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의 시간에 한참 자리를 비우고 돌아온 뒤 부재중 전화를 보고 전화를 걸었다가 대뜸 짜증 섞인 핀잔을 들을 때가 있다. 급한데 왜 전화를 받지 않았느냐는 것이다. 사정을 듣고 나면 과연 조급했던 심정이 이해가 가기는 하다. 하지만 짜증을 토로하고 급한 용무를 해소하여 속이 풀린 상대방과는 반대로, 시간이 지나면 슬슬 짜증이 기어오르는 것은 내 쪽으로 역전된다. 왜냐하면 나는 잘못한 일이 하나도 없기 때문이다. 급한 것은 내 사정이 아니다. 설령 나와 관련된 일이라고 하더라도, 사람이 항상 전화를 받을 수 있는 상황에 놓여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전화를 받지 못한 것을 두고 내가 지탄을 받을 이유는 없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그런 나조차도 막상 급할 때 상대방이 전화를 받지 않으면 상대방에 대한 원망과 비난의 마음이 생겨나기 시작한다. 머리로는 알고 있어도 당장 시급한 문제에 대해 진행을 할 수가 없는 답답한 마음이 죄 없는 상대방을 죄인으로 만드는 것이다.
그러고 보면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사람이 어느 날 갑자기 서운한 감정을 꺼내 드는 경우가 있다. 내게 뭔가 불만이 있었지만 말 못 하고 있다가, 말하는 게 좋을 것 같았다는 생각이 들었단다. 어쨌든 감정을 풀기 위해 용기를 낸 것이기 때문에 나로서는 고마운 일이지만 서운했다는 얘기를 듣는 것이 아무래도 기분 좋은 일일 리 없다. 그런 말을 듣고 나면 문득 내 주변 사람들이 나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을지에 주의가 쏠리기 시작한다. 타인이 나를 생각하는 감정을 수치화할 수 있다면, 그 수가 많을수록 또는 나와의 관계가 깊을수록 총합의 크기는 커지게 될 것이다. 나는 이제껏 그 크기를 키우기 위해 노력하고 있었지만, 그 안에 부정적인 감정이 얼마만큼의 비중을 차지할까에 생각이 미치면 문득 두려움에 가까운 생각도 든다.
인간 사회에서 수많은 타인과의 거미줄 관계를 형성하다 보면 모든 인간관계가 같은 굵기의 수평선을 그리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일찍 깨닫게 된다. 단 두 사람 사이에서의 직선 관계도 거의 항상 쌍방이 느끼는 감정이 서로 전혀 다른 비대칭적인 구조를 보인다는 점도 놀라운 일은 아니다. 이러한 감정 불균형의 원리는 대부분의 경우 '이해심의 부족'으로 인해 발생된다. 나로부터 뻗어나가는 감정선의 굵기는 알겠는데, 나에게로 향하는 감정선의 굵기를 정확히 아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필요한 것이 이해심과 배려이다. 서로를 향한 감정의 크기가 다르다는 것을 명확히 인지하고 그 불균형을 충분히 고려하여 행동하는 것이 이해심의 기본자세가 아닐까. 그런데 이해심이 부족한 사람들은 타인과의 관계에서 상호 감정의 크기를 섣불리 속단하고 판단하여 행동한다. 이것은 "내가 이만큼 성의를 보이고 있으니 당신은 나를 위해 이만큼을 해야 해"라는 일종의 보상심리가 작용하는 기제이기도 하다.
한 직장동료에게 술을 마시러 가자고 했다가 거절당했는데, 이유인즉슨 여자 친구가 어플을 통해 자신의 위치를 추적하고 있어 회사 근처를 벗어나기 힘들다는 것이었다. 또 한 지인은 최근 스토킹 수준으로 집착하는 상대방을 만나 감정적 어려움을 토로하기도 하였다. 이해심이 가장 필요하면서도 가장 이루어지기 힘든 분야가 특히 남녀관계다. 이렇게 상대방에게 집착하는 스타일의 연애를 하는 사람이 있다. 이런 부류의 사람들은 이성에 대해 헌신적인 경향을 보이지만, 상대방에게도 비슷한 수준의 헌신을 강요한다. "내가 이렇게 당신을 위해 헌신하고 있으니 당신도 그렇게 해야 해"라는 식으로 계약하지도 않은 의무를 제멋대로 씌운다. 위치추적같이 상대를 불편하게 하는 행동도 "다 너를 사랑하기 때문에" 그러는 거라며 자기 안에서는 이미 완벽한 면죄부 발급을 마쳤다.
집착(執着)이란 마음이 한 곳에 쏠려 떨어지지 않는다는 뜻이라고 한다. 붙을 착(着)이라는 글자를 쓰는데, 온갖 생각이 한 곳에만 붙어있어 정상적인 생활이 불가능한 지경을 말하는 것 같다. 그러고 보면 '착 달라붙다'는 표현에서 말하는 '착'이 의성어가 아니라 한자였나? 쓸데없이 궁금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