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킷 티마의 아침, 그날의 웃음이 지금의 나에게

여행의습작 #5. 2017년 6월 싱가포르에서

by 미나래

1. 싱가포르의 여름, 바람 한 점 없는 아침

2017년 6월의 싱가포르는 무겁게 달궈진 공기로 하루를 시작했다.
아침 햇살은 이미 한낮의 온도를 예고하고 있었고, 습기가 옷 사이로 파고들어 몸과 공기를 한데 엮었다.

밍펑 씨는 아침부터 분주했다. 물병을 챙기고, 아이들을 재촉하며, 우리 가족을 위한 간식까지 손수 싸주었다.
그 모습이 어쩐지 익숙했다. 아이들과 함께 여행을 다니다 보면, 누군가는 늘 “엄마 역할”을 떠맡게 된다.
그날은 밍펑 씨가 그 역할을 맡아준 셈이었다. 식당 앞 테이블에 앉아 카야잼이 발린 토스트를 한 입 베어물었다. 달콤하고 고소한 향이 커피의 쌉싸래한 향과 섞여 입안을 감쌌다.

그때의 나는 몰랐다.

몇 년이 지난 지금도 그 맛을 이렇게 또렷이 떠올릴 줄은.어쩌면 여행이란 건, 맛의 기억으로 남는지도 모르겠다.

옆자리의 질리안은 얼굴이 잔뜩 구겨져 있었다. 사춘기의 문턱에 선 아이는 작은 일에도 마음의 파도가 크게 일었다.
률양과 동갑이라 그런지, 두 아이의 감정 곡선은 놀랍도록 닮아 있었다.

식당 한켠에서 질리안의 눈물이 뚝뚝 떨어졌고, 나는 그 아이의 엄마처럼 마음이 쓰였다.
“괜찮아, 천천히 먹자.”
그 말 한마디에 아이는 고개를 끄덕였고, 곧 률양이 손을 내밀었다.
그 손을 잡은 순간, 질리안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번졌다.

그날의 등산은, 그렇게 작은 화해로 시작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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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부킷 티마 힐, 이방인의 숨결로 오르는 길

자연보호구역 초입에는 주말을 맞아 운동복 차림의 사람들로 붐볐다.
이어폰을 꽂은 사람들, 물통을 들고 달려가는 젊은이들, 그리고 우리처럼 카메라를 들고 서성이는 여행자들.

공기는 후끈했고, 34도를 넘나드는 열기가 온몸을 감쌌다.
나무 그늘 사이로 쏟아지는 햇빛이 풀잎 위에서 반짝였다.
숨을 들이쉴 때마다 공기 대신 뜨거운 수증기가 폐로 밀려들었다.

“언니, 다음에 한국 오면 지리산 갈까요?”
내가 농담처럼 묻자, 퐁핑 언니는 손사래를 쳤다.
“그럼 나 업고 가야 해!” 그 말에 모두 웃음이 터졌다.

나는 질리안과 나란히 걷고 있었다.
그 아이의 손에는 땀이 맺혀 있었다.
방탄소년단의 노래가 이어폰에서 흘러나오자, 질리안이 흥얼거렸다.
“아, 이 노래 알아요! 률양이랑 자주 들어요.”

그 한마디가 이국의 더위를 잊게 했다.
음악이 두 아이의 사이를, 언어보다 더 자연스럽게 이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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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정상에서의 웃음, 그리고 바나나 머핀 한 조각

길이 점점 가팔라졌다.
그러자 밍펑 씨는 “우회로로 가자”며 평지를 택했다.
북경에서 만리장성을 오르다 기진맥진했던 기억이 있다며 웃음을 터뜨렸다.

그렇게 한참을 걷다 보니, 해발 163미터의 정상 표지판이 눈앞에 나타났다.
작은 나무판에 ‘Bukit Timah Hill’이라고 쓰여 있었다.
이곳 사람들에게는 가장 높은 산, 하지만 우리에게는 언덕에 가까운 높이.

“우리 모악산은 793미터인데요.”
내 말에 다들 웃음을 터뜨렸다.

그 웃음소리 사이로 알렉스가 꺼낸 바나나 머핀 향이 퍼졌다.
전날 밤, 우리를 위해 직접 구웠다는 머핀은 촉촉하고 달콤했다.
입 안 가득 퍼지는 바나나 향에 지친 몸이 녹아내렸다.

싱가포르의 남편들은 이렇게 다정한가, 나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그러자 퐁핑 언니가 장난스럽게 말했다.
“그건 알렉스만 그래~ 우리 집은 달라!”
다시 한바탕 웃음이 터졌다.

정상에서의 사진에는 내 엉덩이에 땀자국이 선명하게 찍혀 있었다.
그걸 보고 모두가 배를 잡고 웃었다.
그 순간의 웃음이 그 어떤 풍경보다 따뜻하게 기억에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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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내려오는 길, 그리고 지금의 나

계단을 내려오며 우리는 서로의 나라 이야기를 나눴다.
“한국 오면 꼭 한라산 가자.”
“좋아요, 대신 싱가포르에 오면 내가 가이드할게요.”
그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지만, 그 마음만은 여전히 내 안에 살아 있다.

그때의 나는 ‘여행은 새로운 곳을 보는 일’이라고 믿었다.
하지만 지금의 나는 안다. 여행은 ‘사람의 마음을 다시 만나는 일’이라는 것을.

아이들은 어느새 다 자라 함께 여행하던 그 시절의 손을 더 이상 잡아주지 않는다.
률양은 이제 스스로의 길을 찾고 있고, 나는 여전히 그 길목에서 그때의 웃음과 손의 온도를 떠올린다.

그날의 부킷 티마는 그저 낮은 언덕이었지만, 지금의 내게는 삶의 경사로 같다.
숨이 차오르고, 덥고, 웃고, 땀 흘리고, 그러다 어느새 “괜찮다”고 말하게 되는 길.

여행도, 인생도, 결국은 그렇게 내려오며 비로소 의미가 생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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싱가포르의 한 여름, 부킷 티마의 숲속에서
나는 낯선 이들과 함께 웃었다.
그 웃음이 지금의 나를, 여전히 살아 있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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