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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간채집자 Aug 15. 2018

최명희, 그리고 혼불

문학기행이 되었던 전주의 첫 여정을 떠올리다


전주에서 강의자리를 잡은 대학원 선배를 만나러 간다는 친구의 여행길에 또다른 친구와 내가 동행했다. 자동차 운전에 막 익숙해지던 친구의 차에 묻어갔던 전주행 드라이브. 2003년 12월의 마지막 주말이었다.

친구가 차를 몰고 찾아간 도착지는 전북대학교. 세 사람 모두 서울의 손바닥만한 사립 여대의 작은 캠퍼스에서들 대학생활을 보냈던 터라 달려도달려도 끝없이 느껴지던 전라도 국립대의 그 광활한(!) 캠퍼스 규모에 놀라워하던 기억이 어렴풋이 떠오른다.


초행이었던 전주 나들이길, 지도에서 전북대의 위치를 확인하던 중 학교 부근 지점에 표시된 최명희의 이름이 눈에 들어왔다. 도시안내지도에 그녀가 잠든 곳이 표시되어 있을 만큼, 작가 최명희는 전주에서 태어나 전주를 대표하는 문학인이었임을 깨달았다. 그녀가 암으로 세상을 떠난 뒤에야 최명희의 혼불 1,2권을 집에 사두고 펴들다 덮곤 했던 기억을 갖고 있던 터라, 가까이에 있다는 그녀의 흔적을 찾아가보고 싶었다. 친구의 선배를 만난 뒤 그에 대해 물었더니 숲으로 드는 산책길에 이어져 있어 조용히 사색하기 좋은 곳이라며, 흔쾌히 우리를 안내했다.

 

전북대 캠퍼스 북쪽, 건지산 기슭에 자리한 숲길. 어린이공원 주차장에 차를 대고 묘소로 향했다. 혼불문학공원이라고 새겨진 표지석을 안내삼아 숲의 산책로를 따라 걸어들어가니 야트막한 언덕 부근에 자리한 그녀의 소박한 묘를 마주할 수 있었다. 17년이란 긴 세월, 대학 졸업 후 사회인으로 살아온 생애의 반 이상을 원고지를 마주하고 한자한자 적어내려가며 혼불 집필에 매달렸던 그녀는 독신의 삶을 마감 후, 국문과를 졸업했던 자신의 모교 부지에 묻혀 있다.


숲의 오솔길을 통해 닿게 된 양지바른 언덕. 키 큰 나무들이 촘촘히 묘역을 감싸고 있지만  볕을 한껏 머금은 따쓰한 햇살은 그녀가 누운 자리 위로 고스란히 내리쬐이고 있었다. '전주에서 태어난 혼불의 작가 최명희 여기 고이 잠들다' (1947~1998). 작은 봉분 옆에는 그녀의 모습을 새겨둔 부조와 묘비 안내석이 보이고.


 "나는 시방 요천수가 은하수면 우리는 뭐잉가, 허고 생각헝마. 은하수 옆으가 저렇게 별이 많응게 요천수 옆으로 사는 우리는 무신 별이나될랑가 아요? 저 별들에서 보면 우리가 별이겄제" - 『혼불』 4권, <별똥별> 중에서.



"물오른 나무들이 젖은 숨을 뿜어내며 촉촉한 대기 속 어디선가 꽃봉오리 터지는 소리가 연연하게 들릴 것만 같은데" - 『혼불』 5권, <발소리만 그저 다만 발소리 만이라도> 중에서.




묘소 앞 둥근 쉼터에는 사이사이 벤치와 함께 반원형으로 놓여져 있는 10개의 돌비석이 자리하고 있는데 작가의 글 중에서 가려뽑은 글들이 새겨져 있다. 그이의 아름다운 미문을 한줄 한줄 읽어내려가다 이내 마음이 먹먹해지고 글들을 옮겨적기 위해 가방에 있던 펜과 메모수첩을 꺼내 들었다.



"아아, 강실아, 둥글고 이쁜 사람아. 네가 없다면......네가 없다면...... 나의 심정이 연두로 물들은 들 어디에 쓰겠느냐......" - 『혼불』 1권 <심정이 연두로 물들은 들> 중에서. 



지하의 뿌리한테는, 꽃 피고 새 운다는 지상이 오히려 흙 속일 것이요, 거기 우람하게 서 있는 나무의 무성한 가지는 거꾸로 뿌리라 여겨질 것이다. 그래서 뿌리는 어둠이 휘황하고, 햇빛은 캄캄할 것이다. - 『혼불』 4권 "박모(薄暮)"중에서. 



"칠흑 속의 먹장 같은 그믐밤에 그 무슨 달이 뜬다고 온달이라고 하는가. 그렇지만 보름의 달은 지상에 뜨는 온달이요, 그믐의 달은 지하에 묻힌 온달이다." - 『혼불』 5권"달 봤다아"중에서.



들판은 아득한 연두 물빛이다. 거기다 막 씻어 헹군 듯한 햇살이 여린 모의 갈피에 숨느라고 여기저기서 그 물빛이 찰랑거린다. - 『혼불』 1권 <사월령>중에서 



"사랑하는 이여, 아직은 돌아오지 말라. 내 이 가슴에 약이 덜 차 아직 이 봄이 약(藥) 봄이 아이어든. 천지에 난만한 꽃 피어나 독하게도 휘황하여 아득한 어질머리 일으킬지라도."

 - 산문 「소살소살 돌아온 봄의 밤 강물이여」중에서 



살아있는 사람들한테는 누구에게나 혼불이 있다고 합니다. '혼불'이란 '정신의 불' '목숨의 불', '감성의 불' 또는 사람을 가장 사람답게 하는 정령의 불을 가리키는 말이지요. - 강연록 「나의 魂, 나의 문학」중에서 (1995년)



"제가 정말 쓰고 싶었던 것을 딱 한가지만 얘기하라 한다면 그것은 어둠이 결코 빛 보다 어둡지 않다는 것입니다"  - 제11회 단재상(丹齋賞) 수상소감 중에서 (1997년)




"언어는 정신의 지문이고 모국어는 모국의 혼입니다.  저는 '혼불'에다가 진정한 불빛 같은 알맹이를 담고 있는 말의 씨를 심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얼이 넋이 무늬로 피어나는 그런 글을 쓰고 싶었습니다"  -  제5회 호암문학상 수상소감 중에서 (1998년)




전주로 차를 몰아준 친구.



조촐하되 누구나 편안히 쉬어갈 수 있는 공간.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언제까지나 잊지 않고 찾아와 작가를 기릴 수 있도록 하는 자리로 터를 잡았다는 그녀의 묘지. 어느 풍수학자는 그곳을 보고 '멀리서보면 마치 초롱불 같다'고 말했다 한다. 작가의 문체에서 느껴지는 분위기 만큼이나 세심하고 마음 살뜰했던 그녀를 그대로 반영하는 듯한 묘소의 자리가 오래도록 여운에 남았다.



아름다운 자리 오래도록 향기 가득하소서 - 햇빛 환한 날  崔明姬

- 여행길 이후, 혼불문학공원 입구에 새로 놓여진 안내판에 쓰여있는 그녀의 육필 서명




점심을 먹기 위해 전주시내의 관광명소인 한옥마을쪽으로 향했다.


한옥마을에서 가족과 함께 전통놀이를 즐기던 꼬마 아이. 그 모습이 너무 귀여워 카메라에 담았던...어느새 10년이니 많이 컸겠다.










그리고 경기전. 태조 이성계의 어진이 모셔져 있는 곳이다. 경기전 앞의 하마비에는 “지나가는 사람은 말에서 내리고 아무나 출입하지 말라"(至此皆下馬雜人毋得入)고 써 있다고 .최명희의 묘소를 안내했던 친구의 선배는 이번엔 조선의 역사를 한껏 풀어내주는 가이드가 되어 주었다.



한옥마을 입구에 눈에 띄는 이국적인 양식의 건축물. 경기전과 마주하고 있던 전동성당 앞에 또다른 친구를 세워두고 한 컷. 동양에서 좀처럼 만나기 어려운 지어진 지 100년이 훌쩍 넘은 로마네스크 양식의 이 아름다운 종교건축물은 우리나라에 천주교가 들어오고 최초의 한국인 순교자가 생겨났던 역사적인 순교지에 지어진 성당이라 한다. 로마네스크 및 비잔틴 양식의 아름다움과 웅장함을 느낄 수 있다. 전주의 대표적 명소로 유명한 곳이지만 박신양, 전도연이 주연으로 흥행했던 영화 '약속'(1998년 개봉)의 촬영지로 알려지면서 이곳을 찾는 이의 발길이 더욱 늘었다고.  





그저 친구를 따라 무작정 전주로 향했을 뿐 미리 계획을 세우고 이동길을 정해둔 건 없었다. 친구의 선배가 이끄는대로 이어지던 전주에서의 여정은 오후녘이 되면서 마무리 되었다. 전라도 임실이 고향이었던 선배는 알고보니 작가 최명희가 쓴 혼불의 열혈독자이기도 했다. 일반적인 관광지보다는 쉬이 들르게 되지 않을 숨은 명소를 보여주고 싶어했던 그는 우리의 이후 일정을 남원과 임실로 향하는 문학기행의 여정으로 꾸려주었다.




혼불 소설의 배경지를 따라 남원으로 이동해 도착한 곳은 서도역. 작품의 중요한 문학적 공간이 되는 곳으로, 혼불 문학의 출입문이라 할 수 있는 그곳은 역의 기능은 멈춘 낡고 오래된 간이역이었다. ‘신 서도역’은 2002년 새로 역사를 지어 이전하고,  1932년 준공 당시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던 소설속의 옛 서도역.


그곳엔 녹슨 철로와 수동 신호기가 그대로 남아 있었다. '치마폭을 펼쳐놓은 것 같은 논물을 가르며 구불구불 난 길을 따라, 점잖은 밥 한상 천천히 다 먹을만한 시간이면 닿는' 정거장.



"노적봉의 발등이 매안 마을이다. 마을 끝 아랫몰에 이르러, 치마폭을 펼쳐놓은 것 같은 논을 가르며구불구불 난 길을 따라, 점잖은 밥 한 상 천천히 다 먹을 만한 동안을 걸으면 정거장에 닿는다.본디 이곳은 무슨 이름을 따로 붙일 일이 없었던 논 가운데였다. 그러던 것이 전라선 철도가 개통되면서 이곳에 정거장이 생긴 것이다. 이 지점은 매안뿐만 아니라 그만그만한 주위 사방 마을과 여러 골짜기며 조금 더 멀리 떨어져 있는 마을에서까지 사람들이 골물처럼 모여 오기 알맞은 곳이었다. 논 위에 철로가 놓이고 정거장 역사(驛舍)가 세워지면서 역장의 관사와 역원의 집, 그리고 밥집이며 점방들이 처마를 맞댄 옆에 몇 채의 새 집이 들어서고 주막과 여각이 어울려 생겨났다. 지금까지는 근처에 없던 모양의 동네가 철갑차와 더불어 새 풍물을 보이며 제법 불어나 정거장 동네는 북적거리게 되었다.".- 혼불 3권 p.240



소설 속 서도역은 종손 며느리 ‘효원’이 대실에서 매안으로 신행 올 때 기차에서 내리던 곳이고, 그녀의 남편 강모가 전주로 학교 다니면서 이용하던 장소였다. 최명희의 혼불은 일제 강점기인 1930~40년대 암울했던 시대적 궤와 맞물려 살아간 사람들의 애환어린 이야기를 담고 있다. 전북 남원시 사매면의 유서깊은 ‘매안 이씨’ 문중의 무너져가는 종가를 지키는 종부(宗婦) 3대인 청암부인, 율촌댁, 효원이 이야기와 이씨 문중의 땅을 부치며 살아가는 상민마을 ‘거멍굴’ 사람들의 삶을 그린 소설이다.



서산 노적봉을 등뒤에 병풍같이 둘러 세우고 멀리 아득한 동쪽으로 지리산의 능선을 바라보는 매안 마을의 지형은,  검푸르게 우거진 소나무 산 노적봉의 기맥이 아래로 뻗어 내리다가 기슭에 이르면서 평평한 둔덕을 짓고 고이는데,  자락 끝에 나붓이 드러난 발등과 같이 도도록하다. 그냥 뒷동산이라고 불리는 산 자락 기슭에는 해묵은 밤나무가 들어차 우뚝하거나 드러누운 바위의 큰 덩어리들과 어우러져 동무를 하고 있는데, 이 밤나무 숲을 뒤안으로 한 원뜸이 마을의 맨 위쪽이다. 멀리서 보아도 한 눈에 들어오는 아름드리 은행나무가 암수 서로 마주하고 서 있는 종가의 솟을 대문 아래쪽으로는 형제, 지친과 그 붙이 집들이 모여 있다. - 혼불 3권 p.235



서도역에서 이동한 곳은 남원시 사매면 서도리에 위치한 노봉마을. 남원시 노봉마을은 작가 최명희 선친의 고향이자 작품 혼불의 주 무대이다. 최명희는 전북 전주에서 삭령 최씨의 후손으로 태어났다. 삭령 최씨는 부친의 본향인 남원 서도리에서 500년 동안 산  양반가로, 소설 혼불의 토대를 제공하는 작가의 창작 모티브가 되었다고 한다. 소설 속에 묘사된 것 처럼 노적봉을 병풍처럼 뒤로 하고 자리잡은 노봉마을은 아담하고 평화로운 전형적인 산골마을이이었다. 마을 맨 위 원뜸에는 작품 속에서 청암부인, 율촌댁, 효원, 강모가 거주했던 매안 이씨의 ‘종가’로 묘사된 공간인 최씨 종가집이 자리잡고 있었다. 마을을 굽어 보는 솟을대문을 들어서면 중문 앞 마당에 매화고목이 양반가의 기상을 보여 준다.




솟을 대문과 중문을 갖춘 넓은 집이었지만 중문 안의 본채는 오히려 아늑한 살림집의 분위기가 더 느껴지는 곳.




원뜸과 중뜸. 아랫뜸..작품 속에서 펼쳐지던 마을의 이름들을 꺼내가며 친구의 선배는 열심히 혼불 이야기를 열심히 풀어주었지만 미안하게도 그의 후배나 동행한 두 친구나 모두 혼불을 제대로 읽어보지 못한 탓에 어린아이들이 아무 생각없이 옛이야기에 귀기울이듯, 그저 듣기만 할뿐이었는데.



어렴풋한 혼불 마을의 이야기는 기억에 온전한 기억으로 남아있지 않은 덕에 그날의 폴더에 담겨 있는 사진들 중 찍은 곳이 어디메였는지 잘 가늠이 안되던 사진도 있있다.




예사롭지 않은 현판이 붙어 있는 이 또다른 솟을대문은 무슨 얘기를 들으며 내가 마주하고 섰던 곳인지 지난 시간의 태엽을 되감아봐도 기억은 도무지 오리무중. 담장 앞 움메~ 하는 소울음 소리가 머릿속에 뱅뱅 맴돌기만 했는데.  




여행길을 정리하면서 인터넷으로 혼불에 대한 자료를 살펴보다 2004년 남원에 조성된 혼불문학관 사이트에 실린 배경지 소개에서 이 사진들의 궁금증도 풀리게 되었다. 카메라에 담아두었던 곳은 전라북도 임실군 둔남면 둔덕리에 위치한 이웅재 고가(李雄宰 古家). 문학기행의 여정은 남원에서 임실로 이어져 있었다.


자료를 통해 확인한 내용은 다음과 같다.

이곳은 둔덕권역의 동촌마을에 있는 고택으로 고가정비 사업이 들어갈예정이다. 이곳은 소설 '혼불'속에서도 종가의 모델이 되었던 곳으로 유명하다. 조선시대 전통있는 명문가로 한 때는 이지역을 호령했던 흔적을 볼 수있으며, 소설 혼불을 좋아하는 많은 이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곳이다. 지금은 16대 손이 이 집을 지키고 있다.



혼불에 나오는 남원 매안 이씨의 종가집의 실재 모델은 임실군에 위치한 이곳 전주 이씨의 고택과도 연관되어 있었다. 임실군 둔덕리에 있는 전주 이씨 종가인 이 고택은 현재 건물 소유주인 이웅재의 16대 선조인 이담손(李聃孫)이 조선 연산군 6년(1500)경에 지은 것을 여러차례 보수해 오늘에 이르고 있는데 전라북도 지정문화재 민속자료 12호로 지정되어 있다. 이담손(1490년생)은 태종의 둘째 아들인 효령대군의 증손으로 전주 이씨로서는 둔덕리에 제일 처음 들어온 마을의 향조(鄕祖)라고.


경사면을 축대로 쌓은 장방형의 대지에 동남쪽을 향하여 자리한 이 집은 안채, 사랑채, 대문채가 위치하고 있는 가옥으로 조선후기의 양식적 특징을 보여주며 조선시대 이 지방 사대부의 주거생활의 면모를 잘 간직하고 있는 곳이라 한다.

안채는 정면 5칸, 측면 1칸으로 좌우 앞쪽으로 행랑(行廊)을 덧대어 전체적으로 ㄷ자를 이루고 있다. 사랑채는 정면 3칸, 측면 1칸의 일자형 건물로 고종 원년(1864)에 상량(上樑)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대문채는 5칸규모로 솟을대문에는 '유명조선(有名朝鮮) 효자(孝子) 증(贈) 통정대부이조참의(贈通政大夫吏曹參議) 이문주(李文胄) 지(之) 려(閭)'라고 적힌 효자정문(孝子旌門)의 현판이 걸려있다.




이웅재 고가의 안채
이웅재 고가의 사랑채.




솟을대문에 걸려 있는 고종 7년(1870) 이문주에게 내린 효자정문 현판.




전주에서 남원으로, 다시 임실로. 그렇게 마무리된 전주행 첫걸음의 당일여정은 친구들과 임실치즈 피자를 저녁으로 먹으며 마무리되었다.




서울로 올라가던 중 서해안 고속도로를 타다 잠시 들러 마주했던 대천의 겨울 밤바다, 달빛 아래 부서지던 하얀 파도가 인상깊었는데 야경촬영에 익숙치 못한 내 셔터누름은 밤하늘에 걸렸던 하얀 달빛이 저런 묘한 꼬리로 찍혔다.


살아있는 사람들한테는 누구에게나 혼불이 있다고 합니다. '혼불'이란 '정신의 불' '목숨의 불', '감성의 불' 또는 사람을 가장 사람답게 하는 정령의 불을 가리키는 말이지요. - 강연록 「나의 魂, 나의 문학」중에서 






최명희에 대해 알게 된건 1997년 여름, '작가 최명희와 혼불을 사랑하는 사람들 모임'의 출범식에 관한 신문 기사를 통해서였다. 17년 동안 한 작품에 매달리며 혼불이라는 대하소설을 집필해왔다는 그녀가 생활고와 암투병에 시달리며 힘겨운 생의 걸음을 걷고 있는 것을 돕기 위해 각계 인사들과 70여 명이 발벗고 나섰다는 기사였다. 한 작가나 작품을 격려하는 모임이라는 것도 드문 일이었고, 문단의 동료들과 문화 예술인들은 물론, 정치 경제 학계 언론계 등 그이의 후원자로 나선 각계의 명망있는 이들이 모두 '혼불'을 읽고 매료된 사람들이었다는 얘기도 주목할만한 일이었지만, 무엇보다 내게 놀라움으로 다가왔던 것은 17년간 한 작품에 몰두하여 혼신을 다하고 있는 최명희라는 작가, 그리고 한국인의 혼과 우리말의 아름다움을 극한까지 보여주었다는 평가를 받는 대하 예술소설이라는 혼불이라는 작품의 존재였다.

혼불은 제1부의 동아일보 연재 후 제2부에서 5부까지 월간지 신동아의 연재를 마치고 전 10권이 출간된 상태였다. 과연 그 소설의 면면이 궁금했지만 읽어봐야 겠다는 생각은 결국 몸으로 옮기지 못하고 내 마음에만 머물었던 모양이다. 출범식 기사의 말미, 건강악화에도 서울과 전주를 오가며 6부 집필을 위한 구상과 준비 작업 중이라던 작가의 근황은 일년 후 겨울, 1998년 12월 11일 난소암이라는 병마로 결국 세상과 작별했다는 그녀의 유고 소식을 전하는 신문기사로 마주하게 되었다. 근대사에서 현대사로 이어가며 혼불의 집필을 계속 이어가기 위해 노력하려던 작가의 열망은 병마에 꺾여 결국    혼불을 미완의 작품으로 남겨두었다.

한문장 한문장마다 혼신의 힘을 기울여 마치 '손가락으로 바위를 뚫어 글씨를 새기는 것만 같다'며 글쓰기의 힘겨움을 호소했다던 작가. 오래 전 찍어두었던 사진을 열어보며 여행길을 정리하면서 혼불 1권을 서가에서 다시 꺼내들었다. 책구입 날짜를 연필로 적어둔 내지의 메모엔 1998. 12. 27. 그이의 사후에야 뒤늦게 사들게 된 책이었는데 그로부터 꼭 5년만인 2003년 12월 27일 전주로 걸음해보게 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우연히 혼불의 흔적을 마주하게 된 그날의 전주 여행길이 어쩌면 내가 그녀와 맺게된 인연이라면 인연인 여행길은 아니었을까.싶다.


 "단언컨데 언어를 이토록 내밀하고 감미롭고 영롱하게 구사한 작가는 일찍이 동서고금에서 찾아볼 수 없다... 최명희는 언어를 정신의 지문이라고 했고, 혼불을 통해 순결한 모국어를 재생시키고 싶다고 했다. 그의 노력이 그대로 담겨있는 혼불의 언어성에 강철심장을 가진 독자라도 감동받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 서지문




최명희 혼불 문학공원의 겨울. 사진 출처 : 오마이뉴스 http://bit.ly/18j1Vl







최명희가 태어난 전주의 생가터 부근엔 최명희문학관이, 소설 '혼불'의 배경지인 남원엔 혼불문학관이 자리하고 있다.






지금은 혼불문학관이 들어서면서 혼불마을로 이름붙여진 노봉마을의 최씨 종가집 안채는 아쉽게도 2007년 7월 화재로 소실되어 지금은 터만 남아 있다고 한다. 종가집을 지켜온 폄재공 최온의 12대 종부 박 할머니도 회마에 휩싸여 유명을 달리하고 말았다. 소설 속 며느리 효원 아씨의 모델이 되었던 박할머니는 먼 친척이었던 작가 최명희에게 집안 내력과 듣고 겪은 일들을 구술해 주었다고.

18세 때 시집와 6·25때 남편을 잃은 뒤 시어머니를 모시면서 엄격하게 6남매를 길렀던 종가의 마님으로서 항상 단아한 기품을 잃지 않았다는 박할머니는 매일 새벽에 일어나 머리를 깔끔히 빗어넘긴 뒤 앞치마를 두르고 부엌문을 여는 일로 하루를 시작했고, 고령으로 주로 방안에서 생활하게 된 뒤에도 손님이 오면 옷매무새부터 가다듬었다고 한다.

(출처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07/05/16/2007051600055.html)



2012.12.25 travelr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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