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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좋은날 May 23. 2020

[독서일기] 오래 준비해온 대답, 김영하

아날로그 여행의 기억

2000년 2월, 중국어를 전공했던 나는 중국으로 어학연수를 떠났다. 겨울방학이 임박한 어느 날 친구 한 명이 “우리 같이 어학연수 갈래?” 하고 던진 한 마디가 그 시작이었다. 나는 그렇게 가족 중에 처음으로 비행기를 타고 해외를 가게 되었다. 2년 전 캐나다 어학연수를 준비하다가 IMF로 달러가 급등하면서 예약해둔 비행기 티켓을 취소한 언니에게는 조금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책 <오래 준비해온 대답>은 네이버와 구글에게 무엇이든지 물어볼 수 없던 시절 김영하 작가가 아내와 함께 떠난 시칠리아 여행의 기록이다. 교수로, 라디오 진행자로 바쁜 일상을 살아가는 그에게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소설을 쓰는 데 에너지를 집중했으면 좋겠다는 아내의 제안으로 안정적인 일상을 내려놓고 캐나다에서 2년을 살아보기로 한다. 캐나다로 떠나는 길에 아내와 여행을 한 곳이 바로 이탈리아의 시칠리아이다. TV 여행 교양 프로그램 촬영에 참여하면서 평소에 가고 싶었던 곳이 있었냐고 묻는 PD의 질문에 작가는 마치 오래 준비해온 대답처럼 시칠리아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생각해보면 내 많은 여행이 그렇게 시작되었다. 어떤 나라나 도시를 마음에 두었다 한동안 잊어버린다. 그러다 문득 어떤 계기로 다시 그곳이 떠오른다. 그리고 정신을 차려보면 어느새 그곳에 가 있다. 그런 여행은 마치 예정된 운명의 실현처럼 느껴진다.” 


한국에서의 익숙한 생활을 정리하고 떠나는 새로운 길의 시작으로 다시 찾은 시칠리아, 시칠리아로 가는 여정은 분명 고됐지만, 그런 여행에서조차 여유가 느껴진다. 아마도 짜여진 일정을 빠르게 소화하는 여행이 아니라 그저 발길 닿는 데로 주어진 시간을 보내는 여행자의 모습이었기 때문이지 않을까. 낯선 여행지에서 누리는 여유로운 일상, 유목민처럼 한 곳에 정착하지 못했던 그의 삶이 말해주듯이 여행은 변화에 유연하고, 자유로워 보인다. 아날로그 방식의 그의 여행이 낯설지 않다. 커다란 종이 지도 한 장에 의지해 두 발로 여행을 다니던 내 기억 속 경험의 조각들을 끄집어내보는 재미는 덤이다.


내 기억 속 아날로그 방식의 여행은 디지털화 되었고, 한 나라와 다른 나라를 오고 가는 항공 노선은 다양해졌다. 여행은 자유로워졌고, 쉬워졌으며, 일상이 되어 가고 있다. TV 프로그램 <윤식당>에서는 낯선 도시에서 현지인들에게 낯선 한국 음식을 만들어 판매한다. 처음 방문한 그곳에서 마치 오랜 시간을 살고 있는 사람들처럼 익숙하게 이웃과 인사를 나누고, 동네 작은 마켓에서 식재료를 사고, 주방에서 음식을 만든다. 마치 일상을 사는 그들이 여행자가 되고, 여행자가 일상을 살아가는 듯한 느낌마저 든다. 해외에서 살아보기는 그렇게 나에게도 로망이 되었다. 조금 더 나이가 들고, 조금만 더 여유로운 시간을 만들 수 있다면, 김영하 작가의 방식대로 홀연히 떠나보고 싶다.


“사서 축적하는 삶이 아니라 모든 게 왔다가 그대로 가도록 하는 삶, 시냇물이 그러하듯 잠시 머물다 다시 제 길을 찾아 흘러가는 삶, 음악이, 영화가, 소설이, 내게로 와서 잠시 머물다 다시 떠나가는 삶, 어차피 모든 것을 기억하고 간직할 수는 없는 일이 아니냐.” 36p


그렇게 여행을 가고 싶은 곳은 하나의 나라에서, 하나의 도시로 옮겨간다. 커다란 지도 위에 띄엄띄엄 점을 찍듯이 여행을 했다면, 이제는 하나의 도시에 머무르는 여행 안의 작은 여유를 가져보고 싶다.


“난 모든 일이 계획대로 진행되지 않으면 안절부절 못하는 사람이었어. 특히 여행 같은 거 떠날 때는 더더욱 그랬지. 예약하고 확인하고 또 확인하고 그런데 시칠리아 사람들을 보니까 이렇게 사는 것도 좋은 것 같아. 그냥, 그냥 사는 거지. 맛있는 것 먹고 하루종일 얘기하다가 또 맛있는 거 먹고, 아무것도 계획하지 않고 그냥 닥치는 대로 살아가는 거야. 287p


코로나19로 일상의 많은 변화가 일어났다. 답답한 마스크는 반드시 입어야 하는 의복 같은 것이 되었고, 사람들과의 적당한 거리두기는 당연해져 가고 있다. 언제 다시 여행을 떠날 수 있을 지 계획할 수 없게 되었다. 언젠가 다시 여행을 떠날 수 있다면 나는 어디에 서 있을까. 나에게도 그 대답을 오래 준비해야 할 때가 온 것 같다. 일상을 여행하는 마음으로 천천히 그 대답을 준비해보려고 한다.


2020.05.22. 일상을 여행하는 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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