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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천은채 Mar 14. 2023

정말로 다정함이 세상을 구할까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의 오스카 7관왕을 축하하며

<에브리띵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가 오스카 7관왕을 했단다. 중심이 흔들릴 때 이 영화 덕에 힘을 얻고 생각을 바로잡았던 기억이 있어 기쁜 마음으로 이들의 수상을 축하했다. 이 영화를 처음 관람했던 때에 썼던 감상평 일부를 가져와 보았다.





결국 다정함이 이긴다.



취향에 맞지 않는 B급 감성의 도입부를 꾹 참고 버틴 결과물이 ‘다정함이 세상을 구한다’라는 주제의식이라 참 다행이었다. 결국 다정함은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다... 따위의 결론이었으면 오늘 찔끔 흘린 눈물과는 다른 의미의 눈물을 주륵주륵 흘리며 영화관을 나왔을 것이므로. 계산적이고, 이기적이고, 차가운 쪽이 이기는 게 아니라, 다정과 진심과 사랑을 지닌 쪽이 결국에는 승리하는 이야기를 좋아한다. 매체가 아닌 현실에서는 다정함이 제힘을 쓰지 못할 때가 많다는 생각을 종종 한다. 어떠한 상황에서든 권력을 쥐고 흔드는 자는 대개 다정함보다는 이기적인 욕망으로 점철되어있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이들은 자신의 행동이 타인에게 미칠 영향보다는 개인의 이익이나 성공에 초점 맞춰진 행동을 하고, 결과적으로 다정함을 무기로 싸우는 자들을 약자로 전락시키는 경향을 초래한다. 그리고 이러한 경험을 했거나 간접적으로 목격한 자들은, 힘이 없(어 보이)는 다정함을 버리고 자신을 지키는 선택을 할 수밖에 없다.


다정함은 강력한 무기가 될 수 없다는, 반복된 경험에서 비롯된 무력한 판단을 탓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렇기에 매체에서라도 다정함의 힘을 크게 떠들어야 한다. 다정함도 힘이 될 수 있다고, 폭력을 휘두르는 사람들보다 다정함의 힘을 믿는 사람들이 더 강하다고, 결국엔 그들이 승리할 것이라고 말해줘야 한다. 사람은 눈에 보이는 것을 곧잘 믿으니, 올바른 믿음을 심어주는 것이 매체의 역할이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비록 가상의 세계에서 벌어진 승부라 하더라도 다정함을 무기로 싸워 이긴 선례가 존재함을 알리고, 이를 목격한 다수가 다정함이 결코 무용하지 않다는 사실을 깨닫기를 바란다. 그 영향으로 다수가 다정의 힘을 믿고, 서로를 배려하고 포용하는 사회가 도래했으면 한다. 좋아해 마다않는 드라마 <런온>의 대사처럼, 다정한 사람들이 바보로 여겨지지 않는 세상만큼 아름다운 곳이 또 어디에 있을까. 다정함은 손해가 아니라 자산이 된다는 거짓말 같은 사실을 또 한 번 믿어보게 하는 영화를 만나 다행이다.




당시에 썼던 감상평에도 언급했지만, ‘결국에는 다정함이 이긴다.’라는 말을 믿으면서도 그렇지 못한 현실에 힘이 빠질 때가 많았다. 한동안 ‘그래도 다정함이 이기지. 혐오를 이기는 건 사랑뿐이야.’ 하는 생각을 주문처럼 외며 희망을 잃지 않으려 노력했고 그 효과를 어느 정도는 본 것 같았는데, 곳곳에서 느껴지는 차별과 혐오에 다시 주저앉게 된다.


온갖 쓸모없는 곳에 세금을 퍼부으면서도 끝내 지어지지 않는 지하철역의 장애인용 엘리베이터, 사람답게 일할 권리를 요구하는 것뿐인데 폭도로 몰리는 각종 노조와 갈수록 악화되는 노동자의 처우를 비웃듯 시행되는 69시간 근로, 강제징용은 일어난 적 없으며 일본이 오히려 피해자라는 망언과 각종 미디어에서 지워지는 여성 등. 이에 관한 생각을 작정하고 늘어놓자니 암담한 현실에 스트레스는 스트레스대로 받고, 목소리를 내는 사람이 도리어 우스워지는 현실에 고개를 돌리게 된다. 그럼 또 그런 내 모습이 비겁해서 짜증이 나고.


요즘 사이비 관련으로 세상이 시끌벅적한데, 이럴 때 보면 이 세상이 거대한 사이비 집단 같다. 뉴스를 접하고 다양한 의견을 들어볼수록 강자의 편에 서서 엉터리 논리를 펼치는 사람들이 단체로 뭐에 홀린 것 같다가도, 내가 하는 생각은 과연 옳은 것인가에 대한 회의가 들기도 한다. 물론 나는 내가 옳다고 믿고 있지만, 누군가의 눈에는 내가 서 있는 쪽의 이야기가 전부 예민한 과대망상자의 헛소리로 들릴지도 모르니.



아이유는 결국 사랑이 이긴다는 명제를 자신의 삶으로써 충분히 증명했다는데, 나는 아직 그렇지 못한 것 같다. 나에게 이 명제는 어떠한 주문이나 종교 같달까. 그냥 믿는 거다. 눈에 비친 세상은 그렇지 않은 것 같지만 언젠가는 사랑이 이기겠거니, 그래도 혐오의 편에 서는 것보다는 사랑의 편에 서는 것이 낫겠거니, 하며 속는 셈 치고 믿어 보는 거다. 언젠가 이 명제를 의심 없이 받아들일 수 있는 날이 오기를 바란다. 그래서 같은 고민에 빠진 사람들에게 ‘내가 살아 보니 결국 사랑이 이기더라. 그러니 겉으로는 혐오와 증오가 훨씬 힘 있는 것 같아 보여도 다정함을 잃지 마.’ 하는 위로를 자신 있게 건넬 수 있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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