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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산책 Mar 21. 2024

누군가의 나이를 넘어설 때 (1)

조신한 윤리가 보여준 사후 세계

고등학교 때 조신한 윤리 선생님이 있었다. 그는 이름도 외양도 말투도 행동도 다 조신했다. 심지어 선배들로부터 구전으로 전해지는 그에 관한 몇몇 에피소드까지, 아무튼 그를 에워싸고 있는 모든 것이 다 조신했다. 그러니 이제부터 그를 ‘조신한 윤리’라고 부르기로 하자.


조신한 윤리는 초식동물을 연상시키는 맑고 큰 눈과 파리하게 수염 자국이 보이는 하얗고 투명한 피부, 웃을 때 한쪽만 장난스레 드러나는 덧니를 갖고 있었다. 그때 우리들은 선생님 뒤에서 험담을 하기도 하고 앞에서 장난을 치기도 했는데, 조신한 윤리에게는 둘 다 쉽지 않았다. 그는 당시 나의 눈높이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은 전체적으로 아담한 체구를 갖고 있었고 한여름을 제외하고는 항상 말끔한 감색 정장에 중학교 입학할 때 계속 성장할 것을 염두에 두고 한두 치수 크게 맞춘듯한 재킷을 헐렁하게 입고 다녔다. 선생님들은 학생들에게 반말로 수업을 하는 부류와 깍듯하게 존댓말로 수업을 하는 부류로 나뉘었는데 조신한 윤리는 명백히 후자였다. 수업 때는 습니다체를 썼고, 개별 진로 상담을 할 때조차, “그런 고민이 있단 말이지(눈을 살포시 내리 깔며 혼잣말), (사슴 같은 눈망울을 반짝이며)그럼 이렇게 생각해 보면 어떨까?”라며 조심스레 말을 건넸다. 그의 모든 것이 우리에게 어울리지 않게 마치 다른 세상 사람처럼 조신했기 때문에, 그의 험담을 하는 것도, 그에게 섣불리 장난을 치는 것도 쉽지 않았다.


게다가 그의 수업은, 달리 표현한 말이 없이, 지루했다. 윤리라는 과목의 특성 때문인지 그의 교수법은 교과서를 한 문단씩 학생들에게 차례대로 읽게 시키고 때때로 요약한 내용을 칠판에 판서하는 것이 대부분이었다. 수업을 듣지 않고 교과서만 외워도 시험 보는데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나로 말할 것 같으면 수업 시간에 선생님들의 두 눈을 응시하며 집중해서 듣는 학생이었다. 수업 시간에 눈에 띄지 않고 자연스럽게 딴짓을 하는 건 내게 너무도 어려운 스킬이었고 딱히 할 것도 없었기 때문에 마치 교단이 연극무대인 양, 선생님들이 수업 내용을 설명하는 역할을 맡은 배우인 양 그 안에서 흥미로운 포인트들을 찾아내어 집중했다. 그런 나조차도 조신한 윤리 수업에선 가끔 꾸벅꾸벅 졸곤 했다.  


그날도 혼곤한 잠에 빠져들랑 말랑한 수업이 이어졌다. 어떤 내용을 설명하고 있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지만, 조신한 윤리가 예의 그 청정하고 무해한 눈망울을 유독 반짝이며 이렇게 말하는 바람에 나는 잠의 세계에서 사각 교실의 세계로 다시 돌아왔다.


“여러분은 사후 세계를 믿나요? 저는 믿습니다. 그리고 저는 사후 세계를 알고 있어요.”


이 무슨 지나가는 행인에게 길을 알려주려다가 있는 돈 없는 돈 다 털어서 알지도 못하는 제사를 지낼 법한 소리인가.


그렇게 생각한 것이 나뿐만이 아니었던지 여기저기에서 믿지 못하는 듯이 구시렁거리며 되묻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그 소리에 조신한 윤리의 덧니가 살짝 올라간 입꼬리 사이로 반짝였다. 마치 흥미진진한 이야기를 그렇게 쉽게 해 줄 수 없다는 듯 이렇게 덧붙이기까지 했다.


“여러분 모두 사후 세계를 믿지 않고 있군요. 그래서 제가 지금 사후 세계에 대해 알려주려 합니다.”


그때까지 내가 기억하는 모든 수업을 통틀어 가장 긴장되는 순간이었다. 잠들지 않은 몇몇 학생들의 그런 긴장감을 느꼈는지 조신한 윤리는 마지막의 마지막 순간에야 비밀을 꺼내놓으려는 친구처럼 시간을 끌었다.


“제가 진지하게 사유하여 발견한 사후 세계예요. 그러니까 여러분은 바로 지금 이 순간 그 비밀을 알게 되는 겁니다.”


나는 칠판의 양 끝을 왔다 갔다 하는 그를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머릿속으로는 온갖 의심과 대답을 생각해 보면서도 그의 입에서 어떤 말이 흘러나올지 궁금했다.


”자, 제가 지금 여기에서 죽는다고 생각해 봅시다. 그럼 여러분의 세계는 어떻게 될까요? “


(일동) ’???‘


“여러분의 세계를 포함해, 제가 없는 이 세계는 계속 이어지겠죠? 여러분들은 아침에 일어나 밥을 먹고 씻고 학교에 오고, 저를 제외한 다른 사람들, 세계의 모든 만물들은 그전처럼 계속 이어질 것입니다. 그러니 지금 여기가 사후 세계입니다.”


일부 학생들의 진지한 호기심의 시선을 이끌어낸 것이 즐거웠는지 해맑게 웃는 조신한 윤리의 표정을 보며 한순간 속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 이 순간 다시 그 수업을 돌이켜 보아도 그가 학생들의 잠을 깨우기 위해 장난을 쳤다는 생각도 든다. 하지만 당시의 나는 속았다는 생각은 잠시 뿐, ‘매우 심오한데?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군.’이라며 나름 진지하게 받아들였다. 그러니 십 년이 훌쩍 지난 지금까지 그 순간을 기억하고 있는 것이리라.


이제부터 내가 할 이야기는 바로 조신한 윤리가 말한 사후 세계에 대한 것들이다. 누군가가 죽고 난 후의 세계. 그 누군가는 나와 개인적으로 알고 지낸 사람들이 아니라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진 유명인이고, 나에게는 한 때 열렬하게 탐구했던 이들이다. 그들에게 맹렬하게 빠져 있었을 때, 나는 그들보다 어린 나이였고, 이미 그들이 죽은 다음이었다. 그리고 지금은 그들이 죽었을 때의 나이를 넘어서서 살아가고 있다. 나의 과거는 그들과 어떻게든 연결되어 있다. 그때 그들의 나이를 넘어선 지금, 내가 그들이 죽었을 때와 같은 나이에 어떠했는지 돌아보는 이야기가 될 것이다.


그러니까 조신한 윤리가 말한 사후 세계, 다시 말해 누군가가 사라진 이후의 세계에 대한 이야기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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