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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활주로가 있는 밤 Oct 10. 2022

부장님은 다 똑같나요?

공기업에 다니고 있습니다.

아버지는 부장이십니다. 거의 30년 동안 제가 아는 한 일주일 이상 쉬지 않고 매일 회사에 출근하셨습니다. 쉬워 보였다고 말하기보다는 그게 그렇게 힘든 일인지 크게 생각해보지 못했다는 게 맞는 말이겠네요. 그렇게 아버지는 매일 출근하고 저녁때 돌아오셨습니다. 이제 저도 아버지처럼 매일 출근합니다. 일과 삶의 균형이라고 해서 6시에 칼같이 퇴근하고 일 년에 일주일 동안은 휴가를 내고 싶습니다만, 현실은 맡은 바 일도 제대로 끝나지 못해 어쩔 수 없이 늦게 퇴근하고 가도 눈치 보여 내기 어려운 감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제가 모시는 부장님은 우리 아버지 나이입니다. 부장님은 뭐랄까 아버지랑은 다릅니다. 자랑이지만, 저는 아버지랑 친한데 부장님이랑은 친해지기 어렵네요. 가끔 힘들 때 아버지랑은 데이트도 했고 아직도 아버지를 뵙고 집으로 돌아올 때 꼭 껴안고 덕담을 나눕니다. 


부장님과 아버지보다 더 오랜 시간 같이 하는 것 같은데 이렇게 멀고 먼 사이로만 남게 돼서 솔직히 조금 아쉽습니다. 도대체 부장이라는 직무가 무엇이기에 말 걸기 어려울까요? 제가 본 부장님의 특징을 이야기해보자면, 일단 출근은 일찍 하십니다. 퇴근도 생각보다 일찍 하십니다. 회사를 사랑한다기 보다는 이제는 정으로 다닌다고 보입니다. 그래도 본인의 업무사랑다고 느껴집니다. 그래서 업무보고를 할 때면 사랑의 이야기로 매번 맞고 나옵니다. 업무보고를 들어가기 전, 상상할 수 있는 일들에 대해서 다 점검하고 다시 한번 어떻게 이야기할까 되새김질하며 첫 문장을 말하기도 전에, "이 부분은 검토했어?"라고 하시네요.


이 부분은 검토했어?


당연히 안 했죠 부장님 그런 걸 검토해야 하나요? 라고 여쭤보고 싶지만 그 말은 속으로 삼키고 확인해보겠습니다라고 말씀드리도록 합시다.


공기업 규정이 많습니다. 한 규정을 타고 계속해서 다른 규정들을 배출하는 큰 걱정 상자 같습니다. 하나를 알게 되면 아무래도 아까 그 규정 때문에 말이 안 되는 것 같, 또 다른 걸 보게 되면 아까 그 규정이 맞는 것 같네요. 감자 같은 제가 하는 일의 핵심은 공항을 뚝딱 고쳐보겠다인데, 왜 이렇게 뚝딱 고쳐야 하는지 규정만 정리하는 감자가 되곤 합니다. 그래서 이런 감자를 잘 이끌어 주실 수 있는 좋은 부장님과 나쁜 부장님은 아마 이럴 것 같다고 기대하곤 합니다.


좋은 부장님은 결국 규정에 함몰되기 전에 핵심을 다시 짚어 주시는 분일 것 같습니다. 나쁜 부장님은 규정을 위한 보고와 보고를 위한 규정만 확인해서 관리하는 분일 것 같네요. 이러면 규정에 맞게 딱딱 관리만 잘 되고 정작 일처리는 잘 안될 수밖에 없습니다. 조금 더 현실을 반영해서 처리할 수는 없을까 반문하지만 어렵겠죠.


좋은 부장님은 규정을 이야기하기 전에 이게 왜 중요한지를 설명해 주실 것 같네요. 나쁜 부장님처럼 규정만 이야기하는 건 아무래도 납득이 안 갑니다. 형광등이 뭔지 모르는 사람에게 형광등부터 갈아 보라고 하는 모양입니다. 형광등을 갈아 끼우고 불을 켰을때 환해진 거실을 보면서 깨달음을 얻기를 기대하시는 것 같네요. 최소한 형광등이 뭔지 알려주면 세면대에 형광등을 끼우는 시도는 하지 않았을지도 모르는데 말이죠.


저희 부장님이요?


저희 부장님은 반반입니다.


처음에는 규정을 이야기하시고, 두 번째 보고에서는 왜 해야 하는지 알려주십니다.


아무리 그래도, 첫 보고를 끝내고 규정에 함몰될 때 우리도 물속으로 깊이 빨려 들어갑니다. 결과는 이미 중요하지 않고 차오르는 숨을 쉬기 위해서 헤엄쳐 올라오는 것만 중요해집니다. 사실 수영을 배울 때 발차기부터 시작해도 우리의 최종 목표는 결승점입니다. 하지만 처음 물장구를 치게 되면 원하는 방향으로 가지 않고 조금씩 삐딱하게 가게 됩니다. 옆에서 선생님이 방향판을 잡아줘서 레일선을 건든다던지 다른 연습생과 부딪히지 않도록 도와야 합니다. 상황에 따라서는 오리발을 신겨주거나 수경을 바꿔야겠네요.


일도 비슷합니다. 발을 두 번 치고 숨을 한번 쉬는 규정알려주는 게 아니라, 숨이 막히지 않도록 급하게 방향 전환하는 법도 필요합니다. 결국 본인이 제일 효율적인 스트로킹(수영에서 팔을 앞으로 내미는 자세)을 찾아가는 것처럼 담당자의 의견을 듣고 효율성을 극대화하는 일도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아니, 판사님들도 법적 해석에 따라 근거가 가끔 바뀌잖아요. 왜 부장님 말씀이 법이 되어야 하는지 답답하긴 합니다. 두 번째 보고에서 일하는 이유를 듣기까지는 너무 천 길 낭떠러지인 것 같네요.


다시 아빠로 돌아와서 아빠도 회사에서 그렇게 꽉 막힌 부장님일까요? 잘 모르겠습니다. 회식도 없고 술도 안 좋아하셔서 일찍 퇴근하시는 아버지한테 한번 여쭤봐야겠습니다. 그러고 보니, 부장님도 제 나이 때 이렇게 답답하셨을까요? 도무지 물어볼 수 없는 질문들만 쌓아갑니다. 아무래도 집에가서 고민해 봐야 겠네요. 부장님 수고하셨습니다라고 말씀드리고 먼저 퇴근해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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