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저리(1990) / 로브 라이너 (2)

'미저리 아줌마'는 주변 어디에나 있다

by 잌쿤
Misery(1990)


어쨌든, '집착'하면 떠오르는 대명사와도 같은 이름이 바로 1990년작 '미저리'이다. 영화를 보지 않은 사람이라도 그 이름으로부터 무시무시한 광기를 떠올릴 수 있을 정도로 '미저리'는 편집증적 집착의 상징과도 같은 존재가 되었다. 어느 동네에나 있을 법한 푸근한 인상의 캐시 베이츠가 러닝타임 내내 소름 돋는 연기력으로 영화 역사상 최고로 리얼한 사이코 캐릭터를 창조해냈다. 영화 제목 때문에 '미저리 아줌마'라고 알려져 있지만 이 아줌마의 극 중 이름은 '앤'이고 '미저리'는 앤이 집착을 보이는 대상의 이름이다. 하긴, 'Misery'라는 말이 사전적으로 '고통'이라는 뜻이기도 하고, 앤은 소설 미저리에 대한 광기 어린 집착을 보이고 있으니 '미저리 아줌마'라는 명칭도 틀린 것은 아니다.


플롯은 단순하다. '미저리'라는 소설 시리즈를 집필하던 인기 소설가 폴 셀던은 새로운 소설 시리즈를 구상하기 위해 외진 곳을 지나다 조난을 당하는데, 우연히 근처를 지나던 앤에게 구출되어 그녀의 간호를 받게 된다. 그러나 사실 앤은 미저리에 광적으로 집착하는 정신병자였고, 막 출간된 미저리 신간이 미저리의 죽음으로 완결되는 마지막 권이라는 것을 알게 되고는 미저리 이야기를 이어나가기 위해 폴을 감금하고 서서히 광기를 드러내기 시작한다. 폴을 걷지 못하게 하고 타자기를 가져다주어 억지로 미저리 이야기를 쓰게 만드는 등 미저리에 집착하는 앤과, 꼼짝없이 갇힌 채로 '대하소설 미저리'를 쓰던 폴의 탈출 시도가 영화의 주된 흐름이다.


영화 속 앤의 모습은 자신의 감정만을 강요하는 이해심 결핍자의 모습을 극대화한 표본에 가깝다. 폴과 앤의 관계를 남녀관계에 대입해보면 집착으로 상대를 힘들게 하는 유형의 사람이 투영된다. 소설 속 미저리가 상징하는 것은 폴의 감정이다. 폴은 미저리를 이만 끝내고 새로운 소설을 구상하려 하는데, 이를 두고 앤은 배신감을 느낀다. 그러나 앤의 감정이 분노 혹은 실망은 될 수 있어도 배신감이 될 만한 근거는 많이 부족하다. 폴은 앤에게 전혀 잘못한 것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앤의 입장은 확고하다. '내가 이렇게 미저리를 원하니 당신도 그에 상응한 피드백을 돌려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미 마음을 접은 상대에게 자신의 감정이 아직 남아있다는, 아주 빈약한 근거를 가지고 상대방의 입장을 철저히 무시한다.


앤이 폴에게 타자기를 가져다주고 미저리를 계속 쓰도록 하는 것은 계속해서 자신을 향한 마음을 유지하고 있기를 강요하는 행동이다. 그러나 앤이 가져온 타자기는 'N'이 빠져서 없다. 그래서 앤은 자신이 직접 타이핑된 원고에 'N'을 써넣겠다고 한다. 여기서 앤과 'N'을 동일시하면 이렇다. 폴이 계속 미저리를 쓰고는 있으나 강압에 의해서 강제로 쓰고 있을 뿐, 그 안에 더 이상 앤(N)은 없다. 강요에 의해 미저리를 계속 공급받고 있는 앤은 N을 써넣는 행위를 통해 폴의 미저리를 완성시키고자 하는 마음을 표현한다. 그러나 타자기로 쓰인 원고에 아무리 정교하게 손글씨를 써넣어봐야 자연스럽게 원고가 완성되는 것은 불가능하다.


세상을 관찰하다 보면 놀라울 정도로 많은 사람들이 오직 자신의 감정만을 근거로 바람직하지 못 한 행동들을 정당화한다. 최근 사회적인 이슈로까지 번지고 있는 '갑질' 논란, '맘충' 논란 등의 사례 중 상당수가 이러한 유형이다. '내가 원하니 당신은 나를 배려해야만 해' 정도밖에는 생각이 미치지 않으면서도 성숙한 어른인 척하기 위해서 갖은 논리적인 이유를 붙이려고 하지만 결국은 '내가 원하는 대로 당신이 하지 않기 때문'일 뿐, 어린아이만도 못 한 앙탈이다.


'미저리'의 앤도 그렇다. 탈출 시도가 실패할 때마다 폴은 점점 더 큰 고통의 대가를 치러야만 했다. 그런데 그렇게 고통스러워하는 폴을 보며 더없이 슬픈 표정을 짓는 앤의 모습이 압권이다. 그냥 조용히 이 곳에서 나를 위해 미저리를 계속 써주면 될 것을, 자꾸 당신이 나를 떠나려고 하니 이렇게밖에는 할 수 없었다는 슬픔이다. 그러면서 떠나려고 하는 당신이 잘못한 것이란다. 나는 아무런 잘못이 없는 것 같은데, 주변 사람들이 내게 '자기중심적'이나 '이해심이 부족하다'는 표현을 쓴다면 '미저리'를 보고 자신의 모습을 돌아보자. 바로 내가 지금 누군가의 앤이지는 않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