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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혜주 Apr 21. 2021

영화 미나리와 새벽 배송

나의 새벽 배송은 특별하다. 내가 먹고 싶은 음식을 나보다 더 잘 안다. 아이스팩도 필요 없다. 뜨거운 김이 도망가지 못하도록 보자기에 꽁꽁 쌓여있다. 문 밖에 걸려있지 않다. 싱크대 위에 가지런히 있다. 결정적으로 주문한 적이 없는데 이미 배송 완료이다.


잠을 자도 잔 것 같지 않은 몸을 일으켜 주방에 나가보면 금 보자기에 따끈한 냉이 된장국이 있다. 물론 친정엄마의 배송이다. 김장 배추 소금에 절여있듯 온 몸이 피곤에 휩싸여 혓바늘이 공격해 올 때, 손 하나 까딱하기 싫은 어떤 날, 대체 어떻게 아는지 그때마다 기가 막힌 엄마의 새벽 배송이다.

 

그날은 아침에 어울리지 않는 골뱅이 무침이었다. 엄마의 골뱅이 무침은 보통 오이와 양파가 곁들여지는데 그날따라 향긋한 미나리가 대신하고 있었다. 지인이 주었단다. 골뱅이 무침 귀신인 딸을 위해 새벽부터 준비하여, 출근 전 먹고 가도록 부리나케 배송 완료를 했다. 세상에 아침부터 술안주로 제격인 골뱅이 무침이라니. 더구나 미나리라니. 며칠 전 관람한 영화 ‘미나리’가 생각났다.



영화 '미나리' 출처 네이버

영화 미나리는 1980년대 척박한 미국 땅에 농장을 일구며 뿌리를 내리는 한국 이민자 가족들의 모습을 담았다. 아빠 제이콥은 자신만의 농장을 가꾸며 가족들에게 뭔가 해내는 걸 보여주고 싶다. 엄마 모니카는 병아리 감별로 생계를 유지한다. 의젓한 큰 딸 앤과 몸이 아픈 막내아들 데이빗에게 어느 날 한국에서 외할머니 순자가 찾아온다. 누군가 아이들을 돌봐 주어야 마음 놓고 엄마 아빠가 일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기억 나? 서로 구원해 주기로 했잖아

영화 '미나리' 출처 네이버

영화 전반에 ‘구원’의 메시지가 자리한다. 아빠와 엄마는 새로운 기회를 얻기 위해 미국을 선택했다. 이 곳에서 서로를 구원해 주기로 약속했지만 녹록지 않다. 농사를 짓기 위해 물을 찾는 것도, 생계를 위해 반복적인 병아리 감별 일도 계속해야 한다. 탈출구가 보이지 않는 그곳은 구원이 없다. 그들에게 구원의 손길, 순자가 온다.

순자의 가방에 고춧가루, 멸치, 한약, 그리고 미나리 씨가 가득하다. 하나씩 꺼낼 때마다 모니카의 표정이 밝아지고 울컥한다. 진짜 엄마가 왔구나. 인생의 매운맛을 느낄 때 고춧가루가 생각났고, 구수한 입맛이 그리울 때 멸치가 아른하고, 몸이 아픈 아이를 보며 엄마의 약손이 그리웠을 딸이다. 거기에 미나리 씨앗. 아무데서나 잘 자란다는 미나리는 황무지 같은 그들의 삶을 이끌어 줄 구원의 엄마다. 그 날 아침, 미나리 가득한 엄마의 골뱅이 무침이 지친 나에게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



할머니는 진짜 할머니 같지 않아요

영화 '미나리' 출처 네이버

데이빗에게 순자는 가짜 할머니다. 데이빗이 생각하는 할머니는 쿠키도 만들고 나쁜 말도 안 하고 남자 팬티도 안 입는 할머니다. 진짜 할머니는 자신을 'pretty boy'가 아니라 ‘good looking boy’로 불러주어야 한다. 더군다나 한국 냄새가 나서 같이 자고 싶지도 않다. 순자는 그런 데이빗이 사랑스럽다. 약한 심장 때문에 언제나 뛰지 말아야 하는 데이빗에게 순자는 strong boy라고 말한다. 그렇게 부르니 데이빗은 정말 강해진다. 마치 순자가 냇가에 심은 미나리처럼. 영화 후반부 자신의 실수로 불이 나서 농장이 모두 타버리자 넋이 나간 순자는 집 반대 방향으로 간다. 데이빗이 뛰어가 순자의 손을 잡고 가지 말라고 말한다. 넋이 나간 순자의 눈빛이 다시 돌아온다. 데이빗에게 순자는 어느새 진짜 할머니가 되었다. 서로를 걱정하고, 이해하고, 너른 품이 되는 순간 원망하고, 오해하고, 상처 주는 약한 거짓이 물러난다. 그렇게 그들은 서로에게서 진짜를 발견한다.


미나리는 아무데서나 잘 자라

영화 '미나리' 출처 네이버

순자는 데이빗과 함께 얕은 냇가에 미나리 씨앗을 뿌린다. 미나리는 물만 있으면 크게 관심 가져주지 않아도 알아서 잘 큰다. 강한 생명력이다. 그 특유의 향기로 음식 맛을 살린다.

어쩌면 미나리는 순자 자신이다. 머나먼 미국으로 와서 딸을 위해 손주들을 봐주기도 하고, 데이빗이 오줌으로 골탕을 먹여도 웃으며 넘기고, 악몽으로부터 데이빗을 지켜준다. 알아서 잘 크는 미나리처럼 순자의 생명력은 이 가정에 생기를 불어넣는다. 뇌졸중으로 몸을 움직일 수 없어도 어떻게든 자식들에게 도움이 되고픈 순자, 비록 마음과 달리 모든 것이 허물어졌지만 가족이 다시 힘을 내고 살아가는 미나리 향기가 된다.



새벽에 반찬 만드는 것이 얼마나 피곤한 일인지 안다. 그러기에 엄마에게 하지 말라고 말한다. 알겠다고는 하지만 나에게 구원의 손길이 필요할 때 쓰윽 내민다. 미안하고 속상한 마음에 뭐라 해도 새벽 배송은 엄마의 딸에 대한 진짜 사랑이다. 너무 당연히 받아들이는 사랑이라 아무것처럼 여기기 쉬운 엄마의 사랑. 미나리가 순자이듯 미나리는 우리 엄마이다. 나는 그렇게 새벽 배송된 미나리를 먹고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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