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노마의 영국 Sep 27. 2022

옥스퍼드, 1100년의 시간

내가 옥스퍼드를 사랑하는 이유

Summer is more summery here than
anywhere else I know; not hotter, certainly not sunnier, but more like summers used to be, in everyone’s childhood memories
- Jan Morris
이곳의 여름은 내가 아는 어떤 곳 보다 더 여름답다. 더 덥지도 않고, 특별히 쨍하지도 않지만, 우리 모두의 어린 시절 기억 속 여름과 같다.


옥스퍼드 대학, 크라이스트 처치 컬리지를 졸업한, 지금은 세상을 떠난 영국 역사학자인 Jan Morris의 옥스퍼드에 대한 짧은 묘사가 너무나도 와닿았던 지난 4년.


옥스퍼드는 사계절이 다 아름답지만 특히 청춘들의 열기 탓인지 (너무 노인네 같은 느낌이지만 이곳은 진짜 젋음이 느껴진다!) 짜증 날 정도로 많은 관광객 탓인지, 그도 아니면 한 몇 년은 손도 안된 거 같은 원시적인 느낌이 물씬 풍기는 수풀 덕인지 몰라도 참으로 아름다운 여름을 보여준다.



인간의 손이 덜 닿은, 인위적인 느낌이라곤 1도 없는 오솔길을 걸으면 1,100년 전 이곳을 살았던 그 시대의 옥스퍼디안들을 상상하게 된다. 내가 걷는 이 길이 그때도 있었다니, 아니 천년 전 그들은 천년 후에도 이 길이 그대로일 거라 상상이나 해봤을까? 시험을 망쳐 머리를 식히려 걷던 처웰 강둑이, 수업에 늦어 뛰어가던 보들리안 도서관 앞 그 길이 천년 후에도 여전할 거라 생각해본 이가 있었을까?  

시간은, 역사는 겹겹의 옷을 입어 그토록 소중해지나 보다.


판데믹을 겪고 심각한 기후위기 시대를 살며 10년 후의 미래마저도 예상하기 어려운 지금,

10여 년 후, 내 아이가 성인이 되어 우리가 지금 매일 걷는 이 길을 그때도 걸을 수 있을까 조바심이 난다.


나는 옥스퍼드에 살며 자연의 숭고함을 알았고 역사의 힘을 느꼈다.

그래서 이곳이 참 좋다.


지금까지 살아오며 꽤나 다양한 도시에서 살아봤지만, 옥스퍼드만큼 더 살고 싶은 곳은 없었다.

아무래도 아이가 있는 지금의 나는 아이가 뛰어놀기에 이만한 곳이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인 거 같다.





옥스퍼드에선 이렇게 어딜 가나 원시적인 자연의 모습을 볼 수 있다.

자연의 모습은 인간이 흉내 낼 수 없는 환상적인 형태를 만들기도 해, 그림의 대상이 되기도 하고 판타지 이야기 속 배경이 되기도 한다. 


위 사진 속 공간을 거닐면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가 탄생한 곳이 옥스퍼드라는 게 그다지 놀랍지 않을 때가 있다. 






영국은 공원의 나라다.


영국에만 27,000개의 공원이 있다고 한다.

그중 런던에만 3,000개, 런던과는 비교가 안 되는 작은 규모의 옥스퍼드는 (옥스퍼드 주 말고 학교가 모여있는 옥스퍼드 시) 수십 개의 공원과 더불어 옥스퍼드 대학교가 시민들과 공유하는 다양한 초원/목초지(meadow)가 있다. 특히 깊지 않고 잔잔하게 흐르는 템스강의 지류 처웰(River Cherwell) 강이 옥스퍼드 구석구석 뻗어있어 사계절 펀팅을 즐기고, 강물을 따라 산책을 즐길 수 있다.


개인적으로 느낀 점을 말하자면 런던의 공원들이 단정하며 널찍하고 평평한 이미지라면, 옥스퍼드에 있는 공원들은 규모가 훨씬 아담하고 손대지 않은 자연과 함께 오솔길이 (위에서 말한 처웰 강둑) 많이 나 있는 형식이다.




넘어진 나무 기둥에 집을 짓고 살아가는 야생 개미를 만난 날 & 비오는 날은 좋아하는 달팽이와 지렁이를 채집하는 날.


이곳에선 날씨에 상관없이 자연을 만나 소통할 수 있다.


비 오는 날은 달팽이와 지렁이를 만나고, 아무것도 없이 비만 오는 겨울엔 물웅덩이에서 신나게 물장구를 치며 논다. 여름엔 말 그대로 '초록' 속으로 들어가 자연 안에서 더운 여름을 피하고, 봄은 여느곳이나 마찬가지로 생명력으로 가득하다.


비가 내리며 바람이 불고 동시에 해가 쨍한 말 그대로 미친 거 같은 날씨에도 공원에서 노는 아이들의 얼굴엔 생기가 가득하고 목줄 없이 뛰어노는 개들은 세상 해맑다. 


차가운 공기에 정신도 마음도 맑아지는 가을이 왔다. 눈 깜짝할 사이 제일 싫어하는 영국의 겨울이 오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린 바람을 단단히 막아줄 외투를 입고, 진흙탕을 당당히 건너갈 장화를 신으면 어디든 갈 수 있다. 


해리포터 촬영지인 크라이스트 처치 앞은 물웅덩이 맛집이다.  수십 개의 물웅덩이가 줄줄이 이어진다.


짓궂은 날씨가 일상인 영국인들은 날씨에 방해받지 않고 내 하루를 만들며 살아간다.

아이들도 예외는 아니다.


자연을 거스르는 일만큼 멍청한 도전은 없으니까.






모들린 컬리지와 그 안에 위치한 사슴공원 (사슴사진 출처, 구글)




유달리, 이상하리만치 내가 좋아하는 길이 있다. 

큰길이 아닌 뒷골목 느낌이라 관광객이 많지 않은 그나마 조용한 길. 

이 길을 따라 걸으면 옥스퍼드를 방문한 사람들이 꼭 사진을 찍는 "통곡의 다리"가 나온다. 


특별히 화려하지도 않고 웅장함도 없는 그저 오래된 돌담길을 걸으며 항상 똑같은 생각을 한다.


'돌담 위 어여쁜 꽃은 언제부터 저 자리에 피었을까? 

저 아이(꽃)는 몇 살이나 되었을까? 나보다 나이가 많을까? 

이 돌담을 걸으며 나처럼 돌담을 만져본 사람도 있었을까? 누구였을까? 

나중에 내 딸이 이 길을 걸을 때, 그때도 이 길이 그대로 있어주길...

내가 느끼는 이 행복감을 내 아이도 느꼈으면 좋겠다’












작가의 이전글 책 읽는 시간 - Crying in H mart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