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좋은날 Oct 25. 2020

[독서일기] 다가오는 말들, 은유

어느 봄날의 가슴 시린 기억

<다가오는 말들>은 겪은 일, 들은 말, 읽은 말들로 엮은 에세이 모음이다. 책 읽기를 좋아하나 편견이 많던 한 사람이 타인을 이해하고 더 나은 생각을 만들어가는 성장의 기록이자 그러지 못했던 날들의 반성문이다. 나에게서 남으로, 한발 내디뎌 세상과 만난 기록이다. 10p


살아가면서 수 많은 말들이 나의 마음을 삐죽이 비집고 들어온다. 어떤 말은 긍정의 에너지로, 어떤 말은 아픈 상처로, 또 어떤 말은 따뜻한 위로가 되어 돌아오기도 한다. 그렇게 우리는 매일 매 시간 여러 말들과 함께 한다. 나는 과연 어떤 말들과 살고 있을까.


2014년 4월 16일, 파란 하늘의 커다란 캔버스 위에 봄 햇살이 넘치던 날이었다. 나는 봄 소풍 가는 아이처럼 벚꽃 구경하며 직원들과 아침 일찍 서울로 향했다. 벚꽃 향기가 불어오는 봄이면, 현대기아차 협력사 채용박람회가 열린다. 나는 사람들로 가득 찬 행사장에서 젊은 청춘들과 마주하며 취업 상담을 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그때 옆에 있던 동료가 제주도로 향하는 커다란 배가 침몰하고 있다고 했다. 수학여행을 가는 아이들이 많이 타고 있다고 했다. ‘그래? 큰일이네’ 라고 대답하고, 조금 있으니 ‘다 구조했답니다.’라고 한다. ‘그래, 다행이네’ 하고 다시 줄을 서서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기다리고 있는 취업 준비생들과 상담을 이어갔다. 2014년 4월 16일, 나는 작은 부스 안에서 청춘들과 마주앉아 누구보다 열심히 떠들면서 하루를 보냈다.


그 시각, 세월호는 그렇게 속절없이 가라앉았다. 아이들은 어른들의 가르침대로 가만히 기다리고 있으면 구조해줄 거라 믿었을 거다. 나도 그랬다. 그렇게 큰 배가 순식간에 가라앉을 수도 없고, 배가 가라앉는 시간에 충분히 아이들을 구조해낼 거라 믿었다. 전원구조 했다는 그 말을 조금도 의심하지 않았다. 하지만 세월호는 가라앉았다. 부모가 되면 부모의 심정을 조금은 알 것 같았는데, 그들의 아픔을 아주 조금 이해할 수 있다는 건 거짓말인 것 같다. 어쨌든 이 상황이 얼마나 어이가 없는 지, 대한민국 국민으로 얼마나 말이 안 되는 상황을 마주하고 있는 지는 통감할 수 있었다. 그렇게 봄 햇살이 눈부시던 날, 나는 무거운 마음으로 분향소를 찾았다. 얼굴도 모르는 아이들 생각에 가슴은 시리고, 눈시울은 뜨거워졌다. 나는 아이들에게 미안했다. 내가 해 줄 수 있는 것이 없어서 미안했고, 사회의 부조리에 목소리를 내지 않는 어른이어서 미안했다. 내 살림만 신경 썼지, 나라의 살림살이에 관심을 가지지 않은 것이 정말 미안했다.


그렇게 다시 봄이 왔다. 흐드러지게 핀 벚꽃이 설레는 이들과, 그 벚꽃이 가슴 시리게 아픈 이들이 서로 다른 마음으로 봄을 마주하고 있다.


“언제까지나 그 자리에 있을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던 공간은 인간의 오만함을 비웃듯 무너져갔고, 빛나는 도시 파리는 슬픔에 잠겼습니다. 5년 전의 오늘, 우리는 역시 언제나 그 자리에 있을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던 무언가를 놓쳐버렸습니다. ‘전원구조’ 그 어리석고도 허망했던 단어에 잠시 희망을 품었다가 눈 앞에서 서서히 국가의 무너짐을 목격했던 순간 … 어느 사이 감정의 모서리가 무디어져 누군가는 ‘지겹다’는 단어를 입에 올리는 잔인한 시간. 우리 곁에 늘 있을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 그 모든 것들은 정말로 우리 곁에 늘 남아있을 수 있을까. 놓쳐버린 그 순간을 되돌릴 수는 없겠지만, 무너진 마음을 일으키고자 파리의 시민들은 함께 모이기 시작했습니다. 우리 또한 다르지 않습니다. 우리가 놓쳐버린 것들을 다시 되살릴 수는 없겠지만 어떻게든 다시 일으키고자 하는 마음들이 이어진다면 말입니다.” - 2019년 4월 16일, JTBC 뉴스 앵커 브리핑


2019.04.19. 어른이 되어가는 S

매거진의 이전글 [독서일기] 당신의 인생을 정리해드립니다, 이지영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