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 '어른'의 의미
늦은 시각, 전화벨이 울렸다.
나 : 여보세요?
친구A : 야~어디야?
나 : 나? 집이지.. 시간이 몇신데..
친구A : 너 내일 수업없지?
나 : 어~근데 어쩐 일이래. 이 시간에 전화를 다하고.
친구A : 그냥. 너 괜찮으면 니네 집 앞에서 술 한잔할래? 내가 갈게.
나 : 이 시간에 온다고? 엄청 걸릴 거 아냐.
친구A : 차로 가면 30분이면 도착해. 너희 집에.
나 : 알겠어~ 그럼 도착 10분 전에 전화해~
친구A : 어~
토요일에서 일요일로 넘어가는 오후 11시 50분.
결혼한 친구가 느닷없이 날 보러 우리 동네로 오겠다고 했다. 가끔 이렇게 밤에 보는 사이였지만, 친구가 결혼한 후, 난 되도록 주말에 연락을 자제하는 편이었다.
친구의 부인은 오랜만에 방문한 사촌을 만나러 지방에 내려가 있었고 친구는 혼자만의 시간을 보내다 문득 내가 떠오른 것이었다.
친구들끼리 만나면 하는 얘기들은 서로 비슷하다.
요새 회사일은 어떤지.. 새로 들어온 신입직원은 일을 잘하는지..
신혼생활은 즐거운지.. 결혼하니 좋은지..
별 일은 없는지..
누구나 주고받는 흔한 이야기들로 술잔과 분위기는 채워진다.
흔한 이야기로 채워질 것 같던, 우리의 술자리에 친구는 무게감 있는 이야기를 꺼낸다.
친구A : 와이프랑은 다 좋은데, 두 가정이 너무 달라.
나 : 뭐가 그렇게 다른데?
친구A : 너도 알다시피 우리 집은 가족행사가 많은 편이 아니잖아.
나 : 그렇지.
친구A : 근데 처가는 주말마다 행사가 너무 많아. 모임을 너무 많이 가지더라고.
나 : 음.. 그건 힘들 수 있겠네.
친구A : 지난주 금요일엔 내가 몸이 너무 안 좋아 연차 내고 병원 갔다가 쉬고 있었는데 토요일에 친척 모이는 자리에 못 간다고 장모님이 서운해하시더라고. 외국에서 오랜만에 오는 친척이 있어서 사위 소개해주고 싶은 마음은 알겠는데 몸이 안 좋은데, 내 걱정보다 그 자리에 못 가는 걸 더 서운해하시니... 난 좀 그게 답답하더라.
나 : 와이프는 뭐라고 하는데?
친구A : 와이프가 중간에서 잘 얘기해줬지. 뭐
나 : 그건 네가 서운할 만하네..
친구A : 그래도 와이프가 나한테 잘 맞춰주고 서로 가정이 다르다는 걸 잘 아니깐 중간에서 역할을 잘해줘.
나 : 응~그럴 것 같더라.
그때 친구가 내게 말했다.
근데 아버지가 어느 날, 나한테 이런 말을 하더라.
너는 나나 니 엄마한테 절대 새아기 흠되는 얘기는 하지 말라고. 팔은 안으로 굽는다고.. 니가 우리한테 새아기 흠을 얘기하면 다른 장점들보다 그 점이 가장 신경 쓰이고, 그로 인해 새아기를 색안경 끼고 보게 될 것 같다고. 그러면 너희 부부에게도 하나도 좋을 게 없다고.
그러면서, 둘 사이에 너무 답답하고 힘든 일이 있으면 네 속마음을 가장 잘 털어놓을 수 있는 친한 친구한테 새아기 흉도 보면서 마음의 얘기를 털어내라고.
그러면 마음이 좀 나아질 거라고.
친구는 니 편을 항상 들어줄 테고, 나중에 니 와이프를 보더라도 그런 흉을 내색할 수도 없을 거라고.
그리고 또 반대로 그 친구가 같은 일로 힘들면 서로 그런 얘기 들어주면서 풀어가라 하더라고.
아..... 그 말을 듣는 순간,
친구가 늦은 시간 나를 찾아온 연유를..
그리고 아버지란 존재의 의미를... 느끼게 되었다.
(아주 조금) 슬프게도 나에겐 그런 이야기를 해 줄 어른이 그리고 나와 오랜 시간 함께한 그녀에게도 그런 어른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들이키는 소주를 더 씁쓸하게 했다.
언젠가 엄마도 내게 이런 비슷한 이야기를 한 적이 있었다. 엄마도 살아가면서 느끼는 거지만, 엄마가 자식에게 해줄 수 있는 부분과 아빠가 자식에게 해줄 수 있는 부분이 다르다는 걸 느끼게 된다고.
엄마는 너를 믿지만, 너희 둘에게 그런 어른이 없다는 게 엄마는 마음이 쓰인다고. 말이다.
그땐 그 말의 의미를 몰랐는데,
친구의 얘기를 듣는 순간, 엄마가 건넨 말의 의미를 어렴풋이나마 느낄 수 있었다.
어떠한 결핍은 때론 누군가를 강하게 하기도 하지만, 그러한 결핍으로 내면 한켠에서는 그 사람을 한없이 무너뜨리기도 한다. 살아가는 모든 일이 그러하겠지만, 어떠한 '결핍'을 얼마나 잘 다뤄야 하는지는 결국 그 사람의 마음가짐과 몫일수밖에 없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있다.
난 내가 가진 결핍에 상당히 예민한 편이고, 그녀는 그녀가 가진 결핍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편이다.
그런데 난 잘 안다.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그녀의 마음 한켠엔 커다란 슬픔이 존재할 것이고,
예민하게 반응하는 내 마음 한 켠엔 또 다른 강함이 자라나고 있다는 것을.
결국 우리에겐 모두
일공부 이외에 마음공부가 필요하고
내 마음공부를 통해 나와 내 주변 사람들의 마음도 살펴야 한다는 것을.
그날의 술자리가 한참 지나고... J에게 이 얘기를 해주고 나서야 더 깊게 각인되었다.
친구는 그 날,
자신의 집으로 돌아가며 늦은 시간 자신의 얘기를 들어줘 고맙다고 했지만 오히려 그런 이야기를 내게 털어 놓아준 친구에게 난 더 고마움을 느꼈다. 어쩌면 난 누구에게도 들을 수 없는 얘기였기에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