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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마일펄 Jul 11. 2024

주변인의 영혼을 갉아먹는 나르시시스트, 어떻게 대처할까

타인을 무시/착취하고, 남 탓을 일삼으며, 절대 사과하지 않는 그들

이전 글: https://brunch.co.kr/@smilepearlll/416/




3.

프로이트는 자기애성 성격장애를 병적인 자기애에 고착된 상태로 바라본다. 신생아는 부모의 전폭적인 애정과 보살핌을 받으며 자기 자신의 몸에 온 관심을 기울인다. 이때 세상이 자기 자신을 중심으로 움직인다는 느낌을 ‘유아기적 또는 일차적 자기애’라고 한다. 그런데 점점 자신과 외부세계(부모)가 다름을 인식하고 이를 구분하며 심리적 에너지가 부모를 향하는 ‘대상애(object-love)’가 나타난다. 이때 유아는 부모나 타인과 사랑과 애정을 주고받는 상호작용을 경험하며 자기의 존재가치와 소중함을 느끼게 되고, 이를 ‘이차적 자기애’라고 한다. 사랑의 방향이 외부로 향하는 대상애가 나타나지 않아 이차적 자기애로 발전하지 못하고, 성인이 되어서도 사랑의 방향이 여전히 자기 자신에게만 향하는 유아기적 또는 일차적 자기애 상태에 머물러 있는 것을 ‘병적인 자기애’라고 하고, 나르시시스트들이 여기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


이후의 정신분석학자들은 유아가 성장하며 부모가 완벽하거나 전지전능한 존재가 아님을 깨닫고, 규제나 질책에 따른 한계에 부딪히는 좌절을 경험하며, 부모와 자기 자신에 대한 여러 표상(일종의 이미지, 사람은 누구나 장단점이 있듯이 표상은 좋은 표상, 나쁜 표상 모두를 포함한다)을 내적으로 통합하는 과정을 거쳐 ‘현실적 자기애’로 발전한다고 설명한다.


4.

주양육자(주로 엄마)가 아이의 감정과 마음을 제대로 이해, 공감하지 못하고, 무관심하게 방치하는 등 냉정하고 불안정한, 비일관적인 양육을 하게 되면 아이는 은연중에 ‘나는 사랑받을 만한 가치가 없는 사람인가 보다’, ‘나는 나쁜 아이인가 보다’라는 부정적인 자기 인식을 하게 된다. 결핍된 엄마의 애정과 돌봄에 강한 갈증을 느끼고, 온전한 애정을 주지 않는 엄마에게 분노하는 한편, 부정적인 자기 인식에 대한 일종의 보상 기제로 엄마의 사랑을 얻고자 노력하고 오히려 엄마의 애정과 돌봄을 받고자 집착한다. 엄마가 가끔씩 인정하는 자신의 장점을 필사적으로 부풀리고, 엄마의 칭찬과 인정을 받고자 지나치게 예민하게 반응한다. 이처럼 사랑의 방향이 외부세계(엄마, 타인)로만 향해서 애정과 인정, 칭찬에 지나치게 민감하고, 자아를 통합한 현실적 자기애로 발전하지 못했을 때, 병적인 자기애 상태에 머무르게 된다.


아이들이 자신에게 깊은 상처를 주었는데도 부모나 부모를 대신하는 보호자에게 여전히 깊은 애착을 보이는 것은, 그들에게 감정적으로 너무 많은 투사를 하기 때문이다. 그런 아이들은 학대나 무시당한 사실을 또렷이 기억하면서도 부모님은 자신을 사랑한다는 잘못된 믿음을 부여잡는다. 학대당한 기억보다는 어쩌다 부모가 잘해준 것, 보살펴준 것에 더 매달리는 것이다.

_벨 훅스, <All about Love(이영기 옮김, 책읽는수요일, 2012.10)>, 58쪽 중에서




툭 건들면 곧바로 부서질 만큼 내면이 너무 약하고 열등감과 깊은 결핍에 사로잡힌 채 자아통합이 덜 이뤄져서, (어떤 이유로든) 애정과 돌봄에 굶주려서 자기가 견고히 쌓은 환상의 성 안에서 갇혀서 무조건적이고 무한한 비현실적이고 완벽한 사랑을 갈구하는 갓난아기 상태에 머무른 채로 사는 것이 그들의 최선이라고 생각하면, 애정 어린 시선은 무리이더라도 조금이나마 연민과 동정의 시선으로 바라볼 수 있지 않을까 싶다. 나를 낳고 키워준 전형적인 나르시시스트인 부모님을 내가 점점 더 바라보는 시선이기도 하고.


그렇다고 ‘다 너 잘 되라고 충고 또는 조언하는 거’라거나 ‘자신은 원래 성격이 솔직하고 직설적’이라며 나의 단점을 불현듯 또는 시시때때로 들추고 함부로 험담(깎아내리기) 또는 비난하거나, 자신을 낮추는 듯하면서 실제로는 ‘아니야, 너가 얼마나 예쁜데’, ‘네가 얼마나 대단한데’, ‘네가 얼마나 잘난 사람인데’, ‘네가 얼마나 멋진데’ 같은 은근한 칭찬을 유도해 타인의 인정으로 우월감을 느끼고 자존감을 높이려고 하며 헷갈리는 말과 행동을 하는 나르시시스트에게 이용, 착취당하라는 의미는 아니고. 나르시시스트는 일반적으로는 사람을 무시하는 한편 성공, 애정, 인기, 돈과 권력 등 자신의 목적 달성을 위해 필요한 사람에게는 얼굴을 완전히 바꿔 예의 바르고 좋은 사람인 척 다가가 매력적으로 행세하며, 타인의 욕구를 얼마든지 간파해 선택적으로 부응할 수 있는 능력자라는 점을 기억하고, 그 유혹에 넘어가지 않도록 경계하고 선을 긋는 자세를 잊지 말아야 한다.


자신의 실수는 얼마든지 그럴 수 있는 일이고, 타인의 실수는 절대로 벌어져서는 안 되는 일로 치부하는 자신에게는 관대하고 타인에게는 엄격하며, 자신의 잘못을 절대로 인정하지 않고 무조건 타인의 책임으로 돌리며 남 탓을 일삼고, 타인을 괴롭히고 상처를 입혀도 결코 사과하지 않는 나르시시스트와 원만한 관계로 잘 지내기는 (경험상) 극히 어렵다고 생각한다. 그들의 이해불가한 말과 행동의 동기는 이해하되, 정신이 피폐해지고 싶지 않다면 되도록 피하는 것이 상책이고, 만일 불가피하게 엮이더라도 자기 노출을 최소화하고 최대한 거리를 두는 것이 자기 자신을 보호하는 최선의 길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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