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억이 방울방울.
"엄마, 오늘은 친구들과 하루 종일 놀아야겠어. 날 말리지 말아 줘."
"뭘 하고 하루 종일 놀려고?"
" 시내에 나가서 올리브영에서 새로 나온 화장품도 사고, 다이소에서 예쁜 문구도 사고, 옷가게도 둘러보고, 마라탕도 먹어주고...
그리고 다시 동네에 와서 미천탕에서 목욕을 하고 올 거야."
"그랴. 부지런히, 열심히 놀다 와."
서귀포 시골마을. 여유롭지만 어쩔 수 없이 부족한 부분이 많다.
작은 아파트에 살다 보니 욕실에 욕조가 없다.
한 번씩 욕조 안에 뜨끈뜨끈한 물을 넘치도록 담은 후 찌뿌둥한 몸뚱이를 넣고 부드러운 거품을 가득 만들어 때를 불리고 시원하게 빡빡 묵은 각질을 벗겨내는 일.
피부과 의사들은 절대 하면 안 되는 무식한 행동이라고 하지만 어릴 때부터 벗겨 내던 각질은 때가 되면 나 좀 벗겨내 달라고 아우성이다.
우리 동네에는 외관으로 봤을 때 아주 오래된 목욕탕이 하나 있다. 얼마나 되었을까? 20년쯤 아님 30년쯤 되었을까?
1층은 동네 구멍가게가 있고, 2층에 여탕이, 3층에 남탕이 있는 건물인데 목욕탕 이용료는 6,500원이다. 슬리퍼 질질 끌고 편하게 찾아가서 빡빡 때 밀고 오고 싶은 거리와 가격.
사실 동네 목욕탕은 아는 얼굴을 만나는 민망한 상황이 생길 듯하여 용기를 내지 못하지만 이곳 미천탕은 동네할머니들만 이용할 것 같은 세월의 무게를 느낄 수 있는 곳으로 그런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될 것 같았다. 젊은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 같은 느낌적인 느낌!
오래되었지만 나름 깨끗하게 관리가 되고 있다는 후기를 보고 딸과 함께 어느 비 오는 오후 처음으로 미천탕에 발을 들여놓았다.
역시나 목욕탕 안은 아무도 이용객이 없었고 딸과 나뿐인 목욕탕이라 마음 편하게 이용할 수 있었다.
오래되어 색이 바랜 누른색 샤워기, 소박한 온수탕과 두세 명이 들어가면 가득 차는 작은 사우나. 중간에 할머니 한 분이 들어와서 딸기 요거트를 나누어 주셨다.
이런 걸 목욕탕 안에서 먹어도 되는지 망설이고 있으니 "괜찮아. 괜찮아. 내가 오랜만에 와서 기념으로 쏘는 거야." 하시고는 주인 할머니에게 가서 숟가락을 받아 오셨다. 주인 할머니가 숟가락을 건네는 걸 확인한 후 우선 목욕탕 안에서 먹었다고 혼날 일은 없을 듯하여 딸과 온수탕에서 나와 플라스틱 의자에 앉아 요거트를 먹었다. 그날 후 가끔씩 사람들이 없겠다 싶은 시간에 찾게 되는 우리 동네 목욕탕 미천탕.
보통 할머니들만 한두 명 앉아 계시고 알아들을 수 없는 제주사투리로 말을 걸어오실 때도 있지만 못 알아듣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배시시 웃으며 때를 밀다 오면 되었다. 그렇게 다니기 시작한 목욕탕을 어느 날부터 딸이 친구들과 놀이터 삼아 다니고 있었다.
"엄마 오늘은 때를 좀 밀어야겠어. 친구랑 목욕탕 갔다 올게."
"무슨 때를 밀겠냐? 냉탕, 온탕 왔다 갔다 하다가 목욕탕 안으로 밖으로 왔다 갔다 깔깔거리며 놀다 오겠지." 그런데 알고 보니 딸아이의 친구집이 주택이라 겨울철에 욕실이 너무 추워 한 달 치를 선불로 결제해 두고 이용하는 그곳은 친구에게 자기 집 욕실처럼 익숙한 곳이었다. 운동장에서 뛰어놀고 난 날이면 친구들과 향하는 동네목욕탕.
" 엄마 오늘은 목욕탕에 갔더니 할머니가 요구르트를 사 주셨어."
" 엄마 오늘은 할머니가 냉탕에서 수영하는 법을 가르쳐 준다고 수영을 해보라고 했어."
" 엄마 오늘은 목욕탕에서 할머니들이 싸웠어. 사우나가 좁은데 어떤 할머니가 누워 있어서 눕지 말라고 싸웠어."
초딩여자아이들의 놀이터가 된 목욕탕에서 아이들의 추억이 쌓여가고 할머니들과의 우정이 쌓여간다.
시골에 살아서 만들 수 있는 추억이 아닐까?
서귀포 조용한 시골마을.
부족한 것 많지만 도시에서 만들 수 없는 풍요로운 추억이 쌓여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