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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좋은날 Apr 29. 2021

[독서일기] 혀끝에서 맴도는 이름, 파스칼 키냐르

알쏭달쏭, 궁금궁금, 그래서 무엇?

독서일기 모임을 하면서 숨어있는 좋은 책들을 만나는 행운을 종종 경험한다. <혀 끝에서 맴도는이름>, 아무런 정보 없이 이 책의 제목과 표지만 봤더라면 나는 이 책을 펼쳐보지 않았을 것이다. 알면 알수록 더 알 수 없는 <혀 끝에서 맴도는 이름>을 나도 한번 읽어보기로 했다. 표지마저 신비스러운 책 <혀 끝에서 맴도는 이름>, 나는 이미 다 알고 있는 스토리임에도 불구하고 머리 속에 물음표를 지우지 못한 채 책장만 넘긴다.     


어릴 적부터 5개 국어를 습득했다는 프랑스 작가 파스칼 키냐르, 언어의 천재였을까 라고 생각했지만, 다양한 언어로 소통하는 환경에서 그는 실어증을 경험할 만큼 혼란스러웠던 것 같다. 그래서 <혀 끝에서 맴도는 이름>은 그의 비밀 이야기라고도 할 수 있다. 자수가 콜브륀은 앞 집에 사는 재봉사 죈느를 사랑하게 되었다. 콜브륀은 그와 결혼하기 위해 죈느가 가진 섬세한 자수가 놓인 벨트를 똑같이 만들어내야 했다. 콜브륀은 여러 날 수를 놓았지만, 똑같이 만들 수 없었고, 마침 길을 잃어 도움을 청하던 영주 아이드비크 드 엘이 그녀의 사연을 듣고 자신이 가진 똑같은 벨트를 선물한다. 단, 1년 후 자신의 이름을 기억해야 한다는 조건을 달았다. 콜브륀은 사랑하는 죈느와 결혼했지만 약속한 시간이 다가왔고, 영주의 이름을 기억해내기 위해 애쓰지만 이름은 혀 끝에서만 맴돌 뿐 기억이 나지 않는다.


“천지가 캄캄해졌다. 모든 게 꺼졌다. 지금 내가 말을 함으로써 꺼버린 이 촛불처럼. 말을 하는 사람은 누구나 빛을 끈다.” 57p


말을 하는 사람은 누구나 빛을 끈다는 동화의 마지막 문장에서, 말의 신중함과 침묵에 대해 생각해본다. 콜브륀이 아이드비크 드 엘의 조건에 선뜻 답한 것처럼 말은 누구나 쉽게 할 수 있다. 정해진 순서도, 정해진 시간도, 정해진 규율도 없다. 말은 언제, 어디서든 내가 원하는 데로 내뱉을 수 있다. 성직자들은 수양을 위해 긴 침묵의 시간을 가진다고도 하는데, 온갖 말들이 난무하는 요즘, 나 역시 종종 침묵의 시간을 통해 말에 대한 절제와, 나의 언어 습관을 돌아볼 필요가 있음을 느낀다. 행위적인 관점에서 말을 하는 사람은 누구나 빛을 끄는 것이 맞지만, 어떻게 말하느냐에 따라 빛을 끄기도, 빛을 밝히기도 한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안다. 작가는 콜브륀의 이야기를 통해 무엇을 말하고 싶었던 걸까. 그리고 죈느가 영주의 이름을 알아내기 위해 그를 찾아 길을 헤맬 때마다 선녀와 나무꾼 이야기에 나오는 산신령처럼 나타난 동물들은 어떤 의미일까. 그들이 안내해 준 길은 모두 아주 깊숙한 곳으로 내려가야 했는데, 그건 어떤 의미일까. 세 번의 길을 갈때마다 건너야 했던 도개교는 무엇일까. 여전히 알쏭달쏭한 물음이 가득하다.


“단어는 그것을 노래하는 음악가, 그것을 발음하는 배우, 그것의 형태보다 의미에 몰두해서 따라 읽는 독자 … 작가는 단어를 쓰기 위해 그것을 탐색한다. 매끄럽게 빠져나가는 얼음 덩어리 앞에서 일시 정지된 칼처럼, 글을 쓰는 사람은 고정된 시선과 경직된 자세로 빠져나가는 단어를 향해 두 손을 내밀어 애원하는 자이다. 어느 이름(명사)이나 하나같이 혀끝에서 맴돌기만 할 뿐이다. 이름이 필요할 때, 그것의 작고 까만 육체를 소생시켜야 할 사유가 발생할 때 그것을 소환할 줄 아는 것이 예술이다.” 13 p


작가는 현재의 말(단어)로 표현 되어지는 언어, 소리로 표현되는 말이라는 것을 알파벳이나 자음모음과 같은 규칙이 만들어지기 그 이전의 상태를 이야기하고 싶었던 걸까. 혀 끝에서 맴도는 이름은 말(단어)로 표현되지 못하는 그 어떤 것을 말하는 걸까. 나 역시 그것이 무엇인지 말로도, 글로도, 어떤 언어로도 표현해내지 못하겠다. 혀 끝에서 맴돌고, 손 끝에서 맴도는, 형체가 없어 만져지지 않는 그것이 나는 몹시도 궁금하다.


2019.02.15. 어른이 되어가는 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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