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걸작 시리즈를 설명하기 위해서는 매우 다양한 관점과 수식어들이 필요하겠지만, 협상의 측면에서만 보더라도 3편이자 최종편인 매트릭스-레볼루션(2003)에서 등장하는 주인공 네오의 대담한 협상 장면은 매우 훌륭한 논평의 주제가 될 수 있다.
저항세력의 최후의 보루인 '시온'을 기계들에게 발각당한 인간들은 수많은 센티넬들의 공격을 받게 되고, 인간들은 절대로 이길 수 없는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마지막까지 기계들에 맞서 싸운다. 한편 네오와 트리니티는 인류의 구원을 위해 목숨을 걸고 이제까지 누구도 가본 적 없었던 기계들의 도시로 향한다. 그곳에서 기계들의 절대자(Deus Ex Machina)를 대면한 네오는 변종 바이러스가 되어 매트릭스와 기계 세계 내부를 잠식해오던 요원 '스미스'의 퇴치를 조건으로 절대자와 담판을 벌인다.
협상의 조건으로 볼 때 매트릭스의 네오는 이제까지 있었던 어떠한 이야기의 주인공보다도 열악한 환경에 처해 있다. 대부분의 인류를 지배하는 기계 왕국에 비하면 절망적이라고밖에 말할 수 없는 인간 세력의 저항은 처절하기까지 하다. 어차피 인류가 기계에 굴복하고 전멸당할 것은 시간문제였다. 기계 도시로 가는 험난한 여정 동안 트리니티는 죽었고, 부상으로 시력을 잃게 된 네오는 아무 힘없는 나약한 한 사람의 인간에 불과했다. 절대자는 손만 뻗으면 '인류의 희망'으로 불리는 눈 앞의 네오를 제거하는 것은 너무나 간단했다. 그토록 찾아다니던 시온의 위치를 발견했으니 이르면 하룻밤 안에 기계는 인간에게 완전한 승리를 얻을 수 있었다. 절대자가 네오와 협상을 할 이유는 어디에도 없어 보였다.
그러나 네오는 기계들이 인류 말살보다 더 신경 쓰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 바로 너무나 커져버린 스미스의 존재, 그것이 인류보다 훨씬 더 직접적으로 기계들에게 치명적인 피해를 입히고 있으며 기계들은 뚜렷한 해법이 없이 속수무책으로 당하고 있다는 것. 그리고 지금처럼 매트릭스가 스미스에게 잠식당한 상태로는 머지않아 기계는 동력을 잃고 전멸하고 말 것이라는 점이다.
바로 그 점을 네오가 정확히 꿰뚫고 있었다는 점이 중요하다. 네오는 기계들의 절대자 앞에 서기 위해 너무나 많은 것을 희생했고 무사히 돌아갈 생각은 이미 버린 상태라고 보는 것이 맞다. 어차피 인류가 멸망을 눈앞에 둔 시점에서 더 이상 물러설 곳 없는 배수의 진 앞에 서있기에 네오는 흔들림 없이 절대자의 눈높이에서 당당한 한마디를 던질 수 있었다.
"당신은 못해요... 하지만, 나는 할 수 있소."
이 말을 던지는 네오의 모습은 결코 비굴함이나 두려움 없이 상대방과 원하는 것을 '교환'하는 대등한 입장이었다. 그것은 절대자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정확히 파악하고 있으며 당신이 하지 못하는 것을 내가 제공할 수 있다는 확신에서 나오는 당당함이다. 그다음 절대자의 답변은 '무엇을 원하는가?'였다. 네오가 내세운 협상의 조건을 거의 납득했다는 뜻이다. 동시에 이는 자신이 스스로 스미스 문제를 해결할 수 없음과 네오의 조건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입장임을 시인하는 발언이기도 하다. 분노는 잠시, 결국 절대자는 자신이 네오가 내세운 조건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는 점을 인정해야만 했다.
누군가로부터 원하는 바를 얻기 위해 감정에 기대어 하소연으로 일관하는 사람들이 있다. 가엾은 처지를 한껏 강조하여 동정표를 얻어보겠다는 속셈이다. 그러나 그렇게 해서 상대의 동정심을 얻어낸다고 해도, 기브 앤 테이크의 협상을 통해 얻어낸 것과는 속성이 전혀 다르다. 협상은 자신이 을의 입장에 있다고 하더라도 상대와 대등한 위치에 서게 해주는 위력이 있다.
'매트릭스' 세계관의 인류는 을 정도가 아니라 아예 멸종이 코앞에 닥친 위급한 신세였다. 상대방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가? 그것이 위기 탈출의 첫 번째 단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