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지개여신(2006) / 쿠마자와 나오토 (1)

눈을 뜨기 전까지, 무지개는 결코 보이지 않는다

by 잌쿤

아침마다 강남역을 나오며 역사 내에 위치한 가게에서 빵과 음료 등을 적절히 조합한다. 부실한 아침식사지만, 몸이 무거운 출근길 중에도 따뜻한 커피에 어울리는 빵을 고민하는 시간은 나름의 소소한 행복감을 준다. 서둘러 계산을 마치고 가게를 나오는데 점원이 한껏 친절한 표정과 목소리로 '감사합니다'고 인사를 하면 살짝 아차싶은 심정이 들 때가 있다. 아, 나도 바쁘다는 핑계는 잠시 접고 밝은 표정으로 '수고하세요'라고 대답을 하면 좋았을 것을... 이런 별것 아닌 행동에도 바쁜 아침을 조금은 여유롭고 기분좋게 만드는 힘이 있다. 반대로 불친절한 점원을 만나면 나까지 아침 공기가 무거워진다. 대학 시절에 서빙이나 캐셔 아르바이트를 제법 오래 했었는데, 점원 입장에서도 손님의 태도에 따라 기분이 순식간에 변하는 경우가 다반사인 법이다. 그러고보면 편의점이나 식당에서 밝은 웃음으로 인사를 건네는 행위는 뭔가 멋쩍으면서도 한편으로 하지 않으면 찝찝한 모순이 있다. 특히 한국사람들은 자신의 기분을 쉽게 드러내지 않으려는 탓에 감정표현에 서투른 경향이 있다. 나 또한 마찬가지다.


내가 어려서부터 부모님께 가장 많이 듣고 자란 낱말은 '이까짓것' 또는 '그까짓것'이다. 부모님과 떨어져 살아서 이제는 들을 일이 거의 없지만, 아직 발음할 때 낱말의 길이와 억양까지 생생할 정도로 내 기억 속에 자주 등장하는 이 낱말에 대한 지분은 두 분이 거의 절반씩을 차지하고 있다. 부정적인 표현이긴 하지만 나는 단지 부모님이 힘든 시절을 겪어왔기 때문에 변화를 싫어하는 성향을 갖게되었을 뿐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내가 부정적인 표현을 좋아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사실 부모님은 두 분 모두 감정 표현에 서투르신 분들이다. 엄마는 항상 아들 둘밖에 없는 집안이라 공기가 무겁다고 한탄을 하셨지만 우리 형제가 집안에서 말이 없어진 데에는 자라온 환경이 상당한 영향을 미쳤기 때문이다.


학교에 진학하기 전 7살 무렵에는 초등학생(당시에는 국민학생)인 형이 집에 없으면 책장에 있는 백과사전을 잔뜩 꺼내놓고 엄마 옆에 앉아서 이것저것 물으며 읽었던 기억이 있다. 어린아이들이 으레 그러하듯, 나도 부모님의 칭찬을 듣기 위해 이것저것 의식하는 행동을 많이 했었다. 하지만 내가 하는 행위는 가차없이 '그까짓것'이라는 단어로 인해 가치를 상실했었고 그런 일들이 나이를 먹으며 점점 쌓여가자, 어느새 나는 부모님께 나의 행위와 목적을 차츰 숨기는 아들이 되어있었다. 그리고 충족되지 못한 욕구는 나를 외부 활동에 더욱 목마르게 했다. 밖에서는 여러 활동을 경험한다는 핑계로 온갖 잡일을 벌여놓지만 부모님께 선뜻 꺼내놓지 못하는 이유는, 더 이상 내 가치가 폄하되지 말았으면 하는 방어기제이자 일종의 트라우마다.


그런데 사람들을 만날수록 나와 비슷한 경험을 했던 사람이 의외로 많다는 점을 발견했고, 결국 이렇게 한 사람 한사람의 경험이 사회 전체적으로는 '무디어진 한국인의 감정표현'이라는 이름으로 논의되고 있음을 알았다. 자기 감정을 타인이 어떻게 생각할까에 지나치게 초점을 맞추다보면 어느 누구라도 쉽게 표현하기 힘들 것이다. 우리는 마치 자신의 감정마저 정답이 있는 것처럼 일괄적인 태도를 강요받으며 자기 의견을 써내려가는 숙제를 할 때에도 선생님의 눈치를 본다. 나보다 내 감정을 잘 아는 사람이 있을리 없는데도, 그 눈치는 수학 문제를 풀 때와 똑같이 '내가 정답을 맞게 썼는가?'에 기초한다.


어쩌면 감정표현은 대인관계에서 가장 핵심적인 부분일지 모른다. 문제는 우리가 감정표현이 서투르다는 이유로 놓치고 사는 것이 너무나 많을지 모른다는 점이다. 바쁘다는 핑계로 우리는 마치 고의로 자신의 인생에서 지워버린 것처럼 행동하지만, 사실은 후회라는 감정이 어릴 때 배웠던 '정답'이 아니기 때문에 애써 감추려는 겁쟁이에 불과하지는 않은가? 과거에 대한 후회는 정확히는 '과거의 행동'에 대한 후회인데, 과거에 '그렇게 행동하지 않았'음으로 인해 지금의 상황이 더 좋아졌을지 모른다는 기대 혹은 아주 중요한 것을 놓치고 지나갔다는 아련함이다. 그리고 '저지르고 후회하는 것이 아무 것도 안하고 후회하는 것보다는 낫다'고 말하는 것처럼, 우리는 변화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감정을 숨기고 그냥저냥 살면서 주변을 별로 인식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그리고 그러지 말았어야 했다는 나중의 후회를 예약하고 많은 것을 잃어버린다.



<2부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