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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멀스멀 Sep 06. 2018

물에 들어가는 것을 좋아하진 않지만

물을 바라보는 여행이라면

 물에 들어가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아니 조금 더 정확히 말하자면 물을 무서워한다. 서해바다 같이 물속이 보이지 않는 곳에서는 발목 정도만 담가도 온 몸이 뻣뻣해진다. 석회질이 가득해 파랗게 예쁜 물도 물속이 보이지 않으니 발도 담그지 못한다. 그렇다고 투명하게 속이 내비치는 물은 다르냐 하면 그도 아니다. 맑은 동해나 제주의 바다도 허리 정도면 이미 충분히 무섭다. 바닥 깊이를 알 수 있는 수영장도 키가 큰 덕분에 조금 더 안심이 될 뿐 무섭기는 매한가지다. 그리고 특유의 염소 냄새를 맡고 이 사람 저 사람이 들어간 모습을 보면 불쾌해지기까지 하는 특이한 성격까지 발동된다.


라오스 루앙프라방 꽝씨폭포와 북해도 청의호수. 바라보면 예뻐도 나는 발끝도 담그지 못한다.


 내가 기억하지 못하는 애기 때부터 중고등학교에 다닐 때도 우리 가족은 매 여름 동해로 여행을 갔다. 아무 데나 가는 건 아니고 삼척시 근덕면의 궁촌 해수욕장으로 향했다. 엄하셨던 친할아버지와 달리 어쩌면 내가 더 편했을 할머니 할아버지께서 하시는 바닷가 낡은 민박집이 행선지였다. 그러니 수영을 못했지만 물을 무서워하는 아이는 아니었다. 매일 아침부터 해가질 무렵까지 바다와 바닷가에서 놀곤 했다. 민물이 바다와 만나느곳도 있어 민물과 바다를 넘나들었다. 돌이 많이 않아 발에 돌 같은 게 채이면 그건 십중팔구 조개였던 궁촌에선 빈 양파망을 들고 들어가 몇 시간이고 조개를 잡곤 했다. 그걸로 어머니께서 조개죽을 끓여주시면 참 맛있었다.


 아마도 90년대 초 국민학교 저학년이던 시절 보슬비가 내리던 날 혼자 구명조끼를 입고 작은 고무보트에 올라 바다로 나갔다. 내가 장난을 치다 빠졌는지 파도가 조금 세졌는지 잘 기억은 나지 않는다. 확실하게 기억나는 건 물에 빠진 내 위에 뒤집힌 고무보트가 덮여 있었다는 것이다. 안 그래도 날이 흐린데 보트까지 뒤집어썼으니 깜깜한데 나는 갇혀버렸다. 애당초 수영을 잘 하지도 못했지만 구명조끼 덕분에 몸은 떠버리고 보트를 들어내진 못해 한동안 갇혀있었다. 실제론 수 분 만에 아버지께서 보트를 들어 꺼내 주셨을 텐데 내 기억 속에선 엄청나게 긴 시간 동안 무서웠다. 그날부터 나는 물이 무서워졌다. 기본적인 수영은 할 줄 알아야 한다는 어머니 생각에 몇 년 후 동네 수영장을 갔는데 유아용 풀에서 얼굴을 물에 몇 초 담그는 것도 며칠이 걸렸는지 모르겠다.


 물에 빠졌던 다음 해에도 우리는 궁촌 해수욕장으로 놀러 갔다. 익숙함 덕인지 물에 들어가는 건 무서워졌어도 바다가 싫어지진 않았던 게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만약 바다나 물이 싫어졌다면 내 여행들의 재미들이 얼마나 반감됐을까. 여행지에 가면 경치가 좋은 곳엔 자연이든 도시든 물이 꼭 있기 마련이다. 바다가 없는 내륙국인 라오스만 해도 큰 도시는 모두 메콩강을 끼고 있고 그 뒤로 지는 겨울 해는 정말이지 장관이다. 감탄사를 자아내는 절경 까지는 아니어도 테라스에 앉아 비어라오 한 잔 하며 바라보자면 안주도 대화도 필요 없는 그런 경치. 물이 싫어져 물가에 가지 못했다면 즐겁게 볼 수 없었겠지.


메콩강 뒤로 해가 지는 라오스 루앙프라방


 친구들과 국내여행을 떠나도 사철 계곡가나 바닷가가 좋다. 몸을 담그지 않아도 곁에서 바라보면 낮이고 밤이고 참 좋다. 강과 바다는 바라보면 좋기도 하지만 사람의 속을 만지는 무언가가 있다. 특히 좋아하는 풍경이 있는데 삼척의 가장 남쪽 임원항에 가면 아주 멋진 전망대가 있다. 차로 좁은 군사도로를 따라 올라가거나 방파제 근처에서 계단을 따라 걸어 올라가면 잘 조성된 공원과 함께 넓은 잔디밭과 시원한 동해가 보인다. 화창한 여름이나 눈 쌓인 겨울 모두 아름답다.


강원도 삼척시 임원항 공원 전망대의 여름과 겨울


 다른 사람들과 함께 몸을 담그는 수영장을 좋아하지 않았는데 최근 몇 년 새 호감이 생겼다. 실내 수영장은 아니고 라오스 루앙프라방의 작은 실외 수영장에서 그 묘미를 알게 됐다. 루앙프라방을 여행하는 사람들은 잘 모르는 중심가에서 조금 떨어진 수영장이다. 어린이용 풀과 어른 풀을 합해 3개 정도가 있고 부지를 다 합해도 몇백 평 될 리 없는 곳이다. 남녀 합해 탈의실이 서너 개가 전부니 어느 정도 크기인지 짐작이 될 테다. 여기서 내가 제일 좋아하는 스폿은 가장 큰 풀 바로 옆 나무 그늘 아래 의자다. 굳이 수영장에 수영복까지 입고 가선 물에는 잘 들어가지도 않고 수영장을 바라보며 기울이는 맥주를 즐긴다. 몸을 담글 때면 풀 가장자리 바 까지 있으니 거기 들어가 앉으면 무더운 라오스에서 천국을 찾은 기분이다.


라오스 루앙프라방의 작은 천국. 샐러드 위의 달걀이 앙증맞다.


 함께 물에 몸 담그는 걸 즐기지 않는 건 비단 수영장뿐이 아니라 나는 대중탕도 좋아하지 않는다. 집에서 씻을 수 있는데 굳이... 하는 마음도 한편에 있었다. 올해 들어 우리네 대중탕과는 조금 달라도 일본 온천에 푹 빠졌다. 2월에 여자 친구 A와 친한 동생 S과 방문한 삿포로에서 운 좋게 갓 개업한 시내 호텔에 싼 값으로 묵었다. 새 호텔이라 깨끗하고 친절했던 점 외에 우리를 사로잡았던 건 2층에 위치한 대욕장. 으리으리한 탕은 아니었지만 깨끗한 탕에 몸을 담그는 맛을 처음 알게 된 곳이다. 씻고 나와 자판기에서 뽑아 마시는 진한 북해도 우유도 한몫했음은 인정. 머무든 동안 매일 S와 함께 들락거리며 지친 몸의 피로를 풀었다.


 한 달이 채 지나지 않아 좋은 기회에 선생님 내지는 형님인 분과 오키나와에 갔다. 이미 몸 담그는데 맛 들이고 왜 한국에는 이런 가격에 이런 데가 없나 생각하던 내가 온천을 지나칠 리가 있나. 열 번은 넘게 일본 여행을 하며 한 번도 온천이나 료칸에 가본 적이 없는 내가 온천을 검색하기에 이르렀다. 온천이 있는 숙소들은 하나같이 비싼 성수기라 아쉽지만 저렴하게 민박을 하고 일정에 호텔 온천 방문을 넣었다. 오키나와 나하공항 건너 작은 섬 세나가지마에 있는 온천이었는데 세상에, 비행기가 뜨고 내리는 바닷가를 바라볼 수 있는 노천탕이라니. 노천탕의 맛까지 연달아 알아버리고 말았다.


 그러고 보면 함부로 무언가 싫다, 무섭다 단정 짓는 건 위험하다. 웬만해서 나를 해치는 위험이 되기야 하겠냐만은 미처 접하지 못한 즐거움과 행복을 날려버릴 수 있을 만큼은 위험한 것이다. 그러니 항상 모든 것에 열린 마음을 갖고 도전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같은 건 아니지만 함부로 싫어하거나 무서워 하지는 말자. 과연 다가오는 가을에는 어떤 물가를 만날까. 또 찾아올 겨울엔 따뜻한 남국의 물가에 갈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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