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테마별 독서_2. 작가들의 생각 그리고 삶 (추천 에세이)
[테마별 독서는 그동안 읽은 책을 주제별로 엮어 제 스타일대로 소개해드리는 공간입니다. 테마별로 3~5권의 책을 묶어 소개하니 글이 다소 길어질 수 있습니다.]
우리는 어떤 방식으로든 성장한다. 나이 들어감에 따라, 경험이 쌓임에 따라, 각기 다른 모습으로 성장한다. 여기 각기 다른 모습의 네 남자가 있다. 그들은 살아온 방식, 하는 일 그리고 현재의 모습도 모두 다르다. 공통점이라곤 책을 좋아했다는 정도겠지만 좋아한 책의 장르도 모두 달랐을 것이다.
그들이 써 내려간 이야기는 자신의 성공담이나 사회에서 이루어놓은 업적에 대한 자랑 따위가 아니다. 한 사람의 생각과 인생이 어떻게 정립되어 가는지를 그간의 경험과 읽었던 책 그리고 만남을 통해 담담히 서술해나가고 있다.
네 명의 이야기를 듣고 있노라면 자연스레 내가 만난 사람들, 그간의 경험, 읽었던 책들이 스쳐 지나갔다. 내 이야기도 언젠가 네 명의 이야기처럼 흥미로울 수 있을지... 생각하며 책들을 읽어 내려갔다.
언젠가 나오겠지 했던 이의 책이 나왔다. 출판계에 해성같이 나타나 <지적 대화를 위한 넓고 얕은 지식>이란 책으로 베스트셀러 작가의 반열에 오른 채사장. 그가 쓴 <지대넓얕>, <시민의 교양>을 읽으며 대체 이 사람은 어떻게 이런 책을 쓰게 되었고,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 무척 궁금했다.
그가 쓴 세 권의 책이 모두 기존 지식을 먹기 쉽게 편집하여 독자에게 소개한 책이었다면 이번 <열한 계단>이란 책은 자신의 성장에 영향을 끼친 열한 권의 책과 노래 거기에 자신의 경험을 적절히 섞어 읽기 좋게 만들어 놓았다.
우리는 지금까지 열 개의 계단을 밟고 올라왔다. 소년은 문학으로 눈을 떴고, 예수와 붓다를 통해 구원의 문제를 고민했다. 이러한 고민은 철학과 과학을 비롯한 학문에 대한 관심으로 이어졌다. 그는 이상을 추구했지만, 현실과의 괴리 속에서 고민했다. 소사의 삶은 수용이라는 적극적 행위를 통해 이러한 괴리를 극복할 계기를 마련해주었다. 삶에 대한 고민은 죽음에 대한 물음으로 이어졌고, 삶과 죽음이 나라는 존재 안에서 통합됨을 이해하게 했다. 결론은 이것이다. 나란 무엇인가? 그것은 삶과 죽음을, 내면과 외부를, 자아와 세계를 통합하는 구심점이다.
정반합의 방식으로 기독교와 불교, 삶과 죽음, 현실과 이상, 과학과 철학에 대해 치열하게 고민하고 독서하며 나름의 생각을 정립해 나간다. 그가 만약 책만 읽은 이의 이야기였다면 이렇게 귀 기울이지 않았을 것이다.
대학시절 이상적인 자아를 찾기 위해 책 속에만 머무르기도 했고, 하루하루가 조급해 회사원, 의류 & 화장품 회사 창업, 노량진 학원 강사, 전업 주식투자자로 자신의 모습을 바꿔가며 조금이라도 현실에서 돈을 벌기 위해 고군분투하였다.
지금은 안다. 이렇게 불안하고 조급한 시간들도 개인의 성숙을 위해 반드시 필요한 시간임을 말이다. 우리는 선입견이 있다. 내면의 성숙은 고결한 방식을 통해서만 이룰 수 있다는 선입견, 동서양의 고전을 읽고, 어려운 철학책과 씨름하고, 대학원에서 공부를 하고, 조용한 공간에서 사색하는 아름다운 방법만이 우리를 성장시킬 것이라고 생각한다. 어떤 면에서는 옳은 말이다. 우리는 실제로 그러한 시간 속에서 성장한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얻지 못하는 절반의 배움이 있다. 고결하지 않고 만나고 싶지도 않은 세계에서의 경험들, 부당함에 굴복하고, 부조리에 타협하고, 옳은 주장을 꺾고, 스스로의 초라함에 몸부림칠 때에만 얻게 되는 그런 배움이 있다. 슬프게도 우리에게는 이런 세계에 머무르는 시간이 필요하다. 그래야만 우리는 나와 타인의 한계를 정확하게 이해할 수 있고, 그때에야 비로소 나에게 엄격하고 타인에게 너그러운 성숙한 어른이 될 수 있다.
우리는 한 가지에만 집중한 사람들의 한계를 쉽게 본다. 책만 본 사람들과, 현실에 적응하기만 한 사람들의 한계. 우선 책만 본 사람들의 한계는 타인에게 엄격하다는 것이다. 이들은 세상이 쉽다. 왜냐하면 책의 울타리 속에서 안전하게 보호받으며 성장했기 때문이다. 이들은 실제 세상 밖으로 나가본 적이 없는 까닭에 현실의 폭력에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는 다른 사람들이 나약할 것이라고 상상한다. 그리고 자신이 그들을 가르칠 수 있는 사람이라고 믿는다. 하지만 막상 현실에 발을 디디면 이들은 자기 마음대로 되지 않는 현실에 당황한다. 그리고 스스로의 나약함을 부정하고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다음과 같은 사람이 된다. 모든 일에서 불평불만거리를 찾아내는 사람, 타인의 잘못에 예민하게 반응하는 사람, 선과 도덕과 정의를 습관적으로 강조하는 사람.
다음으로 현실에 적응하기만 한 사람들의 한계는 자신에게 너무도 너그럽다는 것이다. 이들은 세상이 어렵다는 것을 잘 안다. 내 뜻대로 되는 것은 하나도 없으며, 계획과 일정에 따라 정확하게 진행되는 일 따위란 애초에 존재하지 않음을 정확히 알고 있다. 그래서 이들은 문제에 봉착했을 때, 옳고 그름으로는 문제를 해결할 수 없으며, 타협과 조율을 통해서만 상황에 따라 문제를 봉합할 수 있다고 믿는다. 이들은 다음과 같은 사람이 뙨다. 선과 도덕에 대해 하찮게 여기는 사람, 모든 것을 손익으로 판단하는 사람, 심연의 깊은 대화가 불가능한 사람.
두 가지가 병행되어야 한다. 책과 삶이, 이상과 현실이. 하지만 나는 그렇지 못했다. 대학생 때까지는 전자에 치우쳤고, 사회생활을 시작하면서 후자에 치우쳤다. 현실에 첫 발을 들여놓았을 당시에 나는 충격이 컸고, 이렇게 생각하게 되었다. 지금까지 내가 배우고 공부했던 것들은 모두 쓸모없는 것이다.
정의, 신념, 철학, 이념이란 헛소리에 불과하다. 나약했던 나는 현실의 냉혹함에 놀랐던 것이다. 철저하게 경제적인 인간이 되고자 노력했다. 돈을 벌고 남들처럼 살 것이다. 집을 사고, 차를 사고, 가정을 꾸리고, 어른이 될 것이다. 나는 다짐했다.
현실을 살아가다 보면 내면의 성장은 등한시 한 체, 외적인 성장만을 바라보며 살아갈 수밖에 없게 된다. 보여지는 직장과 직위, 당장의 내 월급, 타고 다니는 차종이 더 중요해진다. 경제력이 제 일의 매력인 자본주의 사회에서 보여지는 이미지, 경제적 능력은 그 어떤 것보다 더 강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우린 자아를 들여다보고 생각하고 사색해야 한다. 살아가다 보면 진정한 '나'란 사람의 모습은 잊어버린 체, 사회가 내게 원하는 모습, 타자가 원하는 모습으로만 살아가고 있는 자신을 바라보게 된다.
옆사람도, 앞사람도, 뒷사람도 모두 그러하기에 우린 서로를 위로하며 모두가 그렇게 사는 것이라며 위로하며 진정한 자신의 생각과 모습은 잊어버린 체 하루하루의 삶을 살아낸다.
어쩌면 '진정한 자신의 생각과 모습'이란 것도... 처음부터 없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삶의 제 1 목적은 경제적으로 자유롭고 건강하고 행복하게 사는 것이기에 삶과 죽음, 기독교와 불교, 과학과 철학에 대해 깊이 고민하는 것 자체가 사치이고 쓸모없는 생각일 수도 있다.
저자 역시 책을 통해 바라본 세상과 실제 몸으로 부딪힌 현실이 너무도 달랐기에 남들처럼 집을 사고 좋은 차를 타며 행복한 가정을 꾸리고자 다짐했을 것이다. 그것이 자기성찰보다 더 필요한 것일 테니 말이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는 책을 통해 바라본 세상을 현실에 책으로 소개하면서 자신이 원하는 것을 하나씩 이뤄갈 것이다.
우리 모두가 채사장처럼 그렇게 살 순 없겠지만 돈을 벌고 있는 직장인이라면 그가 고민했던 질문들에 대해 스스로 생각하고 사유하며 살아가야 하지 않을까.
서울대 법대를 졸업하고 하버드 로스쿨 석사과정을 밟고 현재 서울 동부지검의 부장판사를 역임하고 있는 저자 문유석의 삶은 전형적인 엄친아의 모습이다. 우린 대부분 엄친아를 싫어한다. 그런데 이 엄친아는 왠지 모르게 정이 간다.
본인을 개인주의자라고 선언하지만 세상을 바라보는 따뜻한 시선이 있고,
본업은 판사인데 글쓰기가 취미인지라 판사로서의 삶과 개인적인 삶을 담은 두 권의 책을 출간하기도 하고,
그것도 모자라 <미스 함무라비>란 법정 소설까지 펴냈다.
'판사는 죄와 죄인이 아닌 사람과 삶을 볼 수 있어야 한다. 결국 제도는 사람을 위해 존재하기 때문이다.'
판사로서 인간에 대한 따뜻한 시선을 가진 그가 <개인주의자 선언>이란 제목으로 나는 개인주의자다라고 말하는 것이 낯설지만 그의 책을 읽다 보면 그가 왜 그렇게 말하는지... 이 글을 쓰고 있는 나도... 이 글을 읽고 있는 대다수의 직장인들도 왜 개인주의자가 되길 원하는지 이해할 수 있다.
<우리가 더 불행한 이유>
남들 눈에 비치는 내 모습에 집착하는 문화, 집단 내에서의 평가에 개인의 자존감이 좌우되는 문화 아래서 성형 중독, 사교육 중독, 학력 위조, 분수에 안 맞는 호화 결혼식 등의 강박적 인정투쟁이 벌어진다. 사실 이건 모두 같은 현상이다.
‘남부럽지 않게’ 살고 싶다는 집착 때문에 인생을 낭비하는 이들을 접할 때마다 드는 생각이 있다. 그냥 남을 안 부러워하면 안 되나. 남들로부터 자유로워지면 안 되는 건가. 배가 몇 겹씩 접혀도 남들 신경 안 쓴 채 비키니 입고 제멋으로 즐기는 문화와 충분히 날씬한데도 아주 조금의 군살이라도 남들에게 지적당할까 봐 밥을 굶고 지방흡입을 하는 문화 사이에 어느 쪽이 더 개인의 행복에 유리할까.
우리가 더 불행한 이유는 결국 우리 스스로 자승자박하고 있기 때문 아닐까. (page 32,33)
한국의 직장문화는 집단주의 문화이다. '나'가 아닌 '우리'를 강조하고, '개인의 행복과 발전'보단 '팀의 성과와 이익'을 그 무엇보다 더 중요시 여긴다. 회사 내 자신의 자리를 지키기 위해 우린 어쩔 수 없이 내가 아닌 우리를 위해 희생을 해야 하고 개인의 삶, 가족을 위한 삶은 뒷전이 되어 버린다.
<개인주의자 선언>의 저자가 부장판사이니 그의 휘하에 있는 판사들은 자연스레 저녁이 있는 삶이 보장되지 않을까. 회식을 별로 좋아하지 않고 개인의 삶을 소중히 여기는 직장상사가 많아진다면 회사 내 불필요한 야근은 많이 줄어들게 되지 않을까.
직장인은 시간에 얽매여 산다. 회사에 시간과 노동력을 제공하고 그 댓가로 월급을 받기에 항상 일탈을 꿈꾸며 자유로운 삶을 살아가길 희망한다. 그래서 우린 언제나 자유로워 보이는 프리랜서의 삶을 동경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밤의 인문학'의 저자 밥장은 애니메이션을 그리는 프리랜서 작가이다.
미대를 전공했겠지 생각했지만 그는 연세대 경영학과를 졸업했다. 그럼 그림을 오랫동안 그려왔겠지 생각했지만 그림과 상관없는 통신 대기업에서 8년간 일했다고 한다. 그의 나이 서른다섯에 그림에 뜻을 두고 합정의 어느 한 오피스텔에서 15개월간 그림만 그렸다고 한다. 그 이후 밥장이라는 필명으로 여기저기에 그림을 그리며 그는 먹고 살아가고 있다.
자신이 정말로 원하던 일을 찾고, 은평구에 자신만의 아지트인 '믿는 구석'이란 공간을 만들고, 그 공간에서 그림을 그리고 책을 읽고 친구를 불러 밤새 이야기꽃을 피우고, 전 세계로 여행을 다니며, 3개월간 통영에서 살아보기도 하는 그의 삶은 어쩌면 자유를 꿈꾸는 직장인에게 부러움의 대상이 될런지도 모르겠다.
그의 책 '밤의 인문학'은 16가지 단어에 녹어있는 우리의 삶을 조명한다. 우리의 삶을 조명하기에 자연히 그의 삶도 조금씩 투영되기도 한다.
맥주, 아마추어, 사치품, 늙는다는 것, 진짜 삶, 외로움, 연애와 사랑, 일과 꿈, 여행, 인간관계, 미식, 취미, 쾌변, 카페, 섹스, 기괴함과 창조성
16가지 단어로 밥장 자신의 삶과 우리의 삶을 비춰본다.
우리는 늘 바쁩니다. 왜 바쁜지도 모른 채 바쁩니다. 바쁜 게 곧 삶의 의미고 구원이라고 여깁니다. 하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참 한심하죠. 한 가지 일에 빠져 정신과 육체를 혹사시키거나 어디에 쓸지도 모른 채 평생 준비하고 삽니다. 그리고 잠깐씩 주어지는 시간마저 어이없는 심심풀이로 때우고 맙니다.
우리는 행복을 담보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우물쭈물하다가 시간을 다 보내는 게 아닐까요? 하지만 자신만의 진짜 심심풀이 땅콩은 위대합니다. 왜냐하면 우리 인생이 얼마나 덧없는지 이렇게 재미나게 보여주는 건 딱히 없으니까요.
사랑에 실패하는 사람은 많지만 사랑에 대해 자신의 능력 부족이 실패의 원인이라고 인정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사랑을 유쾌한 감정 놀음이나 우연한 몰입쯤으로 이해하기 때문이다. (이승우_생의 이면 중에서)
<백 년 동안의 고독>을 쓴 소설가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는 ‘인생에서 정말 중요한 것은 당신에게 실제로 벌어진 일이 아니라, 당신이 기억하고 있는 일과 당신이 그것을 기억하는 방식’이라고 하였습니다. 사람 사이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인간관계에서 벌어지는 갈등은 대부분 관계 자체보다 관계에 대해 어떻게 말하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나는 일이란 돈, 만족, 친구, 창조성, 심지어 멋진 주거지역 등을 한꺼번에 하나의 꾸러미로 해결해주는 어떤 것이라는 생각을 하며 성장해왔다.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었으니 직장에 자꾸만 실망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이제 포트폴리오 생활을 하면서 나는 그런 꾸러미를 해체하게 되었다. 어떤 일은 돈 때문에 하고 어떤 일은 다른 이유로 하는 식으로 말이다. <코끼리와 벼룩> 중에서
우리는 남들보다 뛰어나려고 노력하는 것이 아니라 남들과는 다르게 되려고 노력하는 것이다. 그것은 승자독식의 형태가 아니라 모든 사람이 승자가 되는 그런 방식이다. 우리는 스스로 승자의 개념을 재정립할 수 있다. 그러면서 다양성은 인종의 다양성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바람직한 생활 스타일의 다양성이 되어야 한다. <코끼리와 벼룩> 중에서
누구나 밥장처럼 프리랜서로 살 수 없다. 누군가에게 직장은 처자식을 먹여 살릴 수 있는 유일한 일터일 수 있고, 자신의 꿈을 펼칠 수 있는 꿈의 공간일 수 있기 때문이다. 내 시간을 자유롭게 쓰는 것보다 가족을 먹여 살리고 안정적인 삶을 꾸리는 게 더 중요한 사람들에겐 밥장처럼 사는 것이 오히려 더 불편할 수 있다.
누구에게나 '믿는 구석'이 필요하다.
살아가는 방식과 모습이 모두 다르더라도 그의 말처럼 누구에게나 믿는 구석이 필요하다. 내 힘든 마음을 모두 받아줄 수 있는 믿을 수 있는 사람, 삶이 고달프고 힘들 때 언제든 찾아가 즐겁게 이야기 꽃을 피울 수 있는 공간 그리고 힘든 세상을 살아가면서 자신만의 에너지를 비축할 수 있는 자신만의 믿는 구석.
그것이 우리에게 진짜 필요한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소설 속 인물을 4인 4색 인생 이야기에 굳이 집어넣은 이유는 그만큼 조르바의 삶이 그토록 매력적이고 아름다웠기 때문이다. 지나간 어제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다가올 내일에 대해 걱정하지 않는 조르바는 말 그대로 오늘만 사는 남자였다. 품위와 허례허식은 집어치우고 내면의 욕망을 쫓아 살아가는 그의 모습은 어쩌면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오지 못할 날들이 아닐지... 그래서 더 그런 날들을 살아가는 조르바가 그리워지는 것은 아닌지.
현실에 얽매이는 것들이 없기에 조르바는 발길가는 대로, 미래는 걱정하지 않은 채 오늘을 즐기며, 나름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는 것은 아니었는지..
새길을 닦으려면 새 계획을 세워야지요. 나는 어제 일어난 일은 생각 안 합니다. 내일 일어날 일을 자문하지도 않아요. 내게 중요한 것은 오늘, 이 순간에 일어나는 일입니다.
진정한 행복이란 이런 것인가. 야망이 없으면서도 세상의 야망은 다 품은 듯이 말처럼 뼈가 휘도록 일하는 것. 사람들에게서 멀리 떠나 사람을 필요로 하지 않되 사람을 사랑하며 사는 것.
인생이란, 오르탕스 부인처럼 단순하고, 살아볼 만한 것이며, 진부하지만 느긋하고 너그러운 것인 듯했다.
내 목표를 정한 이상 찔러야 할 곳을 알게 되었던 셈이다. 우리는 시작에 머물러 있을 뿐, 충분히 먹은 것도, 마신 것도, 사랑한 것도, 아직 충분히 살아본 것도 아닌 상태였다.
_____________ <그리스인 조르바> 중에서
누군가의 자식, 누군가의 남편 또는 아버지라는 이름으로 살아가는 우리들은 조르바처럼 살아갈 수 없다. 자유를 꿈꾸지만 막상 자유가 주어져도 우린 자유롭지 못하다. 자유란 것을 애초에 경험해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조르바에 열광했던 건 어쩌면 자유롭게 살아갈 수 없는 내가 그토록 그를 동경해서이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각기 다른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는 네 명의 남자 이야기 속 현재 내 모습은 어떤지 생각해보았다. 그저 평범한 직장인으로 살아가며.. 무엇에도 열정을 갖지 못한 체 그저 하루하루 소멸되어 가고 있는 것은 아닌지...
그 어떤 것도 되지 못한 체 점점 내 자리, 내 모습을 잃어가고 있는 것은 아닌지 두렵기만 하다.
평범한 직장인이지만 평범하고 싶지 않고,
어딘가에서 튀고 싶은 마음은 없지만 나만의 색깔을 갖고 싶고,
결혼을 꿈꾸지만 또 자유롭고 싶은 나는 아직 철이 들지 않은 것인지 모르겠다.
경제적 자립과 안정적인 일도 무척이나 중요하지만 '나다움'을 잃어버리지 않는 것도 그 못지않게 중요하다란 사실을 네 명의 삶을 통해 배운다.
OO의 아들, OOO대리, OO아빠로만 불리는 것이 아닌 자신의 이름으로 오롯이 살아갈 수 있는 우리가 되기를 바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