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용의 용기와 평안을 위한 기도
한달 전 재발을 진단받고 재수술을 위해 5일전 다시 아산병원에 입원했다.
1년반 동안 애써 일구었던 뇌종양 환자의 값진 일상이 무너지니 여러 감회가 생겨난다.
재수술은 1차 때와 4시간여 시간은 비슷했으나, 후유증으로 약간의 왼편 운동신경 마비를 동반했다.
1차수술이후 왼편 시야협소를 겪고있는데, 이번에 왼편 편마비가 더해지니 지금 당장은 혼자서 설 수도 걸을 수도 없다.
아니, 혼자 밥을 떠먹는 것도 양치질도 힘든 상황이다.
그간 채식 위주의 세 끼 식사를 꼬박꼬박 챙겨먹고 하루 2리터의 물을 마시고 8천보를 걷고 매일 아침 쾌변을 보던 일상의 소중함을 깨닫는다.
그 일상을 재건하려면 내가 스스로 힘을 내야한다. 하지만, 병원 환자생활은 녹록치 않다.
나는 낙상 고위험 환자로 지정되어 양 손목에 '낙상주의' 주황색 팔찌를 차고 있다.
혼자서는 절대 웅직이지 말라는 엄명이 내려져있다.
항상 보호자와 동행해야 하고, 보호자가 병실을 비울 때는 반드시 간호사에게 알리고, 내 손에는 간호사 호출벨을 쥐어주어야 한다.
안전바가 올라간 침대에서 머무르며, 밥을 먹고 양치질과 대소번을 해결해야 한다.
입원전 가족과 친구들이 보내준 힘과 용기를 내어보려 혼자 화장실에 가고자했지만 허사였다.
왼팔은 의수처럼 흔들리고, 왼다리는 통나무 등걸마냥 무감각하다. 힘이 여전한 오른발 만으로 뛸 수는 없고 왼발이 디딤발 역할을 해주어야 보행이 가능한데 그게 쉽지가 않다.
며칠 전에는 오랜 보호자 경력의 옆 침상 아주머니의 도움으로 휠체어에 앉아 화장실 이동을 도모했으나, 이마저도 무위였다.
병실을 나서다 담당 간호사를 만났는데 간호사는 실상을 보여드리겠다며 마눌과 함께 동행해 주었다.
왼발에 힘이 없다보니 변기에 앉는 자체가 힘들었다. 십여분 지나 어렵사리 앉았지만 예전처럼 볼 일을 볼수 없었다.
결국, 기저귀를 차기로 했다.
수술실 들어가기 전 소변줄을 꽂았으니, 앞뒤 순환흐름이 막힌 셈이다.
99세를 일기로 시골집에서 엄마 품에 안겨 평온한 죽음을 맞이했던 할머니도 기저귀는 차지 않았다는데, 손자가 이제 절반의 인생을 살았을 뿐인데 기저귀를 찼다.
마눌과 간호사의 말 한 마디가 생각을 바꿨다.
"남편, 걱정마. 내가 치울께. 빨리 재활해서 걸으면 되잖아. 편하게 생각해.
"환자분, 뒷처리 걱정마세요.저희 이런 일 하라고 병원에서 월급 준답니다. 낙상 예방과 본인의 안전에만 신경쓰세요.
사이렌의 유혹앞에서도 선원의 귀를 밀납으로 막고 본인은 갑판 돛대에 결박하고 정면으로 문제에 맞선 문제해결형의 표본 오딧세이의 선택을 다시 돌아보며, 참된 용기란 무엇인가 생각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나약과 교만사이의 중용 어딘가를 용기로 정의했다. 개인의 상황과 능력을 고려한 허약하지 않되 만용이 없는 태도를 참된 용기라고 했다.
사회철학자 니부어 목사도 맥이 통하는 '평안을 위한 기도문'을 남겼다.
변화시킬 수 있을 때는 앞으로 나아기서 변화시켜라.
변화시킬 수 없다면 뒤로 물러서도 펑안한 마음을 유지하라.
그리고, 나아가야 할 때인지 물러서야 할 때인지 구별할 수 있는 지혜를 갖추라.
지금 걸을 수 없다면 기저귀를 차야한다. 나약하다는 상념에서 벗어나 재활에 집중하는게 지혜로운 현실 판단이다.
결국, 용기와 평안과 지혜는 같은 거라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이의 토대는 습관과 성찰일 것이다.
다시 시작이다.
용기와 평안을 위해 습관을 만들고
성찰을 통해 지혜를 모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