흐르는 강물 위, 불완전한 인간이 낚아 올린 은총의 파편들
세대 간의 갈등이 극에 달하고 어제의 상식이 오늘의 구태가 되어버리는 급변하는 현대 사회에서, 과연 '순리(順理)'라는 단어는 어떤 가치를 지닐 수 있을까. 우리는 종종 순리를 따르는 삶을 수동적이거나 체제 순응적인 태도로 폄하하곤 한다. 그러나 로버트 레드포드 감독의 영화 <흐르는 강물처럼>은 몬태나의 대자연과 그 속을 유유히 흐르는 블랙풋 강(Blackfoot River)을 통해, 순리란 단순히 흐름에 몸을 맡기는 것이 아니라 거대한 시간의 섭리 안에서 인간이 취할 수 있는 가장 겸허하고도 치열한 삶의 태도임을 역설한다.
영화는 엄격한 장로교 목사인 맥클레인과 그의 두 아들 노먼, 폴의 삶을 플라이 낚시라는 행위를 매개로 조명한다. 맥클레인 목사에게 있어 낚시와 신앙은 분리되지 않는 하나의 세계다. "제자들은 모두 낚시꾼이었고, 예수도 낚시꾼이었다"는 그의 말처럼, 그에게 플라이 낚시는 신의 리듬을 배우는 경건한 의식과도 같다. 그는 10시와 2시 방향 사이를 오가는 4박자의 리듬을 강조하며, 아직 어린 두 아들에게 메트로놈을 켜놓고 엄격한 규율을 가르친다.
여기서 우리는 이 가족이 '강(River)'이라는 거대한 순리를 대하는 태도, 즉 낚시를 하는 '위치'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아버지는 언제나 강가에서 멀찌감치 떨어져 낚싯줄을 던진다. 이는 절대자인 신과 그가 만든 섭리에 대해 인간이 가져야 할 경외심과 거리감을 상징한다. 그는 강물에 발을 담그기보다는 그 흐름을 관조하며, 정해진 규범과 도덕 안에서 순응하는 삶을 대변하는 인물이다. 그에게 있어 삶이란 흐트러짐 없는 박자 위에서만 비로소 온전해지는 것이었다.
장남 노먼은 이러한 아버지의 가르침을 충실히 이행하는 모범적인 아들이자, 동시에 끊임없이 사유하고 관찰하는 지식인이다. 그는 강가 가까이 서서 흐름을 읽으려 노력하지만, 결코 무모하게 뛰어들지는 않는다. 그는 몬태나를 떠나 동부의 대학으로 향하고, 그곳에서 워즈워스의 시와 문학을 공부하며 '언어'와 '이성'으로 세상을 이해하는 법을 익힌다. 노먼은 훗날 이 모든 이야기를 기록하는 서술자가 되는데, 이는 그가 강물의 흐름을 거스르지 않으면서도 그 흐름 밖으로 나가 자신의 길을 개척하는, 이성적이고 관조적인 자아의 표상임을 보여준다.
그러나 차남 폴은 다르다. 폴은 아버지의 엄격한 메트로놈 박자를 거부하고 자신만의 리듬인 '그림자 캐스팅(Shadow Casting)'을 창조해낸다. 흥미로운 점은 그가 낚시를 할 때 취하는 위치다. 폴은 언제나 강물 한가운데로, 그 거센 물살이 허리춤까지 차오르는 위험한 지점까지 거침없이 걸어 들어간다. 때로는 목숨을 걸고 조잡한 보트 하나에 의지해 폭포수에 몸을 던지기도 한다. 이는 폴이 단순히 아버지의 규율을 어기는 반항아가 아님을 시사한다. 그는 규율(형식)은 거부했으나, 강(본질) 그 자체와는 가장 밀접하게 닿아있는 인물이다.
그는 몬태나를 떠나지 않았다.
규율을 거부했으나 강을 떠날 수는 없었던 그는,
강물과 분리된 채 관조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강물의 일부가 되어
그 거친 흐름과 사투를 벌이는, 지극히 감각적이고 예술적인 영혼이었다.
여기서 우리는 폴의 직업이 '기자'라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아버지와 노먼이 성경과 문학이라는 형이상학적이고 추상적인 '글'을 다루는 사람들이라면, 폴은 몬태나의 사건 사고, 범죄, 정치와 같은 지극히 현실적이고 적나라한 '팩트(Fact)'를 다루는 사람이다. 가장 고상한 글을 쓰는 노먼이 삶에서는 한 걸음 물러나 관조를 택한 반면, 가장 건조한 사실을 쓰는 폴은 역설적이게도 삶을 온몸으로 부딪치며 살아가는 '예술' 그 자체로 승화시킨다. 폴은 아름다움을 글로 묘사하는 것이 아니라, 시궁창 같은 현실의 한복판에서 뒹굴며 자신의 육체로 아름다움을 체현해낸 것이다.
영화는 이러한 폴의 삶을 위태로우면서도 찬란하게 그려낸다. 급류에 휩쓸려 죽을 것 같았던 순간, 도박 빚 때문에 생이 끝날 것 같았던 위기의 순간마다 폴은 보란 듯이 살아남아 더욱 빛나는 성취, 즉 '대어'를 낚아 올린다. 특히 영화 후반부, 급류에 몸을 맡긴 채 거대한 물고기와 사투를 벌이는 장면은 압권이다. 아버지는 낚은 고기의 크기를 두고 반농담 삼아 '주님의 은총'이라 말하곤 했는데, 폴이 마지막에 낚은 것은 비록 순리(규율)대로 살지 않더라도 치열하게 삶을 마주한 자에게 임하는, 신의 압도적인 은총이었을지도 모른다. 그 순간 폴은 강 위에서만큼은 그 누구도 범접할 수 없는 완벽한 예술가가 된다.
그러나 예술은 영원할지라도 인간의 육신은 나약하다. 폴은 결국 어느 어두운 골목길에서 폭행에 휘말려 허무한 죽음을 맞이한다. 그토록 강렬했던 생명력이 어떠한 전조도 없이, 그저 '객사했다'는 짧은 소식으로 종결되는 순간 관객은 예술 앞에서 죽음이란 얼마나 덧없고 허무한 것인가를 뼈저리게 느끼게 된다.
폴의 부고를 전해 들은 아버지가 노먼에게 던진 첫 질문은 "어느 쪽 손이 으스러졌느냐"였다. 이는 단순한 사실 확인이 아니었다. 그것은 아들이 평생을 바쳐 세상과 소통하고 자신의 가치를 증명해 보였던 '오른손', 즉 그의 예술혼이 마지막 순간까지 온전했는가를 묻는 비통한 확인이었다. 오른손이 으스러졌다는 것은 곧 폴의 우주가 파괴되었음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나중에 아버지는 설교단에서 폴을 회고하며 "그는 아름다웠다"고 고백한다. 비록 아버지의 도덕적 규율로는 도박과 술에 찌든 아들의 삶을 이해할 수 없었지만, 강물 한가운데서 자신만의 리듬으로 빚어낸 아들의 예술성만큼은 거부할 수 없이 사랑했음을 시인한 것이다.
"우리는 그를 도울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사랑할 수는 있습니다."
"완전히 이해할 수는 없어도, 완벽하게 사랑할 수는 있습니다."
이 영화의 마지막 설교는 우리가 타인을, 그리고 세상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에 대한 묵직한 해답을 제시한다. 우리는 종종 사랑하는 사람을 내 방식대로 이해하려고 하고, 이해가 되지 않으면 고통스러워하며 그들을 바꾸려 든다. 마치 아버지가 폴에게 메트로놈의 박자를 강요했던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진정한 사랑은 이해의 범주를 넘어선 곳에 존재한다. 이해할 수 없는 비극조차도, 규율을 벗어난 파격조차도 그 존재 자체로 끌어안는 것, 그것이 바로 영화가 말하는 구원(Grace)이다.
영화의 원제인 <A River Runs Through It>은 한국어 제목인 '흐르는 강물처럼'보다 훨씬 더 심오한 뜻을 내포하고 있다. '그 위로 강물이 흐른다'는 것은, 강물에 뛰어드는 사람(폴)도, 강물을 관망하는 사람(노먼)도, 그리고 그들을 바라보는 신의 시선(아버지)도 결국은 하나의 거대한 시간 속에 융합되어 흘러간다는 뜻이다. 바위 위 빗방울 아래에는 말씀이 있고, 그 말씀 밑으로 강물은 쉬지 않고 흐른다. 강물은 선한 자와 악한 자, 이해되는 것과 이해되지 않는 것을 구분하지 않고 모두 품어 안은 채 영원을 향해 나아간다.
노인이 된 노먼은 다시 강가에 서서 독백한다. "결국 모든 것은 하나로 융합되고, 그 위로 강물이 흐른다." 인생의 기쁨과 슬픔, 성공과 실패, 그리고 영원히 이해할 수 없었던 동생의 죽음까지도, 몬태나의 협곡을 흐르는 저 강물 속에서는 모두 하나의 풍경이 된다.
우리는 지금도 갈등과 반목의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서로가 서로를 이해하지 못해 비난하고, 자신의 '리듬'만이 옳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흐르는 강물처럼>은 우리에게 조용히 묻는다. 당신은 강가 멀리서 관조할 것인가, 아니면 강물 속으로 뛰어들 것인가. 그리고 우리 곁을 스쳐 지나가는 이해할 수 없는 존재들을, 이해하려 애쓰는 대신 그저 온전히 사랑할 수 있겠는가. 폴이 남긴 아름다운 낚싯줄의 궤적처럼, 우리의 삶 또한 비록 불완전할지라도 그 자체로 신의 은총이 머무는 예술이 될 수 있음을, 영화는 묵묵히 흐르는 강물을 통해 보여주고 있다. 이해가 아닌 사랑만이, 흐르는 강물 위에서 우리가 붙잡을 수 있는 유일한 구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