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이와 반복의 미학, 그리고 일상의 구원
MZ세대를 비롯한 현대인들이 살아가는 오늘날의 사회는 그 어느 때보다 빠르고 폭력적인 변화의 속도를 강요하고 있다. 자본주의와 디지털 기술의 눈부신 결합은 우리의 일상을 쉴 새 없이 몰아붙이며, 어제와 같은 오늘을 살고자 하는 자들에게 으레 '정체'나 '도태'라는 서늘한 낙인을 찍기 일쑤다. 세상은 끊임없이 진보해야만 한다는 믿음 아래, 사람들은 저마다 강박적으로 미래를 계획하고 다가올 변화에 선제적으로 대응하기 위해 현재의 시간을 담보 잡힌 채 살아간다. 세상의 거대한 톱니바퀴 속에서 개인은 어떻게든 그 변화의 속도에 발맞추려 아등바등하지만, 역설적이게도 그럴수록 존재론적 불안과 내면의 허무주의는 더욱 깊어만 간다. 변화하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다는 강압, 그러나 그 변화의 맹목적인 질주 끝에 무엇이 기다리고 있는지 알 수 없다는 근원적인 두려움. 어쩌면 이것은 고도화된 현대 사회를 살아가는 이들이 불가피하게 앓아야만 하는 시대적 신경증이자 성장통일런지도 모르겠다.
빔 벤더스 감독의 영화 <퍼펙트 데이즈>는 이러한 시대적 강박과 속도전에 대해 지극히 정적이고도 압도적인 반기를 드는 작품이다. 도쿄 시내의 공중화장실 청소부로 살아가는 주인공 '히라야마'의 삶은 속도와 효율을 숭배하는 현대인의 시각에서 본다면 지루함을 넘어 기이할 정도로 멈춰서 있다. 그는 매끄러운 알고리즘이 추천하는 스마트폰 영상 대신 헌책방에서 고른 낡은 문고본의 활자를 더듬고, 스포티파이가 뭔지도 모른 채 스트리밍 서비스 대신 구형 카세트테이프의 둔탁한 마찰음을 들으며, 최신식 디지털카메라 대신 필름의 남은 장수를 헤아려야 하는 올림푸스 카메라로 사진을 찍는다. 매일 아침 골목을 쓰는 빗자루 소리에 정확히 눈을 뜨고, 애지중지하는 식물에 물을 주며, 자판기에서 캔 커피를 뽑아 마시고, 정해진 동선에 따라 타인의 오물이 묻은 변기통을 닦아내는 그의 일상은 하나의 완벽하고도 거룩한 의식처럼 매일 반복된다. 사회의 가장 낮은 곳에 위치한 육체노동이자, 인공지능 시대에도 아직까지 로봇으로 온전히 대체될 수 없는 인간 고유의 몫을 그는 자신의 업으로 기꺼이 껴안고 살아간다.
그러나 히라야마가 구축한 이 견고한 루틴은 급변하는 사회에 적응하지 못해 도망친 패배자의 폐쇄적인 요새가 결코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일상 속에 숨겨진 미세한 파동과 생동감을 예민하게 포착하기 위해 스스로 닦아놓은 '비워진 캔버스'에 가깝다. 프랑스의 철학자 질 들뢰즈가 설파한 '차이와 반복'의 개념처럼, 완전히 동일해 보이는 쳇바퀴 같은 일상 속에서도 사실 단 하루도 완벽하게 똑같은 날은 존재하지 않는다.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잎 사이로 부서지는 햇살을 뜻하는 '코모레비(木漏れ日)'의 모양이 매 순간 다르듯, 그가 매일 마주하는 빛과 바람, 낯선 이와의 우연한 눈 마주침은 매번 유일무이하다. 히라야마가 굳이 육체적인 노동과 아날로그적인 사물들을 고집하는 이유는, 세상이 강요하는 거창하고 인위적인 변화를 좇는 대신 삶의 표면에 맺히는 아주 작은 균열과 차이를 물리적인 감각으로 온전히 흡수하기 위함이다. 매일 동일한 삶의 궤적을 유지하기에, 그는 나무 밑에 피어난 자그마한 새싹의 생명력이나 낯선 이가 화장실 구석에 남겨둔 틱택토 게임의 다음 수 같은 사소한 경이로움을 누구보다 명징하게 감각하며 살아있음을 느낀다.
이러한 히라야마의 굳건한 가치관은 평온했던 그의 삶에 외부의 이물질이 개입했을 때 더욱 선명하게 그 모습을 드러낸다. 가출한 조카 '니코'의 갑작스러운 등장은 그의 완벽하게 통제된 일상에 작은 파문을 일으킨다. 니코는 삼촌의 낯선 일상을 호기심 어린 눈으로 좇으며 함께 시간을 보내는데, 어느 날 자전거를 타고 가던 중 바다를 보러 가자는 조카의 제안에 히라야마는 흔쾌히 동의하면서도 당장 언제 갈 것이냐는 끈질긴 물음에는 "나중은 나중, 지금은 지금(今度は今度、今は今)"이라며 선을 긋는다. 일반적인 관계의 역학에서는 어른 특유의 애둘러 치는 거절이나 모호한 회피로 보일 수 있는 이 대목은, 사실 이 영화의 뼈대를 지탱하는 가장 핵심적인 철학적 선언이라 할 수 있다.
히라야마는 미래의 특정한 사건(바다에 가는 것)을 오늘 확정 지음으로써, 인위적으로 자신의 일상에 변화의 이정표를 세우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우리는 대개 달력에 무언가를 기입하고 미래를 촘촘히 계획함으로써 안도감을 얻지만, 그 순간 '현재'는 다가올 미래를 향해 가기 위한 초조한 수단이나 대기실로 전락하고 만다. 히라야마는 미래라는 불확실성을 억지로 현재로 끌고 들어와 '지금'의 충만한 가치를 훼손하는 것을 극도로 경계한다. 조카와의 약속을 한사코 미루는 것이 아니라, 자전거 페달을 밟으며 두 뺨을 스치고 지나가는 오늘의 바람이 미래 어느 날의 바다보다 결코 덜 중요하지 않음을 역설하는 것이다. 일상의 변화를 스스로 만들지 않겠다는 고집은 곧 다가오지 않은 미래를 통제하려 들지 않고 오직 '지금 이 순간'에만 머물겠다는 숭고한 다짐이며, 이는 현재를 가장 완벽하게 긍정하는 자만이 가질 수 있는 단단한 삶의 방식이다.
하지만 한 개인의 일상을 아무리 견고하게 통제하고 미시적인 행복에 자족한다 할지라도, 인간은 결국 우주적 차원의 거대한 변화, 즉 생로병사라는 맹목적인 섭리를 결코 피해 갈 수 없는 나약한 존재이다. 영화 후반부, 단골 스낵바의 여주인인 '마마'와 그녀의 전남편 '토모야마'를 둘러싼 에피소드는 이 작품이 단순히 일상의 소박함을 예찬하는 동화적 낭만에 그치지 않고, 변화를 두려워하는 인간 실존의 비극성까지 깊숙이 끌어안고 있음을 증명한다. 마마는 극 중에서 "왜 우리의 일상은 변하지 않으면 안 되는 걸까요?"라며 회한 섞인 깊은 탄식을 내뱉는다. 이 절절한 대사는 평온한 일상의 영원한 유지를 갈망하면서도 끝내 무정한 시간의 흐름과 관계의 소멸 앞에서 속수무책일 수밖에 없는 인간의 뼈아픈 딜레마를 정통으로 관통한다. 영원히 머물고 싶으나 끝내 모든 것은 변하고 스러진다는 진리 앞에서, 인간은 필연적으로 절망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특히 암에 걸려 시한부 선고를 받은 토모야마의 극적인 등장은 히라야마의 내면에 거대한 슬픔의 파장을 일으킨다. 매일매일이 어제와 같이 고요하기만을 바라는 히라야마에게, 죽음이라는 돌이킬 수 없는 절대적인 변화를 목전에 둔 동년배 사내의 모습은 단순한 연민을 초월하여 자신의 미래에도 예외 없이 닥칠 운명적 예감으로 다가왔음이 분명하다. 늦은 밤, 강가에서 만난 두 남자가 캔 맥주와 담배를 나누어 피우고 서로의 짙어진 그림자를 밟으며 유치한 그림자밟기 놀이를 하는 장면은 그래서 형언할 수 없이 서글프고 아름답다. 그림자가 겹치면 과연 더 어두워지는지를 두고 실없는 농담을 나누며 어린아이와 같은 찰나의 놀이에 몰두함으로써, 그들은 곧 닥쳐올 죽음과 상실이라는 미래의 거대한 태풍을 아주 잠시나마 비껴가 보려 안간힘을 쓴다. 삶의 거대한 변화를 원치 않는 히라야마이기에, 인간이라면 누구나 마주해야 하는 생명력의 소멸 앞에서 느끼는 무력감은 더욱 남다르게 그의 가슴을 짓눌렀을 것이다. 마마의 탄식처럼 왜 우리는 영원히 지금처럼 머물 수 없는 것인지에 대한 쓸쓸한 철학적 물음이 두 남자의 일렁이는 그림자 위로 무겁게 포개어진다.
이토록 복잡다단한 인간의 실존적 딜레마는 영화의 대미를 장식하는 마지막 롱테이크 장면에서 그 폭발적인 예술적 에너지를 남김없이 쏟아낸다. 출근길의 낡은 밴 안에서 니나 시몬의 'Feeling Good'을 들으며 운전대를 잡은 히라야마의 얼굴. 스크린을 가득 채운 야쿠쇼 코지의 경이로운 연기 내공이 빛을 발하는 이 장면에서, 떠오르는 아침 햇살을 마주한 히라야마의 표정에는 환희와 슬픔, 해탈의 미소와 처연한 눈물이 기적처럼 한데 뒤엉켜 흐른다.
이 압도적인 표정의 교차야말로 <퍼펙트 데이즈>가 도달한 궁극의 미학이자 삶에 대한 가장 위대한 통찰이다. 부유했던 과거를 끊어낸 여동생의 방문과 일상을 흔든 조카의 떠남, 그리고 시한부 토모야마와의 서글픈 만남을 겪으며 히라야마는 자신이 아무리 완벽하게 일상을 통제하려 안간힘을 써도 결국 삶은 끊임없이 파도를 일으키며 부서지고 변해간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절감했을 것이다. 그의 두 뺨을 타고 흐르는 눈물은 결국 영원할 수 없는 일상에 대한 애도이자, 피할 수 없는 생로병사라는 거대한 변화 앞에서의 근원적인 두려움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동시에 환하게 미소 지을 수 있는 것은, 여전히 오늘이라는 새로운 하루가 밝았고 자신의 눈앞에 찬란하고도 아름다운 '코모레비'가 어김없이 흔들리고 있다는 사실을 긍정하기 때문이다.
새들이 하늘을 날고, 태양이 빛나고, 새로운 날이 밝아오는 것에 대해 '기분 좋다(Feeling Good)'고 절규하듯 노래하는 니나 시몬의 묵직한 목소리처럼, 히라야마는 다가올 상실의 슬픔을 온몸으로 껴안은 채 기꺼이 오늘 하루의 핸들을 잡는다. 변화를 갈망하면서도 동시에 필사적으로 두려워하는 것이 인간의 피할 수 없는 얄궂은 모순이라면, 빔 벤더스가 제시하는 구원의 길은 그 모순 속에서도 파괴되지 않고 '오늘'을 온전히 살아내는 데 있다. 완벽한 하루(Perfect Day)란 상처가 없거나 아무 변화가 없는 무균실 같은 박제된 시간이 아니라, 필연적으로 다가올 삶의 균열을 묵묵히 받아들이면서도 오늘 나에게 주어진 몫의 삶을 다하고 나무 사이로 스며드는 햇빛에 기꺼이 감응하는 그 처연하고도 눈부신 태도 그 자체일 것이다. 매일 똑같은 일상을 반복하면서도 미세한 차이를 통해 삶의 숨결을 불어넣은 히라야마의 조용한 혁명은, 속도에 취해 현재를 잃어버리고 미래라는 신기루만을 좇는 우리 시대의 모든 헛된 질주를 향해 던지는 가장 묵직하고도 아름다운 위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