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혜주 Jul 01. 2023

에밀 아자르의 '자기 앞의 生'

"사람은 사랑할 사람 없이도 살 수 있나요?"

나는 책을 데려온다는 표현을 쓴다. 읽어야 하는 책, 읽고 싶은 책을 구입하거나 도서관에서 빌려오니 데려온다고 한다. 그러나 가끔 책이 나를 찾아오는 경우가 있다. 자기 앞의 생’ 이 그러했다.      

독서모임에서 6월 함께 읽을 책으로 선정되었는데 제목만 들었던 책이다. 나를 비롯 독서멤버들은 주변에서 ‘나의 인생책이야’라는 말을 들었다고 한다.

다 읽고 나니 왜 그런지 알겠다.     


프랑스의 소설가 로맹 가리가 에밀 아자르라는 필명으로 쓴 소설로 파리 빈민가에서 부모가 누구인지 모른 채 로자 아주머니와 함께 살고 있는 소년 모모가 주인공이다. 내가 애정하는 소설, 미하엘 엔데의 ‘모모’와 이름이 같다. 하지만 자기 앞의 생의 모모는 10살이지만(나중에 14살임을 알게 되지만) 생각은 시니컬한 중년의 모습을 한 매운맛 모모인 것이 다르다.      


 <사람 사이 유대감이 시작될 때>

로자 아주머니는 젊은 시절 매춘부였으나 나이가 들면서 일을 그만두고 대신 다른 매춘부들이 낳은 아이들을 돌봐주며 생계를 유지한다. 모모도 그렇게 만났다. 과거 홀로코스트에서 살아 돌아왔는데 그로 인해 PTSD 증세를 보이기도 한다.      


69p

“모모야 그곳은 내 유태인 피난처야. 그곳은 내가 무서울 때 숨는 곳이야” 

“뭐가 무서운데요?”

“무서워하는 데에 꼭 이유가 있어야 하는 건 아니란다”

나는 그 말을 결코 잊은 적이 없다. 왜냐하면 내가 지금까지 들어본 말 중에 가장 진실된 말이기 때문이다.  

   

PTSD 증세가 나타날 때마다 자기만의 비밀공간인 지하실로 내려가는 로자 아주머니. 누구에게도 들키고 싶지 않은 공간이지만 모모에게만은 허락한다. 생계를 위해 키우는 아이였지만 이제 로자 아주머니에게 모모는 나의 아픔과 약함을 드러내도 안전한 사람, 나이와 세대를 떠나 인간적으로 유대하고픈 친구가 되는 결정적인 장면이다.      


 <생을 견디는 힘>

35p 

“그렇다면 벌써 좋아지고 있군요. 아이가 울고 있잖아요. 정상적인 아이가 되어가고 있는 겁니다. 아이를 데려오길 잘하셨어요..”     


모모의 마음의 상처가 겉으로 드러나면 당황한 로자 아주머니는 의사인 카츠 선생님에게 데려갔다. 상처를 치료하기 위해서는 먼저 상처를 알아차려야 한다. 그리고 아프다고 울어야 한다. 치료해 주는 사람이 있으면 좋겠지만 한껏 울 수 있도록 인정해 주는 사람만 있어도 숨 쉴 수 있다.   

  

62p

나는 너무 열이 올랐다. 그런 감정은 내 속에서 치밀어 오른 것이었고, 그래서 더욱 위험했다. 발길로 엉덩이를 차인다든가 하는 밖으로부터의 폭력을 도망가버리면 그만이다. 그러나 안에서 생기는 폭력은 피할 길이 없다. 그럴 때면 나는 무작정 뛰쳐나가 그대로 사라져 버리고만 싶어 진다. 마치 내 속에 다른 녀석이 살고 있는 것 같았다. 

      

242p

끔찍했던 일들도 일단 입 밖으로 내고 나면 별게 아닌 것이 되는 법이다.     


74p

... 암사자들은 새끼를 위해서라면 절대 물러서지 않고 차라리 죽음을 택하는데, 그것이 정글의 법칙이며, 암사자가 새끼를 보호하지 않는다면 누구도 암사자를 신뢰하지 않을 거라고 얘기했다.

나는 거의 매일 밤 나의 암사자를 불러들였다. 암사자는 방에 들어오자마자 침대로 뛰어올라 우리들의 얼굴을 핥아주었다. 다른 아이들도 모두 그러길 원했고, 또 내가 나이가 가장 많기 때문에 다른 아이들을 돌봐야 했다.     


속으로 끙끙 앓지 말고 가끔은 나 아파요라고 소리치면 좋겠다. 판타지 속으로 들어가 숨어도 좋겠다. 그래서 내 안의 폭력을 피할 수 있다면, 상처를 핥을 수 있다면 더없이 좋을 것이다. 그러면 생을 견딜 수 있다.  

   

 <나를 살게 하는 내 곁의 사람들>     

로자 아주머니의 병세가 악화되고 점점 죽음이 다가올 때, 그 두려움 곁에는 항상 모모가 있었다. 모모가 굶주릴 때, 돌봄이 필요할 때도 모모 역시 혼자가 아니었다. 그 곁에 연결된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은 가진 것이 많거나 뛰어난 재능의 사람이 아닌 그냥 이웃이었다. 모모의 말처럼 ‘똥 같은 사람들’이었다. 트랜스젠더 매춘부 롤라 아주머니, 하루하루 먹고사는 청년들, 고향이 그리운 이주노동자들, 점점 기억을 잃어가는 하밀 할아버지. 그러나 그들은 모모와 로자 아주머니가 고통진 삶에 유일하게 생을 기대하게 하는 희망의 사람들이다. 

제도, 시스템, 체제가 절대 품을 수 없는 가난과 고난의 틈, 사람만이 채울 수 있다. 

누군가 힘겨워할 때 옆에 있는 사람이 되자. 혼자가 아님을 느끼도록. 

그리고 곁에 있는 사람이 되자. 함께 견딜 수 있도록.      


252p

생은 누구에게나 주어지는 것은 아니다. 나는 더 이상 기웃거리지 않고 곧장 집으로 향했다. 내게는 한 가지 생각뿐이었다. 로자 아줌마 곁에 앉아 있고 싶다는 것. 적어도 그녀와 나는 같은 부류의 똥 같은 사람들이었으니까.           


<자기 앞의 생은 무슨 뜻일까>

원제 La vie devant soi를 직역하면 ‘나에게 남아 있는 생’ 정도가 되겠다. 그런데 왜 이 책의 제목일까? 나는 독서모임 멤버들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 실마리를 찾았다. 

로자 아주머니와 모모는 자신의 생을 주도적으로 살지 못했다. ‘다갈색 머리를 하고 마치 앞날이 행복하기만 하리라는 듯 미소를 짓고 있는’ 사진 속 열다섯 살 로자가 홀로코스트의 끔찍한 희생을 스스로 선택하지 않았고, 매춘부의 삶도 원했을 리 없다. ‘생이 그녀를 파괴’ 한 것이다(148p). 

그러나 로자 아주머니는 죽음이 다가올 때 그때서야 자기 앞의 생을 결정했다. 병원에 갇혀 생을 구걸하지 않고 자연스러운 죽음을 선택하는 것이 그녀가 생을 주도적으로 사는 처음이었다. 그 마음을 가장 잘 이해한 사람 역시 모모였다. 그리고 곁에 있던 이웃들이었다.


우리는 각자의 앞에 있는 생을 어떻게 살 것인가? 

생이 나를 파괴하도록 그냥 두지 말자. 끌려가지 않도록 눈을 뜨자. 아름답지 못하다면 로자 아주머니처럼 

‘과감하게 생을 바꾸기로 결심’(169p)하자.      

    

<사랑해야 한다>

소설 도입부에 모모는 하밀 할아버지에게 질문한다.

“할아버지, 사람이 사랑 없이 살 수 있어요?”

소설 마지막에서도 질문한다.

“사람은 사랑할 사람 없이도 살 수 있나요?”     

그 대답은 소설의 끝 문장이 대신한다. 

사랑해야 한다

어쩌면 이 책을 관통하는 주제는 사랑이겠다. 그 사랑의 표현과 방법이 비록 다른 사람에게 인정을 받지 못한다 하더라도 나를 살게 하고 곁의 사람을 지킬 수 있다면 무슨 상관이랴. 이미 죽은 로자 아주머니를 그만의 비밀공간에서 3주간 함께한 모모를 우리가 가슴 아프게 이해하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겠다.  

   

93p

“완전히 희거나 검은 것은 없단다. 흰색은 흔히 그 안에 검은색을 숨기고 있고, 검은색은 흰색을 포함하고 있는 거지”     


글을 모르는 모모에게 글과 인생을 가르쳐 주시는 다정한 하밀 할아버지가 오늘 나에게 말한다. 

너만의 색깔로, 방법으로, 사랑으로 네 앞의 생을 살면 된다고.      

매거진의 이전글 더 이상 도토리는 없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