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트릭스-레볼루션(2003) / 워쇼스키 (1)

당신은 못해요.. 하지만, 나는 할 수 있소

by 잌쿤

스무 살 때 아파트 문에 전단지를 붙이는 아르바이트를 했던 적이 있다. 추운 겨울에 언 손을 녹여가며 아파트 단지를 이리저리 뛰어다니는 일이 결코 쉽지 않았지만 고생에 비해 수입은 용돈벌이 수준에 불과했다. 특히 가장 힘든 것은 할당량을 채우는 것인데, 하루 수백 장에 달하는 전단지를 모두 소진하려면 할당된 지역 거의 대부분의 집마다 한 장씩 붙이고 다녀야 했다. 수백 장을 다 붙이려면 테이프도 모자라서 몇 개씩 가방에 넣고 다녀야 했다.


일이 익숙해지면 제법 테이프를 떼어서 전단지 붙이는 속도가 빨라지는데, 문제는 아파트마다 외지인의 출입을 감시하는 경비원들의 눈이다. 한 번 '전단지 붙이러 온 놈'으로 걸리면 그날 그 단지는 종 쳤다고 봐야 하지만 그렇게 되면 주어진 할당량을 채우지 못하게 된다. 가끔 업주가 제대로 붙였는지 확인을 하러 지역을 돌 때가 있어서 제대로 일을 하지 않으면 발각이 될 위험도 있었다.


한 번은 아파트에 지인이 있는 척 침입하려 한 적도 있었다. 가장 흔한 이름으로 가상의 주민을 설정하고 이러저러한 사람을 만나러 왔소 하면 혹시 넘어가지 않을까 했지만 경비라는 일이 그리 소홀히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나이도 지긋하신 분이 어찌 그리 기억력도 좋은지 본인이 들어본 적이 없는 이름이라며 확인을 하려던 순간, 눈물을 머금고 실패를 받아들여야 했었다. 같은 일을 하는 어떤 사람들은 얌체같이 전단지를 일부 빼돌리고 아파트에 붙인 척하는 경우도 있는데, 붙이기만 하면 귀신같이 경비원들이 떼어가니 한 두 번은 업주의 눈도 속일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전단지 배포를 의뢰하는 사람들도 그런 쪽에는 잔뼈가 굵은 터라 금방 발각되기 일쑤다. 또 개중에는 경비원과 크게 싸우기까지 하는 사람도 있었다.


'나는 전단지를 붙여야 한다. 그렇다면 붙일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라고 나 중심으로 생각해서는 해답을 얻기 힘들다. 아파트에 전단지를 붙이는 행위는 나 혼자만의 문제가 아니라 경비원 입장에서도 이해관계가 있으므로 나와 경비원의 쌍방 관계로 해석해야 한다. '나는 전단지를 붙여야 한다. 경비원은 전단지를 제거해야 한다. 그렇다면 쌍방의 윈윈 전략은 무엇일까'로 입장을 다각화해야 답을 얻을 수 있다. 나는 곧 결단을 내리고 다음날 당당히 경비실에 찾아가 문을 두드렸다.


"선생님. 솔직히 저는 여기 이 전단지를 붙이러 온 사람입니다. 하지만 선생님께서는 단지 내에 전단지를 떼어야 할 의무가 있지요. 그러므로 저는 전단지를 붙이기 위해서 몰래 아파트에 숨어 들어가느라 고생이고, 저 같은 사람 때문에 선생님께서는 매일 고층을 오르내리며 전단지를 수거하느라 고생하시지 않습니까? 여기 보니 단지 내 이백 여 가구 정도 되던데, 여기 전단지 이백 장을 드릴 테니 저는 몰래 들어와 붙인 것으로 하고, 선생님은 단지를 돌며 일일이 수거한 것으로 하시지요. 대신 저도 업주의 눈이 있으니 단지 입구와 입구 쪽 가장 가까운 아파트의 1층, 딱 두 군데만 붙이고 가겠습니다."


환하게 웃는 경비원의 표정과 함께 협상은 체결되었다. 이렇게 협상은 우리 생활 내에 광범위하게 적용될 여지가 있다.(물론 아르바이트생의 입장에서 근무태만을 저지른 격이므로, 이런 방법은 사용해서는 안 된다) 전단지를 붙이는 것은 내가 원하는 것이고, 이를 저지하는 세력을 방해꾼으로만 간주하여 내가 원하는 것만을 주장하면 갈등이 고조될 수밖에 없다. 경비원은 엄연한 상대방이다.(심지어 법적, 도덕적으로 보아도 경비원이 옳은 쪽이고, 전단지를 몰래 붙이는 내가 나쁜 쪽이다) 상대방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고 그것을 채워주는 방향으로 대화를 진행해야 서로 만족스러운 결과를 얻을 수 있다.


협상은 승패의 싸움이 아니다. 상대방의 요구를 채워주는 동시에 내가 원하는 것을 얻어가는 것이다. 무조건 싸게, 무조건 편하게를 요지부동으로 외치는 사람들이 있다. 특히 자신이 갑의 입장에 있다고 생각할 때 무리한 요구가 더욱 심해진다. 가게에서 점원의 실수로 불이익을 봤을 때에는 화를 내고 점원에게 윽박지르며 자신이 갑의 입장에 있다는 사실을 한껏 즐기기보다, 너그러운 웃음으로 넘기며 다음에 찾을 때 가벼운 서비스라도 하나 챙겨달라고 얘기하는 것이 장기적으로 훨씬 이득이다. 이것 또한 '곤란한 상황을 모면하고자 하는' 직원의 요구를 채워주고 더 나은 친절과 서비스를 얻어가는 작은 협상의 방법이다.



<2부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