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라카미 하루키 자전적 에세이 <직업으로서의 소설가> 리뷰
이 책에서 하루키가 스스로에 대해 밝힌 모든 이야기가 놀라웠다. 내가 ‘무라카미 하루키’라는 소설가를 오해하고 있었다는 걸 깨닫게 해 준 이야기들이었으니까. 그건 오해라기보다 억측이고 게으르고 섣부른 판단, 선입관에 가까울지 모르겠다. 그가 쓴 픽션이라는 형태의 텍스트만 보고 그 뒤에 있는 소설가라는 인간을 내 멋대로 규정지어 버렸으니까. 돌이켜 생각해 보면 어떤 합당한 근거도 없이.
물론 무라카미 하루키가 말하듯이 소설은 이야기 이고 그 이야기를 독자 나름대로 해석하고 즐길 권리가 있다.(*본문 인용 1) 그건 곧 텍스트를 창조한 작가의 기쁨이기도 하다. 하지만 나는 나도 모르게 텍스트에 대한 해석을 그걸 쓴 작가에게 덧입혀 확대 해석하고 그게 마치 당연한 것처럼 한치의 의심도 없이 단정 지어 버렸다.
지금까지 나는 무라카미 하루키를 <상실의 시대(노르웨이의 숲)>에 나오는 와타나베와 동일시하고 있었다. 이건 좀 더 설명할 필요가 있다. 1인칭 주인공 화자가 등장하는 소설이고, 설령 그게 자전적 소설이라는 것을 알고 읽는다 하더라도 웬만해서는 작가와 소설 주인공을 완전히 동일인물이라고 생각하진 않는다. 자전적 체험이 바탕이 되었더라도 어느 정도는 허구가 가미되어 있다는 것을 작가도 알고 독자인 나도 아는 상태에서 텍스트를 읽는 것이다.
그러나, 이 책을 읽기 전까지 나에게 와타나베는 곧 하루키였다. 하루키는 곧 와타나베였다.
왜였을까?
그건 아마도 내가 <상실의 시대>를 처음 읽은 게, 지금 생각하면 너무 어린 나이였고, 그래서 그 소설이 나에게 준 충격이 너무 컸던 탓일지 모른다. 지금은 <노르웨이의 숲>이라고 번역되어 출판되고 있는 소설을 내가 처음 접했을 때는 <상실의 시대>라는 제목이었고, 나는 열다섯 살이었다. 아마도 그때까지 내가 읽었던 책 중에서 가장 두꺼운 책이었을 것이다.
읽으면서 읽고 나서 매우 큰 충격과 혼란에 빠졌다. 그때 나에게 충격과 혼란을 가져온 것은 적나라한 성애 묘사도, 동성애적 코드도 아닌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르는 인물이 이야기의 주인공”이라는 점이었다. 그때까지 내가 접해 온 이야기 속 주인공들은 자신의 욕망이 분명하거나 거대한 운명의 수레바퀴 안에서 그 운명을 짊어지고 어떤 길로 나아갈 수밖에 없는 당위성을 갖고 있었다. 와타나베는 그렇지 않았다. 무슨 일이 있어도 얻고자 하는 욕망도 딱히 없고, 대항해야 하는 적도 없는 상태에서 어찌 보면 무기력해 보이는 일상을 부유하고 헤매다 결국 마지막에는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 모른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누군가를 부르며 끝이 난다.
‘이게 뭐지?’
책의 마지막까지 다 읽은 나는 주인공과 함께 어딘가를 헤매고 있었다. 책을 덮어도 막막하게 길을 잃은 것 같은 감각은 쉽사리 떨어져 나가지 않았다. 나는 중2였던 것이다.
책의 앞날개를 펼쳤다. 거기엔 카메라가 아닌 어딘가를 부루퉁한 얼굴로 삐딱하게 쳐다보고 있는 작가의 얼굴이 있었다.
‘와타나베구나.’
그건 한참 젊은 시설의 무라카미 하루키였다. 거기에 그가 몇 년 생이고 지금 몇 살인지 하는 정보는 없었다. 물론 주의 깊게 봤다면 그 책의 한국어 초판이 1989년에 나왔다는 것, 그때 당시 20대 청년이었다고 해도 지금은 더 나이가 들었을 거라고 추론할 수 있었겠지만, 그때 나는 그렇게 치밀하거나 작가의 정보를 따로 찾아볼 만큼 열성적이지 않았다. 그냥 ‘자기 이야기네’ 했을 뿐이다. 그렇게 무라카미 하루키는 내게 젊은 작가이자 상실의 시대 속 와타나베가 되었다. 그건 곧 삶의 명확한 목적도 없고 딱히 의미를 찾지도 않고 당장의 취향을 충족시키며 적당히 살아가다가 길을 잃고 헤매는 무색무취의,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특정 사람들의 흥미를 유발하는 약간의 별종 같은 인간, 이란 뜻이었다.
물론 무라카미 하루키 자신의 성격이 어느 정도 투영된 인물이 와타나베 일 수 있다. 하지만 그렇더라도 인간은 다양한 면을 갖고 있다. 작가의 어떤 부분만이 드러난 인물일 수 있다는 걸, 그때는 그리고 한동안 생각하지 않았다.
편견이란 건 무서운 것이다. “하루키 = 와타나베”라는 공식이 성립된 이후로 작가에 대한 어떤 에피소드나 기사를 봐도 ‘응, 하루키스럽네’하고 받아들였다. 심지어 그 이후 나온 소설의 인물 중에서도 와타나베에 가까운 특성만 포착하여 ‘이건 작가 자기 성향이 반영된 인물이네’하고 범주화하고 넘어갔다. 그렇게 하루키에 대한 나의 인상은 한쪽으로만 굳어갔다.
“무라카미 하루키 자전적 에세이”라는 부제가 붙은 <직업으로서의 소설가>라는 책은 작가의 한국에서의 인기를 반영하듯 기사화되고 네티즌 리뷰가 달리고, 카드 뉴스로 주요 내용이 제작되고, 유튜브 영상으로도 만들어졌다. 그래서 얼마간의 내용은 이미 알고 있었다. 매일 정해진 분량의 글을 쓴다는 것, 글을 쓰기 위해 매일 달리기를 하며 신체를 단련한다는 것 등. 하지만 그런 내용도 내가 갖고 있는 하루키에 대한 이미지를 깨진 않았다. 이 책을 직접 읽기 전까지는.
이 책에는 하루키는 소설가라는 직업에 대한 개인적인 경험, 생각을 이야기하고 있다. 지극히 개인적인 이야기이기 때문에 다른 소설가들은 전혀 다를 수 있다는 점을 분명히 하고 있다. 자연스럽게 자연인 하루키의 모습도 언뜻언뜻 비치지만 기본적으로 소설가로서의 생활, 지금까지 걸어온 길, 소신 등을 밝히고 있다. 무엇보다 하루키 스스로 말하는 자신에 대한 이야기를 듣는다는 것이 나로서는 매우 흥미로웠다.
하루키가 작가가 되기 전에 재즈바를 운영했다는 것은 익히 알려진 사실이다. 내가 상상한 모습은 이렇다. 재즈도 맥주도 좋아하는 재즈바 주인. 고양이와 느긋하게 시간을 보내고 딱히 매출에 연연하지 않고 좋아하는 재즈를 실컷 들으며 가게를 운영하는 주인장. 애초에 출퇴근에 얽매이는 직장인의 삶은 생각해 보지도 않은 부러운 인생.
실제 하루키가 회상하는 그때의 삶은 이렇다. 직장인의 삶은 애초에 포기하고 좋아하는 재즈를 실컷 듣기 위해 재즈바를 연 것은 맞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많은 빚을 가족, 지인, 은행으로부터 져야 했고, 그 빚을 갚기 위해 대부분의 시간을 육체노동을 견뎌야 하는 하루하루를 보내며 이십 대가 지나갔다. 치열하게 고생하며 삶을 감당해야 했던 시간이었다고.
역시 이상과 현실은 다른 것이다. 내 상상 속 하루키는 유유자적하며 대부분의 시간을 몽상과 취미생활로 채우는 모습이었지만 현실은 빚을 갚기 위해 아등바등 일을 해야만 하는 자영업자였던 것이다.
하루키가 소설가가 되기로 결심한 일화 역시 너무도 유명하다. 스물아홉의 어느 날 야구를 보러 갔다가 머리 위로 날아가는 홈런공을 보며 ‘소설을 쓸 수 있겠다’라고 생각하고 쓴 첫 번째 소설로 신인 문학상을 수상하며 등단. (**본문 인용 2)
이 이야기 역시 너무도 하루키스럽다고 생각했다. 운명 같은 계시를 받고 쓴 첫 소설로 등단이라니. 누군가는 몇 년의 습작 기간을 거치고 여러 번 떨어지고 겨우 등단하는데 첫 소설로 바로 등단이라니.
하지만 이 신화와도 같은 이야기는 그게 다가 아니었다. 분명 그 순간 소설을 쓸 수 있을지 모른다고 생각하고 쓴 첫 소설로 등단을 한 것은 맞지만 그 첫 소설이 시원한 홈런처럼 술술 쓰인 것은 아니었다.
소설을 많이 읽어오긴 했지만 일본 문단에 대한 정보도 어떻게 써야 하는지도 몰랐던 하루키는 ‘아마 이런 거겠지’라는 감에 의존하여 매일 밤 일을 마치고 조금씩 써서 초고를 완성한다. 그런데 그 초고는 스스로 읽어봐도 ‘이런 건 어디다 가도 쓰지 못하겠다’라는 수준이었다. 그래서 만년필과 원고지를 치우고 영문 타자기를 써내 소설의 첫 부분을 영어로 쓰기 시작한다. 일본에서 태어나 몸의 일부처럼 당연한 일본어로 자신의 느낌, 생각을 온전히 표현하기 어렵다는 자각에서였다. 낯선 언어로 이야기를 쓰고 그걸 다시 일본어로 옮겼다. 그러면서 처음과는 전혀 다른 문체, 형식을 발견했다. 직접 몸으로 발견한 새로운 vehicle로 소설을 처음부터 다시 써 내려가기 시작한다. 그렇게 처음 쓴 소설과 줄거리는 같았지만 표현방법과 읽은 느낌은 전혀 다른 소설을 완성했다. 다시 읽어도 분명 구멍이 숭숭 뚫린 것 같은 부족한 점이 많지만 새로운 시도로 새로운 돌파구를 찾았다는 건 하루키에게 큰 자신감을 주었던 것 같다. 그렇게 그는 소설가가 되는 ‘입장권’을 얻었다. 그리고 매우 기뻤다고 한다.
그렇다, 무엇이든 쉽게 얻어지는 건 없다. 그가 첫 소설로 등단한 건 맞지만 그 첫 소설을 쓰는 과정에서 모국어를 비롯해 익숙한 모든 것을 포기할 정도의 각오로 새로운 시도를 해서 나름의 돌파구를 찾아내는 과정을 거쳤다. 그건 분명 소설가로서의 하나의 승부수, 전략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거기에 시간과 노력을 쏟았던 것. 하루키가 다시 보이는 순간이었다.
하루키는 말한다. 누구나 소설이란 걸 쓸 수 있다고. 그렇기 때문에 소설이란 것이 매력적이고 가능성을 갖고 있는 것이라고. 하지만 계속해서 글을 쓰는 소설가가 되는 것은 어떤 자질이 필요하다고. 그 자질은 다름 아닌 “지속력”이라고.
그 지속력을 얻기 위해 하루키는 매일 20매씩 쓴다. 이건 일종의 훈련이다. 매일 20매씩 쓰는 생활을 지속하기 위해 매일 1시간씩 달리며 체력을 기른다. 이것도 훈련이다.
여기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다. 하루키는 자신의 현재 상태, 소설가로서의 스스로의 단계를 다른 누군가의 비평에 의해서가 아니라 스스로 자각하고 그다음 단계로 넘어가기 위한 목표를 스스로 설정했다. 단편에서는 형식적인 면에서 새로운 시도를 하고, 장편에서는 1인칭에서 점차 3인칭으로 바꿔가며 이야기를 복합적이고 중층적으로 풀어내려는 도전을 이어갔다. 다른 누가 당신 소설은 이러이러한 게 한계야,라고 말했기 때문에 그런 시도를 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런 말에는 ‘내가 지금 할 수 있는 건 그게 최선’이라며 넘겼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스스로 자각한 한계에 있어서는 명확하게 다음 지점을 설정하고 새로운 시도를 하는데 거리낌이 없었다. 그렇게 스스로 정한 목표 지점에 하나씩 도달하며 작품을 이어왔던 것. 내적으로 단단한 사람이라는 걸 느끼게 한 대목이다.
이 이야기들을 하며 하루키가 강조하는 것은 시간을 들이고 그 당시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쏟아부어 써냈다는 “실감”이다. 초고를 처음부터 다시 쓰는 한이 있더라도 몇 번이고 고치고, 마음에 들 때까지 내가 아닌 타인이 걸리는 부분이 없을 때까지 구조를 바꾸고 문장을 다듬는 망치질을 반복하고 내가 할 수 있는 시간을 충분히 만족할 때까지 들였을 때 비로소 작품이 완성된다. 그 이후에 작품이 독자에게 받아들여지고 해석되는 것은 독자의 자유이자 권리이고, 작가의 입장에서는 매우 기쁘고 환영할 만한 일이다. 설사 좋지 않은 평가를 받더라도 최선을 다했기 때문에 부끄럽지 않다.
소설가가 가질 수 있는 것은 모든 것을 다 바쳐 완성했다는 “실감” 하나이다. 그 실감이 있기에 완성된 소설을 내놓을 수 있고, 상반된 평가에도 자신을 잃지 않을 수 있고, 다음 소설을 쓸 수 있다.
한 창작자가 “오리지낼리티”를 갖고 있다는 것은 한 작품만으로 평가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오리지낼리티란 물론 그 작품을 보았을 때 느껴지는 독특한 무언가가 있어야 하지만 거기에서 그치지 않고, 시간을 들여 오리지낼리티를 창작자 스스로 발전시키고 그것이 타인에게 받아들여지는 과정을 지나 고전이 된다. 결국 창작자가 할 수 있는 것은 자기만의 오리지낼리티를 고민하며 한 작품 한 작품을 쌓아나가며 그것을 발전시켜 나가는 것이다.
항상 새로운 시도를 하며 작품을 쌓아가는 그 만의 방식이 있었기에 지난 사십 년에 가까운 세월 동안 소설을 써온 한 명의 소설가가 되었다는 것, 시간을 들여 쌓아 온 것의 견고함이 느껴졌다.
이 책에는 소설가로서 하루키를 밝히는 이야기 외에도, 소설에 대한 하루키의 생각들이 매력적으로 곳곳에 펼쳐져 있다.
하루키는 소설은 누구나 쓸 수 있고 폭넓은 표현의 형태이기 때문에 그 자체가 가진 에너지가 있다고 한다. 또한 바꿔 말하면 효율성이 떨어지는 작업이라고 말한다. 이유는 소설은 한마디로 치환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인생을 살면서 마주친 것, 생각한 것, 느낀 것에 대해 언어로 바로 변환하여 간결하게 내놓을 수 있다면 소설이 필요가 없다. 바로 그것을 언어화해서 말하면 된다. 하지만 그럴 수 없기에 “그것은 이를테면 이런 이야기다”라고 이야기를 풀어놓는다. 거기에서 부족하다면 새로운 이를 테면을 반복한다. (***본문 인용 3)
이와 같은 맥락의 말을 어슐러 K. 르 귄은 이렇게 말한다.
모든 소설은 은유이다. (…) 소설에서, 미래란 은유이다.
그렇다면 무엇을 은유하는 것인가?
만약 내가 은유적으로 말하지 않을 수 있다면 나는 이 모든 말을, 이 소설을 쓰지 않았으리라.
(어둠의 왼손, 1976년의 서문, 어슐러 K. 르 귄, 24p)
이것은 곧 우리는 왜 소설이란 것을 읽을까, 하는 질문과도 이어진다. 간접 체험을 통해 인생의 답을 알기 위해서? 부분적으로는 맞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특정 상황에서 어떻게 행동해야 한다는 답은 소설에서는 찾을 수 없다. 그것을 원한다면 명확한 실험과 결과가 포함된 학술서를 읽거나, 행동 지침을 바로 알려주는 자기 계발서를 읽어야 한다.
하지만 분명히 우리는 소설을 읽고 나서도 그와 유사한 무언가를 얻는다. 몇 마디 말로 명확하게 표현할 수는 없지만. 무엇보다 소설은 이야기이다. 소설을 읽는 매 순간이 그 이야기를 경험하는 체험이다. 이야기를 통과하며 삶을 살아가는 것처럼 시간을 보낸다. 그리고 그 끝에서 얻는 것은 경험이 남겨놓는 “무언가”이다. 그 무언가는 이야기 형태로 우리 안에 남고 다른 체험과 섞이면서 다시 해석되고 또 다른 이야기와 겹치면서 새로 해석되는 과정을 반복한다. 명확하게 무엇에 근거하여 판단을 내렸다고 할 수 없을 만큼의 복잡한 연결과 상호작용이 우리 안에서 발생한다. 그 연결의 상호작용을 넓혀가기 위해, 무엇보다 읽는 순간의 즐거움을 경험하기 위해 우리는 소설을 읽는다.
고쳐쓰기에 대해 하루키가 들이는 노력은 실로 눈물겹다. 보통 사람은 한 번 하기도 어려운 작업을 그는 수없이 반복한다. 그리고 말한다. “나는 태생적으로 그런 망치질을 좋아한다”라고. 그렇기에 가능한 지난한 퇴고의 과정을 거친다.
그가 그렇게 고치고 또 고칠 수 있는 이유는, ‘절대적으로 완벽한 것, 좋은 것은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설사 스스로 생각하기에 완벽한 문장이라고 생각하는 부분도, 받아들이는 타인에 의해 뭔가 걸린다는 것이 발견되면 무조건 고친다. 고친 경우 대개는 이전보다 훨씬 좋아졌음을 발견한다. 절대적으로 완벽한 것은 없다, 상대적으로 나은 것이 있을 뿐. 그는 이를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수없이 고치고 다시 보는 시간을 충분히 들인다.
이때 필요한 건 창작자 스스로가 납득할 때까지 고치고 시도할 수 있는 시간이다.
하루키의 경우 특히 장편소설은 청탁을 받거나 마감에 쫓겨 쓰는 일이 없다고 한다. 타인과 약속한 마감이 얽매이다 보면 자신만의 속도로 나아가거나 다시 되돌아갈 수 없다. 하루키는 한 번에 쭉 원하는 방향으로 효율적으로 나아갈 수 있는 스타일이 아니라고 고백한다.(****본문 인용 4) 머릿속에 있는 것을 글이라는 형태로 끄집어내고 그것을 몇 번씩 고쳐가며 완성해 나가야 비로소 자신이 어떤 생각을 갖고 있는지 어떤 사람인지 알 수 있다고. 그렇기 때문에 자신만의 시간이 필요할 수밖에 없다. 이건 마감이 없다는 얘기가 아니라 “자신이 정한 마감”과 “스스로와의 약속”을 엄격하게 지키며 글을 쓴다는 말이다.
이밖에도 이 책에는 자신을 둘러싼 사회에 대해, 지금껏 걸어왔고 걸어갈 길에 대한 하루키의 생각이 가득하다. 거기엔 “나, 나의 생각은 개인적인 것이기에 모두에게 적용되거나 받아들여질 수 없다. 그러나 이것은 가능한 가장 솔직하고 있는 그대로 풀어낸 말이다”라는 생각이 바탕에 깔려 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한 편의 소설을 읽는 것처럼, 이야기를 통과하는 것처럼 그가 살아온 삶과 생각을 받아들일 수 있다.
다들 그렇지 않은가? “이게 절대적인 진리야. 이게 맞아.”라는 전제가 깔린 말을 들으면 본능적인 거부감을 느낀다. ‘꼰대네.’하고 돌아설 뿐이다.
어쩌면 하루키의 소설을 읽는 건 그런 이유에서 일지 모른다. 일방적인 강요가 없이 어떤 상황, 어떤 인물, 어떤 대화를 그대로 보여준다는 것. 그럼 우리는 그걸 보고 들으며 나름대로 받아들인다. 그건 우리의 자유이자 권리이니까.
그렇게 우리는 이 이야기에서 저 이야기로, 이 생각에서 저 생각으로 끊임없이 옮겨가고 여행하며 삶을 살아간다.
*본문 인용 1
텍스트의 역할은 각각의 독자에게 저작되는 데 있습니다. 독자는 그것을 원하는 대로 마음껏 풀어서 저작할 권리가 있습니다. (직업으로서의 소설가, 320p)
**본문 인용 2
방망이가 공에 맞는 상쾌한 소리가 진구 구장에 울려 퍼졌습니다. 띄엄띄엄 박수 소리가 주위에서 일었습니다. 나는 그때 아무런 맥락도 없이, 아무런 근거도 없이 문득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그래, 나도 소설을 쓸 수 있을지 모른다’라고. (직업으로서의 소설가, 45p)
***본문 인용 3
소설을 쓴다는 것은 아무튼 효율성이 떨어지는 작업입니다. 이건 ‘이를테면’을 수없이 반복하는 작업입니다. 하나의 개인적인 테마가 있다고 합시다. 소설가는 그것을 다른 문맥으로 치환합니다. ‘그건요, 이를테면 이러저러한 것이에요’라는 이야기를 합니다. 그런데 그 치환 paraphrase 속에 불명료한 점, 애매모호한 부분이 있으면 다시 그것에 대해 ‘그건요, 이를테면 이러저러한 것이에요’라고 다시 이야기가 시작됩니다. 그러한 ‘그런요, 이를테면 이러저러한 것이에요’가 끝도 없이 줄줄 이어집니다. 한없는 패러프레이즈의 연쇄지요. (직업으로서의 소설가, 23p)
****본문 인용 4
피지컬 하게 내 손을 움직여 글을 쓰고 그것을 몇 번이고 되짚어 읽어보고 세밀하게 고쳐 쓰는 것에 의해 겨우 나 자신의 머릿속에 있는 것을 남들과 비슷한 만큼 정리하고 파악할 수 있다. (직업으로서의 소설가, 334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