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좋은날 Jul 21. 2020

[독서일기] 인연, 피천득

일상의 소중함, 일상의 행복, 일상의 나

2018년, 내 생애 가장 숨막히는 여름이 지나가고 있다. 8월을 시작하는 지금, 정신 없이 달려온 일년의 시간을 보상이라도 하듯, 선물같이 나에게 주어진 망중한(忙中閑)의 시간을 즐겨본다. 눈 부시는 햇살에 반짝이는 나무를 마주하고 뜨거운 여름 바람에 전해져 오는 기분 좋은 초록 내음을 느껴본다. 눈 앞에 펼쳐진 산등성이와 어울리는 쨍 하게 파란 하늘과 순백의 몽글몽글한 구름을 물끄러미 보고 있으니 한 폭의 풍경화 속에 들어와 있는 기분이 든다. 나는 자연의 풍경화 속에서 피천득의 수필 <인연>을 펼쳤다.


“수필은 마음의 산책이다. 그 속에는 인생의 향취와 여운이 숨어 있는 것이다.” 9p

 

이 책은 작가의 일상을 담백하게 담아냈다. 그래서인지 작가의 인생 시간이 고스란히 묻어있다. 특히나 딸 서영이에 대한 애틋한 마음이 곳곳에 드러나 절로 미소 짓게 한다. 글을 쓰는 아빠를 둔 딸은 참 행복하겠다는 생각이 스쳐 지나간다. ‘잠이 깨면 바라다보려고 장미 일곱 송이를 샀다’는 문장을 보고, 중국 유학시절이 떠올랐다. 비가 토닥토닥 내리는 날이면 우산을 쓰고 꾸역꾸역 꽃 시장을 가곤 했다. 빗방울을 한껏 머금은 꽃들을 한참 구경하고, 빨간 장미 한 다발을 사서 꼭 신문지에 포장해달라고 했었다. 비 오는 날, 나는 그렇게 빗 방울을 머금은 빨간 장미를 무심한 듯 신문지에 둘둘 싸서 기숙사로 돌아오는 날이면 마음이 부자가 된 것 같아 참 좋았다. 그러고 보니 20대에는 꽃도 많이 샀었는데, 이제는 더 이상 꽃을 사지 않는 건 나이가 들어서일까. 나의 건조해진 감성 때문일까. 잠이 깨면 바라보고 싶어 장미 꽃을 샀다는 작가의 마음이 참 따뜻하게 느껴지는 날이다.   


“오랫동안 못 만나게 되면 우정은 소원해진다. 희미한 추억이 되어 버리기도 한다. 나무는 심는 것도 중요하지만 기르는 것이 더욱 어렵고 보람 있다. 친구는 그때 그때의 친구도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정말 좋은 친구는 일생을 두고 사귀는 친구다.” 96p


나에게는 특별한 친구가 있다. 우리가 만난 지는 22년이 되었다. 매일 만난 처음 2년을 제외하면, 20년동안 만난 횟수가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지만, 꾸준하게 연락을 주고 받는 사이이다. 나의 오랜 친구는 바로 고등학교 2학년 때 담임선생님이셨던 수녀님이다. 오랫동안 못 만나게 되면 소원해지는 것이 당연지사, 하지만 여전히 감사의 달 5월이면 마음을 담은 선물을 전하게 되고, 고운 빛깔로 물드는 계절 가을이면 영주 부석사의 가을 소풍 풍경을 기억해낸다. 여고시절, 선생님과 학생으로 만났던 우리의 인연은 지금까지도 자연스럽게 이어지고 있다. 내가 중국에서 공부할 때 수녀님은 나에게 책을 보내주셨고, 힘든 타국생활에 큰 위로가 되었다. 인연이라는 것이 참 신기한 게 지금은 수녀님이 중국에서 생활을 하고 계시고, 그때를 생각하며 매년 책을 보내드린다. 우리는 그렇게 잊지 않고 서로의 안부를 묻고, 서로의 안녕을 기도하는 사이를 이어가고 있다. 나이도, 종교도, 생활도 많이 다르지만 서로를 향한 진심은 통하는 법, 아마도 서로에게 바라는 것이 1도 없는 사이여서 우리의 우정은 오래오래 지속될 수 있었던 게 아닐까 싶다. 나는 요즘 가을이 오면 내 마음의 오랜 친구, 수녀님에게 선물할 책을 고르면서 그리움을 추억하고 있다. 좋은 친구는 서로에게 바라지 않고, 서로의 있는 그대로를 인정하며, 서로를 응원할 수 있는 사이여야 하지 않을까. 그래서 친구는 나이도, 성별도, 국적도 중요하지 않다. 나도 벌써 그런 친구가 그리운 나이가 되었다.  


"나는 아름다운 얼굴을 좋아한다. 웃는 아름다운 얼굴을 더 좋아한다. 그러나 수수한 얼굴이 웃는 것도 좋아한다." 69p


수필 <나의 사랑하는 생활>을 읽으면서 나의 일상을 떠올려본다. 그리고 바쁜 일상에 가려진 내가 좋아하는 나만의 생활을 기억 속에서 끄집어 내본다. 나는 파란 하늘을 좋아한다. 파란 하늘과 잘 어울리는 뭉게뭉게 하얀 구름 위를 뒹굴어보고 싶다. 나는 밤 하늘의 반짝이는 별을 좋아한다. 어느 곳에서나 고개만 들면 쉽게 만날 수 있지만, 올려다보지 않으면 누구나 볼 수 없는, 나는 그렇게 나만 바라보고 있는 밤 하늘의 작은 별이 고맙다. 나는 4월의 라일락 꽃 향기를 좋아한다. 여고시절 라일락이 한창이던 운동장 등나무 아래 벤치에서 깔깔 웃고 떠들던 그 때 그 시절의 그리움을 추억해본다. 나는 내 어깨에서 한 뼘 더 멀어지는 코발트 빛 가을 하늘을 좋아한다. 쓸쓸한 바람에 전해오는 가을내음을 안고, 가을방학의 담백한 노래를 들으면서 좋아하는 책 한 권과 마주하는 시간을 즐겨본다. 나는 지금의 나를 좋아한다. 그 동안 살아온 시간들 속에서 다양한 경험의 조각들이 모여 다른 사람과 나와의 다름을 인정할 줄 아는 내가 좋다. 


2018년 여름, 핑크색 피천득의 수필집은 침대 머리맡에 올려두고 펼쳐보기로 했다. 그렇게 몸도 마음도 휴식이 필요한 시간에 책 <인연>을 만났다. 수필을 읽으면서 나의 시간을 돌아보고, 내가 좋아하는 것들을 기억해보고, 보고 싶은 사람을 그리워해본다. 참 좋은 인연이다.


2018.08.10. 일상을 여행하는 S




매거진의 이전글 [사소한 일상] 불금은 일탈을 즐기기 딱 좋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