 신이 인간에게 내린 최고의 축복이라던가. 이 축복 덕분에 십 대 시절 아버지가 자행한 악몽을 딛고 성인이 된 스무 살 이후에는 비교적 긍정적으로 살아올 수 있었다. 이십 대 중반까지 부모님과 한집에서 생활했지만, 대학생이 되고, 회사원이 되고부터는 부모님과 부딪힐 시간은 확연히 줄었다. 이 시기 심각한 사고를 당한 아버지는 몇 년간 병원에서 입원 생활을 했기 때문에, 아버지의 부재로 그와 만날 일이 한동안 아예 없었다고 하는 것이 더 맞는 표현이겠다.




아버지는 4년인가 꽤 오랫동안 집을 비웠는데, 기억이 틀림없다면 나는 이때 병문안을 사고 소식을 듣고 얼마 뒤 딱 한 번밖에 가지 않았다. 아버지의 사고 첫해에는 고3이라 대학 입시에 열중했고, 대학교에 입학한 뒤에는 적응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사실 이 모든 것은 핑계이고 병문안을 차일피일 미루다 보니 어느덧 시간이 흘러 아버지는 퇴원해서 집에 돌아와 있었다. 이 시기에는 아버지라는 존재를 거의 신경 쓰지 않고 살았다고 해야 할 것 같다.


처음 사고 소식을 들었을 때는 ‘대체 왜 우리 집에 이런 불행한 사고가 찾아왔을까’ 두렵고 불안한 마음에 눈물이 베갯잇을 흥건하게 적셨다. 그러나 부모님이 수술과 치료와 재활, 병간호를 위해 집을 비운, 부모님이 부재한 조용한 집안 분위기에 놀랍도록 금세 적응했다. 이 시기에 아버지가 진심으로 보고 싶었던 적은 냉정하게 단 한 번도 없었다. 아버지를 병문안 가지 않은 자식으로서 일말의 죄책감에 간혹 괴로운 적은 있지만.


아버지가 오랜 입원 생활을 마치고 퇴원해 집에 돌아온다고 했을 때도 양가적인 감정이 들었다. 분명히 기뻐하고 축하해야 할 일인데, 마냥 기쁘지만은 않아서 불편한 기색을 감추고 애써 즐거운 척을 했다. 아버지가 보고 싶었다고, 오랜 치료를 잘 끝마치고 이렇게 돌아오셔서 얼마나 기쁜지 모르겠다고. 환영의 거짓 인사를 건네며 억지웃음을 지어 보였다. 환영하는 말이 완전히 거짓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완전한 진심도 아니었다.




운이 좋게 아버지와 애틋하고 좋은 관계를 맺고 있는 사람은 ‘그래도 아버지인데 너무한 것 아니냐’라며 이해하지 못할 수도 있다. 이해한다. 나도 자식으로서의 도리를 저버리는 것만 같아서 아버지에 대한 부정적인 감정을 부정하느라 끝끝내 괴로웠으니까. 겉으로 온전히 내비치지 않은 아버지를 향한 극단적인 미움과 혐오는 죄책감을 끊임없이 자극하고, 나를 죄의식의 굴레에 단단히 옭아맸으니까.


이런 깊은 죄책감이 아버지를 이해하고 사랑해야 하며, 아버지의 바람대로 부녀관계의 거리를 좁혀가야 한다는 강박과 집착을 만들었던 것 같다. 아버지에게 받은 상처보다 아버지를 향한 죄책감의 크기가 더 커서 과거의 악몽을 계속해서 지우고 달콤한 꿈에 젖고 싶었던 것 같다. 아버지에게 다가갈 수 있도록 부정적인 실제 이미지를 지우고 내가 믿고 싶은 좋은 아버지의 환상을 덧입혀서 현실을 왜곡했던 것 같다. 그때까지 아버지와 나는 실제로 한 번도 가까웠던 적도, 가까워질 수도 없는 관계였는데도 말이다.



심리에세이 <부모님과 헤어지는 중입니다> 중 '아버지가 알코올 중독이라고 자각하지 못한 이유(1)'에서 발췌한 내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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