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의식의 공간, 인연의 씨앗

나의 내면에 있는 것이 바깥에서도 더 잘보인다

by 하늘미소 함옥녀

무의식의 공간, 인연의 씨앗


언젠가 거닐었던 듯한 낯익은 길, 어디선가 본듯한 친밀한 얼굴... 처음 와본 길이고 처음 만난 사람이지만 이 낯설지 않는 익숙함은 우리의 무의식 어느 공간에 뿌려진 씨앗일까요?


때로는 강렬한 끌림으로, 혹은 이유 모를 거부감에... 왜 이런 감정이 드는지, 왜 이 만남이 내게 찾아왔는지 의문이 들기도 합니다.


『대승기신론』에는 "우리에게 필요하지 않은 인연은 오지 않는다."라는 가르침이 있습니다. 이는 우리 삶에 찾아오는 모든 인연들(사람, 사건, 관계 등)은, 우리의 마음가짐과 쌓아온 업(業)에 따라 적절한 인연이 우리에게 다가온, 끌어당긴 결과이며, 이 모든 경험들이 저마다 특정한 의미와 소중한 배움, 그리고 궁극적인 성장을 위한 깊은 뜻을 품고 우리에게 다가온다는 뜻이겠지요.


우리가 보고, 듣고, 느끼는 모든 순간은 우리 마음의 깊은 저장고, 즉 '제8식' 혹은 '저장식'이라 불리는 곳에 고스란히 쌓여간다고 합니다. 우리가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도, 우리의 감각기관이 외부 대상과 접촉하며 일어나는 미세한 느낌들, 그리고 그 느낌들이 형성하는 생각과 마음의 작용이 모두 이 깊은 무의식의 영역에 '씨앗'처럼 소중히 저장되는 것이죠.


서광 스님의 『치유하는 유식 읽기』 강의에서는 이 '저장식'의 특징을 '무의식'이라 설명합니다. 전생과 현생을 통해 우리가 경험한 모든 것들이 끊임없이 흘러들어 저장되어 있다가, 특정한 인연과 조건이 맞아떨어지면 불현듯 수면 위로 솟아올라 우리의 생각과 감정, 행동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는 것입니다. 하나의 씨앗(因)이 싹을 틔울 적절한 환경(緣)을 만나 꽃을 피우는 과정과도 같달까요.


무언가에 유난히 마음이 끌리거나, 혹은 이유 없이 신경이 쓰이는 것들... 그때가 우리 내면의 '저장식'을 깊이 들여다볼 수 있는 절호의 기회라고 합니다.


우리가 고귀한 불상이나 드넓은 밤하늘의 별들을 바라보며 깊은 경외감과 성스러움을 느끼는 것은, 실은 우리 내면에 이미 그러한 숭고함의 씨앗이 깃들어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결국 우리 내면에 간작되어 있는 것이 외부 세계를 통해 비로소 그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니, 우리가 지닌 마음의 깊이만큼 볼 수 있는 것이겠지요.


어떤 사람이나 상황을 유난히 싫어하고 미워하는 마음이 일어날 때, 사실 그 감정은 우리 내면 깊숙이 자리한, 우리가 인정하고 싶지 않거나 아직 해결되지 않은 '싫음'이라는 씨앗이 건드려지는 순간일 수 있습니다. 물론, 때로는 상대의 에너지가 너무나 강렬하여 일방적으로 영향을 받는 경우도 있다고 해요. 특히 사랑을 충분히 받지 못했거나, 내면에 해결되지 못한 결핍이 많으면 많을수록 자신도 모르게 부정적인 면에 더 강하게 끌리거나 반응하게 될 수 있다고 합니다.


우리는 '저장식' 그 자체를 직접적으로 알 수는 없지만, 우리 안에 피어나는 다양한 정서와 감정을 통해 어느 영역이 미해결된 채 자리하고 있는지를 짐작해 볼 수 있습니다. 유난히 화가 치밀어 오르는 일과, 이상하게 마음이 끌리는 일은 놀랍게도 서로 깊이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만약 우리 안에 억압되거나 부딪히는 부분이 없다면, 우리는 그저 세상을 편안하게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고 객관적으로 인식할 뿐, 감정적인 소용돌이에 휘말리지 않게 되겠지요.



"어떤 사람이 주는 것 없이 밉고 싫어진다면, 그 마음이 일어나는 내면을 살펴보는 것이 중요합니다. 상대방의 어떤 모습이나 태도 방식들은 우리 자신이 인정하고 싶지 않은 우리의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결국, 우리를 불편하게 하는 사람도, 깊이 마음이 끌리는 상황도 모두 우리 내면을 비추는 거울이었던 셈이지요. 외면하고 싶었던 불편한 감정들이 외부에서 온 것이 아니라, 우리 안의 미해결된 기억에서 시작된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잊힌 기억의 강물이 '인연'을 만나 다시 흐르기 시작할 때, 그 깊은 기억을 품고 가는 우리의 걸음걸음이 오늘은 조금 더 평화롭고 따뜻했으면 좋겠습니다.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고, 조금은 더 자유롭고 단단해졌으면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