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여곡절 끝에, 농카이 터미널에서 방비엥으로

#여행의 습작 4. 2017년 6월, 아이 둘과 떠난 동남아 육로 여행

by 미나래

싱가포르에서 시작해 말레이시아, 태국, 라오스, 베트남까지 — 20일간의 여행은 그 자체로 모험이었다. 그 중에서도 농카이에서 방비엥으로 넘어가던 날, 그때의 나는 세상에서 가장 작은 모험가이자, 가장 큰 두려움을 품은 엄마였다.

차가운 새벽, 낯선 기차 안의 나

태국에서 농카이로 향하는 슬리핑 기차 안. 에어컨은 고장 나지 않았는데, 너무 세게 돌아가서 몸이 식어갔다.
얇은 담요를 아이들에게 덮어주고, 나는 가방을 품에 안고 반은 앉은 채 깜빡깜빡 졸았다.
차창 밖으로 지나가는 불빛들이 덜컹거리는 소리와 함께 흔들렸다.

내가 잠들지 못한 건 추위 때문만이 아니었다.
‘이 모든 걸 잘 해낼 수 있을까?’
남편 없이 아이 둘을 데리고 낯선 도시를 옮겨 다니는 일, 그게 용기인지, 무모함인지, 나조차 헷갈렸다.

그때는 매 순간이 두려움과 후회의 반복이었다.
“남편이랑 같이 올 걸.”
그 말을 마음속에서만 수없이 되뇌었다.
한국에 돌아가면 순한 양처럼 남편을 잘하리라 다짐했지만 지금의 나는 또다시 제자리,
그때의 다짐은 바람처럼 흩어졌다.
그래도 그때의 남편은, 묵묵히 여행경비를 보내주던 든든한 지원자였다.

새벽의 농카이, 그리고 툭툭이 안에서 만난 아주머니

새벽 6시 45분, 농카이역에 도착했다.
기차 안의 차가운 공기와는 다르게, 역 밖은 비에 젖은 흙냄새와 함께 서늘하고 축축했다.
잠결에 일어난 아이들은 비몽사몽한 얼굴로 가방을 메고 따라왔다.

“엄마, 이제 어디 가?”
“터미널로 가야 해. 거기서 라오스로 가는 버스를 타야 해.”

비를 맞으며 툭툭이를 잡았다.
운전기사는 50밧을 불렀다.
그 금액이면 괜찮았다.
옆자리에 앉은 현지 아주머니가 우리를 힐끗힐끗 보다가 살짝 미소를 지었다.

나도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 짧은 미소 하나가 묘하게 위로가 되었다.
그분은 내 허둥댐을 보고 “찍어줄까?” 하듯 손짓을 했다.
나는 어색하게 휴대폰을 내밀었고, 그녀는 내 아이들과 나를 프레임 안에 넣었다.

툭툭이 안에서의 그 사진 한 장. 낯선 도시의 한복판, 언어도 통하지 않는 두 엄마가 미소로 나눈 인사.
그때 그 따뜻한 눈빛을 나는 아직도 잊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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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안했던 터미널, 그러나 사람은 있었다

농카이 버스터미널에 도착하자 습한 공기 속에서 시장의 소음이 쏟아졌다.
아침의 소란, 냄비에서 지글지글 끓는 기름 냄새, 빗방울이 떨어지는 철지붕 소리.

나는 서둘러 매표소로 갔다.
“방비엥, 세 장.”
다행히 9시 40분 버스 표를 구했다.
매표소 직원은 “가방은 안에 두세요.” 하며 매표소 구석에 짐을 보관해줬다.
왠지 불안했지만, 무거운 배낭을 메고 세 시간을 버틸 자신이 없었다.

주위를 둘러보니 이방인인 우리를 향한 시선이 하나둘 느껴졌다.
‘저 여자, 혼자 애 둘 데리고 여행하네.’
‘어디서 왔을까.’
나를 향한 호기심과 계산된 눈빛이 뒤섞여 있었다.

거리에는 손을 내미는 여자, 복권을 파는 남자, 그리고 취객처럼 우리 주위를 서성이는 부랑자도 있었다.
그날의 나는 세상에서 가장 경계심 많은 사람처럼 굳어 있었다.
가방 끈을 쥔 손에 땀이 흥건했다.

그 와중에 아이들은 봉지밥과 무삥을 먹으며 활짝 웃었다.
“엄마, 이거 진짜 맛있어!”
나는 그 웃음에 안도하면서도 마음이 복잡했다.
아이들의 눈에는 이 여행이 ‘모험’이었겠지만, 내게는 ‘버텨야 하는 하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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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례의 시간, 그리고 잠깐의 울림

8시가 되자 터미널에 경음악이 흘렀다.
순간, 사람들이 일제히 일어섰다.
모두 고개를 숙이며 묵념했다.
나는 무슨 일인지 몰라 두리번거렸다.
곧 알았다.
이 나라에서는 매일 같은 시간, 국가에 대한 경례를 올린다는 것을. 누군가가 마치 룰을 어긴것처럼 우리를 향해 소리를 지른다. 나도 아이들도 멋쩍게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 순간, 내 안에서 한국에서의 어린 시절이 스쳤다.
저녁 5시, 국기 앞에 서서 손을 올리던 우리들의 모습. 시간은 다르지만 마음은 비슷했다.
국경을 넘어도, 사람의 ‘존중하는 마음’은 같은 언어로 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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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기의 순간, 그리고 무사한 출발

버스 출발 시각이 다가오자 다시 불안이 엄습했다.
그때 우리 주변을 맴돌던 부랑자 중 하나가 갑자기 건군의 손을 덥석 잡았다.
그 짧은 찰나, 나는 머릿속이 하얘졌다.
“건군아!”
소리를 지르며 아이를 붙잡았다.

다행히 근처에 있던 현지 남자들이 재빨리 끼어들어 그를 밀어냈다.
나는 손이 덜덜 떨렸다.
아이는 내 품에 안긴 채 조용히 말했다.
“괜찮아, 엄마.”

그날의 그 말 한마디가 지금도 내 가슴에 남아 있다.
아이보다 어른인 줄 알았던 나는, 그 순간 아이에게 보호받고 있었다.

버스가 출발했다.
창밖으로 멀어지는 터미널, 그 속에서 부랑자가 멀리 손을 흔들었다.
나는 끝내 그 손을 외면하지 못했다. 그의 의도가 무엇이었든, 그 순간의 나의 공포와 불신이 여행 내내 나를 따라왔다.


지금의 내가 그때의 나에게

지금 생각해보면, 그날의 나는 늘 ‘의심’과 ‘두려움’ 사이에서 흔들렸다.
낯선 이의 친절조차 불안하게 느껴졌고, 사소한 시선에도 마음이 움츠러들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여행에서 만난 사람들은 모두 나를 도와줬다.

툭툭이 아주머니의 미소, 시장 상인의 손짓, 아이에게 미소를 건네던 노인들. 그때는 몰랐지만, 그 모든 순간이 나를 단단하게 만들고 있었다.

시간이 흘러 지금의 나는 안다.
여행의 본질은 용기 있게 떠나는 것이 아니라, 낯선 세상 속에서도 마음을 여는 것이라는 걸.

그때의 나에게 말해주고 싶다.
“두려워도 괜찮아. 그 두려움 속에서도 너는 이미 잘하고 있었어.”

그렇게 우리는 방비엥으로 향했다.
그날의 새벽, 비에 젖은 농카이의 공기와 아이의 따뜻한 손. 그 모든 것이, 지금의 나를 만든 여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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