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명한 파도

뒤를 돌아보지 않아도 괜찮다

by 달콤한하루

오후 세 시의 햇살은 늘 비현실적이다. 베란다 창틀에 맺힌 먼지조차 반짝이는 그 평화로운 빛 아래서, 나는 우리가 나누었던 일 년의 시간들을 생각한다.
​그의 사랑은 늘 예고 없이 밀려왔다 썰물처럼 빠져나갔다. 신뢰라는 단어는 우리 사이에서 설탕처럼 녹아 없어졌고, 남은 것은 끈적한 의심과 그보다 더 질척이는 미련뿐이었다.


나는 매일같이 파도를 탔다. 그가 무심코 던진 짧은 답장 하나에 수평선 끝까지 올라갔다가, 약속을 어기는 뒷모습을 보며 심해로 가라앉았다. 어느 날부턴가 그는 나의 파도에 관심을 두지 않았다. 내가 울든, 숨이 차서 허우적거리든 그는 해변에 앉아 먼 곳을 바라보는 사람처럼 굴었다. "옆에 있어." 그가 나지막이 내뱉던 그 말은 다정한 청유가 아니라, 어쩌면 자기 자신을 확인하기 위한 이기적인 주문이었을지도 모른다.


​그가 떠난 자리에는 정적이 남았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나는 여전히 물에 젖은 장화를 신고 있는 기분이었다. 비는 이미 그쳤고 햇살이 내리쬐는데, 내 발등은 축축하고 무거운 감각에 짓눌려 있었다. 장화 속으로 흘러 들어온 것은 아마도 그가 준 불신과, 내가 홀로 흘린 눈물과, 끝내 버리지 못한 미련들이 뒤섞인 것이다.


한 걸음을 뗄 때마다 장화 안에서 질척이는 소리가 났다. 그 소리는 마치 "왜 아직도 여기 있느냐"라고 묻는 그의 무심한 목소리 같기도 했고, "이제 그만 벗어버려"라고 말하는 나의 가냘픈 다짐 같기도 했다.
​나는 제자리에 멈춰 서서 천천히 장화에서 발을 빼내었다. 툭, 하고 모래 위로 쓰러지는 장화의 소리는 생각보다 가벼웠다.


발목을 감싸던 축축한 냉기가 사라진 자리로 비로소 오후의 온기가 스며들었다.
​이제 내 앞에는 물이 없는 따뜻한 길이 길게 뻗어 있다.
​그 길은 완벽하게 말라 있어서, 발바닥에 닿는 흙의 감촉이 보드랍고 포근하다. 고여 있는 물웅덩이를 피하느라 신경을 곤두세울 필요도, 신발 속으로 차오르는 불신을 견뎌낼 필요도 없다. 그저 햇볕에 잘 구워진 식빵처럼 기분 좋은 온기만이 발가락 사이사이를 간지럽힌다. 누구의 시선도, 누구의 기대도 닿지 않는 곳. 그곳에는 아무도 없는 곳에서의 자유가 기다리고 있었다.


​나를 흔들어놓던 그의 눈빛도, 믿음을 구걸하던 나의 초라한 목소리도 이곳엔 존재하지 않는다. 누군가 옆에 있어야만 완성된다고 믿었던 시간들이 얼마나 부질없었는지 이제야 보인다. 아무도 없다는 것은 외로움이 아니라, 비로소 내가 나의 주인이 되었다는 선언이었다.


​나는 길 한복판에 멈춰 서서 크게 숨을 들이마신다. 가슴 깊은 곳까지 바짝 마른 깨끗한 공기가 차오른다. 타인의 감정에 주파수를 맞추지 않아도 되는 자유. 내 마음의 파도가 어디로 치든 누구에게도 미안해하지 않아도 되는 자유. 나는 이제 서두르지 않는다. 그저 이 온기를 충분히 누리며 천천히, 아주 천천히 걷는다.


​뒤를 돌아보지 않아도 괜찮다. 따뜻한 길은 다정하게 내 등을 밀어주고, 내 발자국은 젖은 흔적 대신 고요한 평온함으로 남을 테니까. 이 투명한 자유 속에서 나는 더 이상 누군가의 '옆'을 지키는 사람이 아니다. 나는 그저 온전히 나를 지키는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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