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가 말이야, 예전엔 인기 많았어!”
지극히 평범하고 친구도 많아 보이지 않는 데다가, 날마다의 날들에 이렇다 할 변화가 보이지 않는 내가, 원래부터 이런 모습이었다고 생각하는 걸까. 늦은 결혼으로 젊지 않은 엄마를 둔 고등학교 1학년 딸아이는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다. 나도 너만 할 때가 있었으며 흰머리 하나 없이 팽팽했던, 반짝였던 날들이 있었다는 것을 짐작하지 못하는 눈치다.
매우 특별해야 반짝이는 건 아니니까. 조금 특별해도, 설령 특별하지 않더라도 빛나는 순간이 있으니까.
누구나 다.
“엄마 뒤로 줄을 섰다니까!”
부연 설명을 했음에도 여전히 인정할 수 없다는 표정을 한 채, “응”이라는 짧고 무미건조한 대답을 했다. ‘응?’ 도대체 이 대답의 의미가 무엇인지 알 수 없었다. 인정도 아니고, 그렇다고 부정도 아닌, 그냥 얼른 화제를 넘기고 싶은 제스처로 보였다. 하지만 내가 인기 많았다는 것은 참이다.
보통의 외모에 특별히 공부를 잘 하지도 않았던 내가 왜 인기 많았는지는 나도 모르는 일이나, 친구들의 표현에 따르면 그때 나는 주류에 속했다. 초등학교 5, 6학년 때의 일이다. 교문을 들어서면서부터 친구들이 우르르 몰려와 교실에 들어가 자리에 앉기까지 거의 날마다 이벤트가 있었다. 수업 시간이라고 가만히 있었을까. 선생님은 그런 내 모습을 보시고 미소 지으셨다.
방학이라고 다르지 않아 여름방학이면 날마다 수영장에서 입술이 퍼래지도록 놀았고, 내 생일즈음 시작된 겨울방학은 그야말로 축제였다. 반 친구들 서른 명 정도 초대해서 수건돌리기를 하고, 접시 가득 귤을 쌓아놓고 많이 먹기 대회를 여는 등 화려하지 않아도 우리만의 축제를 즐겼다. 놀이라고 해봤자 술래잡기, 말뚝박기, 공기놀이, 고무줄놀이가 전부였지만, 그땐 그것으로 충분했다.
교실에서는 한 달에 한 번씩 짝을 바꿨는데 그 방식이 참 재미있었다. 준비된 두 개의 통에 두 번 접힌 종이가 각각 30개쯤 담겨있고, ‘캔디’를 뽑은 여자아이와 ‘안소니나 테리우스’를 뽑은 남자아이가, ‘쥬디’를 뽑은 여자아이와 ‘키다리아저씨’를 뽑은 남자아이가 짝꿍이 되는 식이었다. 졸업을 한 달 앞둔 어느 날, 그러니까 초등학교의 마지막 짝꿍 바꾸기가 있던 날이 되겠다. 마지막 짝만큼은 제비뽑기 대신 앉고 싶은 여자아이 뒤에 가서 서게 하신 선생님. 누군가 선생님께 졸랐다고 했던 거 같은데 정확하지는 않다.
그날 내 뒤로 줄을 선 남자아이들이 모두 아홉 명이었다. 이 풍경은 선생님께서 나를 볼 때마다 꺼내 주시던 이야기다. 덕분에 딸아이에게 뽐내기용으로도 안성맞춤이라 가끔 들춰보고 있다. 이후로는 주류의 반열에 들어가지 못했더라도 보석 같은 기억들이 속속 박혀있는 중·고등학교 시절을 보냈다. 고무줄놀이로 한 달 동안 반성문까지 썼더라도, 비록 목표로 삼은 대학에 입학하지 못했더라도 예쁜 시절이었다. 모두 다 형광펜으로 밑줄을 긋고 별 다섯 개를 줄 만큼.
대학 시절의 난 ‘게임의 여왕’으로 불리기도 했는데 어릴 적 수건돌리기의 연장선이었나 싶게 나는 게임을 무척 좋아했다. 말 한마디 없이 눈빛으로 진행되는 ‘공공칠빵’이나, 리듬감이 생명인 ‘369’ 게임까지, 그때 유행하던 놀이는 모조리 내 손안에 있었다. 게임도 게임이지만 벌칙으로 한 ‘인디언 밥’이 나는 그렇게 재밌을 수가 없었다.
대학 졸업 후 직장생활도 다르지 않았다. 너무너무 재밌었으니까.
서울을 벗어나 대기질이 좋은 곳에서 살고 싶었던 때, 대전 엑스포 과학공원에서 공채 1기를 모집한다는 신문광고를 보게 되었고, 서류와 면접 심사를 거쳐 ‘94년 4월 1일 자로 입사한 나는, 낯선 곳에서의 생활을 시작했다.
‘93 대전 엑스포’가 끝나고 ‘과학공원’으로 재개장을 하기 위해 각지에서 사람들이 모였다. 공원연출 부서에 배정된 나는 16만 평의 공원을 수시로 드나들어야 했는데, 걸어서 다니는 것에 한계를 느낄 무렵, 자전거 타는 법을 배우기로 했다. 브레이크를 잡으면 앞으로 고꾸라질 것만 같은 불안감으로 여간 무서운 게 아니었지만, 주말 내내 연습한 덕분에 어느 정도는 탈 수 있을 정도가 되었다. 부서원들이 보기엔 자전거를 탈 줄 모르던 내가 하루아침에 자전거를 탈 줄 아는 사람이 되었으니 모두 놀랐는데, 유독 감탄하시는 과장님께 ‘자전거를 탈 줄 모르시냐’며 우쭐대기도 했다.
그때 알게 된 사실 하나, 남자들은 대부분 자전거를 탈 줄 안다는 것이다.
자전거를 탈 줄 알게 되자 16만 평의 공원을 더 번질나게 드나들었다. 그때 딱 한 번 작은 사고가 일어났다. 개장 전이라 전시관 앞엔 바리케이드 삼아 줄을 쳐 놓았는데, 자전거를 타고 신나게 내려오다가 줄이 턱에 걸려 줄무늬 화상을 입게 되었다. 점점 더 선명해지는 줄 자국은 많은 사람에게 걱정과 웃음을 함께 주었다. 무슨 자신감에 마스크조차 쓰지 않고 다녔는지…….
밤샘 작업도 마다하지 않았고, 일 잘한다는 소리를 들었다. TF Team에 들어가 프로젝트를 수행하며 800명이 넘었던 직원 중 대표이사의 표창을 받기도 했는데, 모두 ‘좋아서 했던 일’이기 때문에 가능했다. 그러고 보니 남자 직원들이 대부분이었던 부서에서 한 인기 투표에서 1위를 차지하기도 했었다. 아마도 그 시절 내 어깨 위엔 반짝이는 햇살이 내려앉았던 게 아니었을까. 그리고 나로서 충분히 존재했던 사람이었기에 빛났던 게 아니었을까.
나는 안다. 누구나 어느 순간엔 반드시 그렇게 빛난다는 것을. 그리고 그 순간들을 가능하게 한 배경에는 나를 지켜주고 응원해 준 사람들이 있었다는 것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