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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산책 Sep 26. 2019

한국을 떠나니 오히려 더 그리워졌다

장강명, <한국이 싫어서>를 읽고

소설을 읽을 때 나를 찌르는 것

<댓글부대>에 이어 두 번째로 읽은 장강명 작가의 소설. 그만큼 빨리 읽혔지만 그만큼 불만스러운 부분도 많았다. 

장강명 작가의 소설을 읽고 나면 어딘가에 찜찜한 기분이 남는다. 그건 아마도 소설에서 다루는 인물들이 내 또래이기 때문일 것이다. 소설 속 인물들과 나를 은연중에 동일시하게 된다. 그건 곧 내 이야기이기도 하니까. 그럼 소설 속에서 인물이 다뤄지는 방식이 어떻게 다가오냐 하면, 있는 그대로 까발려지는 느낌이다. 완전히 내 이야기냐 하면 그렇지도 않다. 당연히 그들과 나는 일부의 환경을 공유하고 있을 뿐, 배경도 성격도 반응하는 방식도 다르다. 그럼에도 단지 내 세대를 다루고 있다는 점 때문에 다른 이야기를 대변하고 싶어 진다. 실제 내 이야기는 그렇지 않다고, 그렇게 한 가지 측면만을 쉽게 말하지 말라고. 불편하고 찜찜할 수밖에. 


소설을 읽고 떠오른 나의 호주 생활

딱 10년 전 나는 호주에 있었다, 이 소설 속 인물들처럼. 영어권 국가로 교환학생을 가고 싶었지만 미국이나 캐나다는 생각보다 경쟁이 치열했다. 학점은 물론 토플 점수까지, 내 실력으로 뽑히기에는 턱 없이 부족했다. 그때 구원처럼 호주의 한 학교가 지원을 받았다. 준비하느라 한 학기를 더 보내느니 바로 갈 수 있는 곳으로 가자고 마음먹었다. 그렇게 처음 남반구 땅을 밟았다. 

계절이 반대라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갑자기 겨울에서 여름으로 바뀐 날씨는 이곳이 내가 지금까지 와본 가장 먼 곳이라는 것을 실감하게 했다. 한국의 여름보다 덜 끈적했고 이런 날들이 끝없이 이어질 것 같은 묘한 나른함이 곳곳에서 풍겨왔다. 짐을 들고 낑낑대며 올라간 플랫 3층은 이미 그곳을 점유한 이들의 냄새가 배어 쾌적하지 않았다. 나를 처음 맞이한 것은 바지만 입고 주방에서 고기를 굽고 있는 밝은 갈색 곱슬머리의 호주 남자애였다. 그때까지 공동생활을 해 본 적 없는 나는 화장실, 주방, 거실 등 공용 생활공간이 불편하기만 했다. 반면 원래 그곳에 있던 호주 아이들은 아무렇지 않게 안 씻은 얼굴과 맨발로 거실과 주방을 점유하고 아무렇게나 널브러져 수다를 떨었다. 물론 나에게도 관심을 가져주고 친절하게 이야기를 해 주었지만 그들의 내추럴한 모습에 적응하는데 한 학기가 걸렸다. 

같은 나이 또래인데 이렇게 다를 수 있다는 것, 어떤 무리 속에서 나만 혼자 다르다는 게 어떤 느낌인지 처음 알게 되었다. 한국에서 나는 극히 평범하고 그러면서도 간혹 좋은 의미로 주목받는 사람이었는데, 이곳에서는 그냥 낯선 동양 여자애로만 받아들여지는, 나라는 개인이 납작해지는 느낌. 

예를 들면 이런 것이다. 호주 친구들은 주말이면 서핑을 하고 작살 낚시를 해서 물고기를 잡아와서 구워 먹었다. 내가 있던 곳이 시드니나 멜버른 같은 큰 도시가 아니었기 때문에 더 그랬는지 모른다. 그들이 작살 낚시를 할 때 나는 닌텐도 DS로 “동물의 숲”에서 낚시를 하고 있었다. 플랫 메이트들은 이상하지만 이상하다고 말로 차마 내뱉지 못하는 눈빛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잘못 말했다가는 레이시즘으로 비칠까 두려워하는 눈빛. 하지만 그게 뭐, 라는 눈빛. 

그밖에도 혼자만의 세계에 틀어박혀 외롭게 보내야만 했던 시간들이 한 동안 이어졌다. 나는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활발하지 않았고, 실수와 남의 시선을 지나치게 의식하는 사람이었다. 게다가 그때는 지금보다 더 단단하고 딱딱한 자아로 완전무장하고 있던 시절이었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당연히 쉽게 섞여 들지 못했다. 한편으로는 내가 어떤 사람인지 잘 알게 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그렇게 실패와 자학으로 뒤범벅이었던 1년간의 교환학생 시절을 보내고 돌아온 뒤 나에게 남은 건, 신기하게도 자신감이었다. 좀더 솔직히 말하면, 한국에서라면 무엇이든 더 잘할 수 있을 것 같은 근거 없는 자신감. 물론 이것도 취업이라는 현실에 부딪치며 많이 깨지고 더 암울한 시간을 보내야만 했지만. 


한국이라는 익숙한 곳을 떠났을 때, 나는 더 한국을 그리워하고 있었다. 


소설 속 계나의 이야기

여기까지가 이 소설이 내 기억 속에서 끄집어낸 호주 생활에 대한 짧은 이야기다. 소설로 돌아가면, 주인공 “계나”는 금융권 회사를 3년간 잘 다니다가 “한국이 싫어서”, “여기서는 더 못살겠어서” 호주로 떠난다. 그곳에서 크고 작은 일들을 겪고 결국 호주 영주권을 따고 소설의 마지막에는 현지에서 만난 한국 남자 친구와 시민권을 따기 위해 호주로 다시 돌아간다. 이제부터 진짜 행복해질 거라고 결심하며. 


계나가 호주로 떠날 수 있었던 이유는 자기 자신을 속이지 못하는 성격과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인정하고 위험을 감수할 수 있는 실행력 때문이다. 인 서울 대학을 나와 겉으로는 그럴듯한 금융회사에 다니지만 하는 일에선 보람을 느낄 수 없고 경제적으로 의지할 만한 부모나 가족도 없고 그나마 있는 집 자식인 남자 친구의 가족들은 대놓고 자신을 없는 사람 취급한다. 어떤 것에서도 현재의 삶에서 행복을 찾을 수 없고, 앞으로도 마찬가지 일거라는 자기 인식. 어떤 경위로 호주를 택했는지 자세히 나오지 않지만, “한국이 싫어서”라는 이유로 모은 돈 2천만 원을 갖고 훌쩍 떠난다. 


그곳에서의 생활 역시 녹록지 않다. 그럼에도 아직도 한국에서 자신을 잊지 못하는 전 남친, 호주에서 만난 한국인 썸남, 부유한 인도네시아 남자 친구, 동양 여자에 대해 신비감을 갖고 있는 백인 남차친구 등 버라이어티 한 연애도 이어간다. 계나가 처음부터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것은 자기 자신이다. 누구에게 의지하려는 선택지 따윈 그녀에게 없다. 거실 한 칸은 빌려 커튼 치고 자야 하는 셰어하우스 생활에도 불구하고 남자 친구가 집으로 들어와 월세 내고 살라는 말에 꿈쩍하지 않는다. 기자라는 꿈을 이뤄 ‘경제적인 생활은 내가 책임질 테니 한국에서 결혼해 살자’는 지고지순한 옛 남자 친구의 프러포즈도 걷어찬다. 


거기가 어디라도 행복하길

그녀는 호주에서 진짜 행복할 수 있을까? 자신이 한국을 떠날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뒤늦게야 구체적인 말로 표현할 수 있게 된 주인공, 계나. 이제부터 진짜 행복해질 거라고 다짐하는 그녀는, 그럴 수 있을까? 


밥을 먹는 동안 나는 행복도 돈과 같은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어. 행복에도 ‘자산성 행복’과 ‘현금흐름성 행복’이 있는 거야. 
(…) 
나한테는 자산성 행복도 중요하고, 현금흐름성 행복도 중요해. 그런데 나는 한국에서 나한테 필요한 만큼 현금흐름성 행복을 창출하기가 어려웠어. 나도 본능적으로 알았던 거지. 나는 이 나라 사람들 평균 수준의 행복 현금흐름으로는 살기 어렵다. 매일 한 끼만 먹고 살라는 거나 마찬가지다, 하는 걸. 


이쯤 되면 ‘진정한 행복이란 무엇인가’하는 정답 없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져야 한다. 계속해서 부메랑처럼 돌아오는 질문. 나의 경우는 일상에서 끊임없이 틈을 찾아다니는 사람이다. 어떻게든 틈을 찾아 거기서 행복을 느낀다. 그러다 보니 그 행복에 감탄하고 고마워하게 되었다. 처음부터 그랬다기보다 이 세상에서, 이 사회에서 살아가다 보니 그렇게 되었다. 계나 역시 한국이 아닌 그곳에서, 그곳이 어디라도 자신이 찾은 행복 속에서 살길 바란다.  


그 시절 나와 함께 했던 친구들 모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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