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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천은채 Mar 07. 2023

두려움이 엄습할 땐 송태섭처럼

풋내기 강백호의 농구 도전기를 그린 원작 만화 <슬램덩크>와는 달리, 영화 <더 퍼스트 슬램덩크>는 송태섭을 주인공으로 내세우고 있다. 원작에서는 도내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포인트 가드로서의 면모만 부각했다면, 영화화를 거쳐 송태섭이 농구를 시작하게 된 계기와 그의 가정사가 마침내 드러난 것이다.

 




송태섭과 오키나와



장신이 유리한 것으로 여겨지는 농구계에서 송태섭은 팀 내 최단신 캐릭터다. 그 때문에 송태섭은 스피드를 특기로 지닌 포인트 가드를 맡고 있지만, 다른 팀과 맞붙는 족족 자신보다 우월한 피지컬의 선수들 사이에서 힘겹게 게임을 운영하는 모습을 보인다. 특히나 ‘존 프레스’를 주력 기술로 밀고 나가는 산왕공고와의 시합에서 이명헌과 정우성 콤비의 블로킹에 막힌 송태섭은 경기 내내 압박에 시달리며 드리블로 뚫고 나갈 길을 모색한다. 영화는 그동안 밝혀진 적 없는 그의 가정사를 시합 장면 사이사이에 삽입하며 송태섭이 뚫어야 했던 것이 눈앞에 닥친 산왕의 존 프레스뿐만은 아니었다는 사실을 조명한다.    


‘송태섭은 인생 자체가 존 프레스였다.’라는 해석은 이제 너무나 유명하고 보편적인 설명이 되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집안의 부주장으로서 가장의 무게를 형과 나눠야 했던 어린 태섭은 농구 유망주였던 형을 따라 농구에 재미를 붙인다. 그러나 머지않아 형까지 사고로 잃은 그는 어린 나이에 온갖 부담과 불행을 떠안는다. 형의 부재에 슬퍼할 새도 없이, 어린 태섭은 촉망받는 농구선수였던 형 준섭과 줄곧 비교당하며 마음 붙일 곳을 잃어 간다.          

   

<더 퍼스트 슬램덩크>에서는 죽은 형의 뜻을 이어 등 번호 7번을 달고 산왕공고와 겨루게 된 송태섭의 출생지가 오키나와였다는 사실이 밝혀진다. 오키나와는 일본 본토로부터 오랜 시간 차별받아온 역사를 가진 지역이다. 세계대전을 겪으며 일본과 미국 어느 쪽에도 소속되지 못한 채 이방인으로서 존재해야만 했던 오키나와인의 정체성을 송태섭에게 부여한 점은 눈여겨볼 만하다.     


고향 오키나와를 떠나 이사 온 곳에는 마음 편히 농구 연습을 할 코트조차 마땅치 않았다. 좀처럼 입을 열지 않았던 송태섭은 학교에 가면 따돌림을 당하기 일쑤요, 농구부에 들어와서도 다른 부원들에게 쉽게 마음을 열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정대만처럼 제대로 된 탈선을 한 건 아니어도 송태섭은 그 나름대로 지독한 방황의 시간을 보냈을 것이다. 그러나 정대만에게 박철이, 강백호에게 양호열이, 채치수에게 권준호가 있었던 것과는 달리, 그에게는 돌아갈 무리가 없었다. 자신이 충분한 기량을 내지 못하고 있기에 어머니가 느끼는 형의 부재가 더 클 것이라 짐작하던 사춘기 소년 송태섭은 마음의 안식처여야 할 가정에도 온전히 정을 붙이지 못한다. 역사적으로 오키나와인이 그랬던 것처럼 정신적으로 그 어디에도 소속되지 못한 채 이방인으로서 떠돌던 송태섭을 위로해 준 유일한 대상이 바로 ‘농구’였던 것이다.          





송태섭이 두려움을 극복하는 방식  


   

영화 내내 송태섭이 형 준섭을 그리워하며 힘든 상황 속에서도 농구를 포기하지 않음으로써 형의 뜻을 이으려고 노력하는 모습이 그려진다. 물론 산왕공고를 이긴다는 궁극의 목표는 송준섭이 먼저 제시했지만, 송태섭에게 농구가 단순히 형의 못다 한 꿈을 대신 이루기 위한 과제는 아니었을 거라 믿는다. 송태섭이 어머니께 쓴 편지에도 드러나 있듯, 송태섭에게 농구는 유일한 탈출구였다. 특정한 지역에도, 학교에도, 무리에도 소속되지 못한 송태섭이지만, 유일하게 농구에 있어서 그는 명확한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북산 고등학교 농구부 포인트가드 7번 송태섭’. 지난 편에서 서술한 것처럼 정대만에게 ‘중학 MVP’라는 수식어는 정체성을 제한하는 벽이었을지 몰라도, 송태섭에게 ‘북산고 7번’이라는 이름은 무엇보다 든든한 울타리가 되었으리라 생각한다. 그 수식어와 함께하는 동안만큼은 그를 압박했던 무수한 상황들로부터 벗어나 좋아하는 농구를 마음껏 즐길 수 있으니 말이다. 게다가 송태섭이 (아마) 처음으로 마음을 연 타인이었을 한나가 손바닥에 써준 ‘No.1 가드’라는 마법의 주문이 함께한다면, 그를 평생 압박해 온 존 프레스 따위 뚫지 못할 것 없다.



송태섭, 뚫어!



경기장을 울리는 한나의 응원과 함께 산왕의 두 수비수를 제치는 데 정말로 성공해 버린 장면은 송태섭이 마침내 끈질겼던 산왕의 존 프레스 돌파를 성공시켰음을 알림과 동시에 자신을 짓누르던 수많은 부담감으로부터 해방되어 오롯이 농구에만 집중하는 순간을 맞이하게 되었음을 시사한다.    

 

지난 글에서도 언급했지만, 정대만과 송태섭은 다양한 지점에서 서로 반대에 있는 인물이다. 북산 고등학교에 진학하기 전까지의 성장 배경 자체가 정반대인 데다가, 비슷한 시련 앞에서 대처하는 방법마저 다르다. 꺾여본 적 없어 처음 마주한 실패 앞에 속절없이 무너져 버린 정대만이 작은 바람에도 날아가 버릴 듯 호들갑 떨기 일쑤라면, 꼿꼿이 서 있기 어려운 날이 더 많았을 송태섭은 불어오는 태풍마저 별거 아니라는 듯 웃어넘기는 데 능하다. 그런 그는 또 다른 위기가 닥쳐올 때마다 미세하게 떨리는 두 손을 주머니에 찔러 넣고는 무엇도 두렵지 않다는 듯, 그 어떤 압박도 다 뚫어낼 자신이 있다는 듯 센 척을 하며 앞으로 나아갈 것이다. 그것이 ‘상남자’ 송태섭이 두려움을 이겨내는 방식이다. 그리고 이제는 그런 그 곁에 함께 발을 맞춰줄 북산고 농구부가 함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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