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꿔? 바강서! #2
아시안게임이 막바지로 접어든 지금 축구 종목 4강 대진표가 결정됐다. 대한민국 대 베트남, 일본 대 아랍에미리트. 한국 축구는 병역 면제 이슈로 대표팀을 꾸릴 때부터 지금까지 말이 끊이지 않는다. 더불어 인맥 논란, 비매너 논란에 말레이시아에 패한 아픔까지 더해졌다. 반면 우리와 4강에서 맞붙는 베트남 축구는 분위기가 많이 다르다. 지휘봉을 잡은 박항서 감독의 이른바 '박항서 매직'으로 온 나라가 뜨겁게 달아올랐다. 인구 9000만의 베트남에선 연일 거리응원이 펼쳐지고 경기가 끝나면 길로 쏟아져 나온 인파가 베트남과 박항서를 연호한다고 한다. 좀 더 정확히는 박항서라는 이름의 발음이 어려워 '바강서' 라고 할 것이다.
바강서 매직은 지난 1월 AFC U-23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아시아축구연맹에 소속된 국가의 23세 이하 대표팀 경기가 그것이다. 우리나라는 적은 인구에 비해 여러 스포츠 종목에 두루 빛을 발하니 국제무대에서 뛰는 우리 선수들을 보는 게 흔한 일이다. 하지만 어떤 나라들은 올림픽이나 월드컵이 아니더라도 대륙이나 지역에서 펼쳐지는 경기에 자국 선수단이 좋은 성적을 내는 걸 보기 어렵다. 베트남이 그러했는데 바강서 감독이 이끈 대표팀이 4강에서 카타르를 승부차기 끝에 꺾고 결승에 오르는 역사적인 일이 터졌다.
그때 나는 짝꿍과 호치민시를 여행 중이었다. 라오스 여행을 마치는 나와 만나 여행하려니 베트남이 되었고 비행기표 가격이 좋아 호치민이 되었다. 우리는 AFC 경기가 있는 줄도 모른 채 여행 중이었고 쌀국수 먹다 역사적인 경기가 진행 중인걸 알게 되었다. 구멍가게의 작은 텔레비전을 길거리에 서서 바라보며 손에 땀을 쥐게 하는 승부차기가 끝났을 때 우리는 다 함께 환호했다. 내가 베트남 사람도 아니고 내 옆에도 서양 사람이 있었는데 모두가 하나 되는 그런 장면. 내 나라 선수들이 이긴 것도 아닌데 같이 가슴이 콩닥거리고 행복해졌다. 그러니까 박항서 매직은 비단 베트남 선수나 국민들에게뿐만 아니라 나에게도 펼쳐졌다.
박항서 매직의 진가는 몇 분 후에 나타났다. 노트르담 성당 왼편에서 엄청난 인파가 행진해 내려오기 시작했다. 모두 새빨간 티셔츠를 입고 손에는 베트남 국기를 흔들며 베트남을 연호했다. 우리도 들떠선 함께 소리치고 손을 흔들면 지나가는 이들도 밝게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엄청난 인파가 모두 지나갈 때쯤부터는 오토바이를 탄 응원 행렬이 끊임없이 밀려왔다. 문자 그대로 끊임없이. 그래서 현지에서 구매한 심카드를 쓰는 우리의 통신은 끊어졌다. 우버를 호출할 때까진 어떻게 겨우 됐는데 그 이후에 끊겨 우버 기사와 만나보지도 못하고 생이별을 했다. 아마 그도 그날 영업을 포기한 채 길거리 인파 사이에서 차를 어쩌지도 못하고 창 밖으로 베트남을 연호했겠지.
여름밤처럼 더운 호치민 밤거리를 인파를 뚫어가며 힘겹게 걸어 숙소에 겨우 도착했다. 마음을 추스르고 여행자 거리 언저리에서 맥주 한잔 하며 보니 대로변은 그야말로 난리. 2002년 월드컵 때 광화문에서 나도 거리응원을 했고 어찌어찌 인파들과 미친 듯 걷다 보니 다른 동네까지 떠밀려갈 정도였다. 생전 처음 보는 사람의 트럭 뒤에 올라탄 사람들이 모두 대한민국을 연호하고 태극기를 흔들었던 그 흥분이 거기에 있었다. 다만 아쉽게도 우리같이 찰진 박자의 박수나 구호는 없었고 그저 오토바이들의 뛰-뛰- 하는 가느다란 클락션뿐. 이 즈음 우리는 며칠 더 머물기로 결심하고 비행기표를 새로 알아보고 숙소도 다시 잡았다.
순전히 베트남 축구의 역사적인 순간에 나도 함께 마법에 걸려들어 결승전을 꼭 현지에서 보기 위해 여행을 늘렸다기엔 호치민은 다른 매력도 많은 곳이었다. 일주일 남짓의 여행에 세 번이나 찾아간 분위기 좋은 카페가 생겼다. 가격도 저렴한데 맛이 좋아 아무리 배가 불러도 밤마다 사 먹은 길거리 반미 집도 있었다. 우리나라보다 더 발달한듯한 수제 맥주집이 많은데 그중 비싸지만 꼭 마음에 드는 집도 찾아 여러 번 마셨다. 그러니 순전히 축구 때문은 아니지만 우리는 며칠 더 먹고 마시다 마음에 드는 수제 맥주집에서 결승전을 봐야겠다고 계획하기에 이른다. 베트남 국기의 새빨간 색은 아니었지만 둘 다 붉은색 옷을 구해 입고 손에는 작은 베트남 국기를 들고 맥주집에서 위아 더 월드.
AFC U-23 대회는 중국에서 열렸다. 중국은 큰 나라니까 중국 어딘가에서 열렸는지가 중요할 텐데 안타깝게도 추운 곳이었다. 결승전이 펼쳐질 경기장이 텔레비전에 비쳐졌을 때 바라보던 모두가 놀랄 만큼 눈이 많이 내리고 있었다. 이어 선수단 버스에서 차례차례 내리는 국가대표 선수들이 나왔는데 얼굴이 어찌나 빨갛고 추워 보이던지. 호치민의 1월 기온은 최고 31도, 최저 21도 정도. 그러니 바라보는 국민들은 신기함과 동시에 얼마나 마음이 아팠을까. 평생 눈을 보지 못하는 나라의 사람들이 갑자기 올라가버린 결승전을 눈 속에서 치러야 하는 상황이었다.
경기가 시작되어 펍 안에 가득 찬 사람들은 한마음 한 뜻으로 베트남을 응원했다. 중계를 알아들을 수도 없고 선수들의 이름도 잘 몰랐지만 모두가 그랬다. 아, 물론 상대팀인 우즈베키스탄 사람이나 우방국의 사람도 펍 어딘가에서 조용히 우즈벡을 응원했을지 모르겠다. 다만 티를 낼 수도 없어서 끙끙 앓아 참으면서 응원을 했어야겠지. 아마 평생 처음으로 눈 내리는 잔디밭에서 죽을힘을 다해 뛰었을 베트남 선수들은 아무리 미끄러지고 넘어져도 벌떡벌떡 일어나서 뛰었다. 전후반 90분 1대 1 접전을 펼쳤다. 하프타임 땐 이례적으로 수십 분간 제설작업이 이뤄졌으니 경기장 관계자들은 눈과 열심히 싸웠다. 그리고 연장 후반 15분 마지막 휘슬 직전에 한 골을 허용해 결국 우즈벡에 아쉽게 졌다.
이기자고 하는 게 경기이니 이겼으면 더 좋았겠지만 베트남 사람들은 그래도 모두 밝았고 행복했다. 눈에서 뛰다 넘어지는 모습에 소리 지르고 경기를 마치고 지친 선수들을 보며 눈물을 보이는 사람도 있었지만 정말이지 역사적인 순간이었으니까. 며칠 전 고생을 교훈 삼아 숙소를 가까이에 잡아 여유가 생긴 우리는 오페라하우스 앞 광장에 산책을 나가보니 그야말로 축제였다.
박항서 감독은 2002년 히딩크 매직 당시 항상 그 배경에서 보이던 사람이다. 지금까지의 세월 동안 축구팬이 아니라면 잘 몰랐을 커리어를 쌓아왔던 그가 부임했을 때 유명한 사람이 아니라 불신과 불만이 많았다고 한다. 벤치에 앉아있는 모습이 마치 조는 것 같다고 해서 Sleeping one이라는 조롱 섞인 별명도 얻었다고 했다. 그런 그가 AFC U-23 챔피언십이 끝나는 그때에는 마법을 부리는 사람으로 국민적 영웅이 되었다. 한국인을 마주치면 그렇게 반겨주고 심지어 한국인에 대머리면 평생 받아보지 못한 헌팅을 당하기도 한다는 말까지 떠돌았다. 정부와 국적기 항공사들 대표단 선수들이 래핑 된 전세기로 선수들을 환대했고 카 퍼레이드를 했단다. 그 이후에는 뭐 우리나라까지 마법이 뻗어 한국 텔레비전에도 꽤 많이 나오시며 호감형 인사가 되었다.
한국 축구에서 누구보다 이목을 집중시켰던 히딩크 감독의 뒤에서 지금 한 나라를 들썩이는 감독이 된 그의 인생. 1월의 대회 이후 아시안게임에서도 역사상 처음으로 팀을 4강에 무실점으로 올려놓는 기염으로 일회성이 아니었음을 실시간으로 보여주고 있다. 인생이 여행이고 여행이 인생인 게 참 맞는 게 어떻게 될지 모른다는 것이다. 호치민으로 향하던 나도 그런 여행이 기다릴지 몰랐다. 호치민이 그렇게 좋을지도 몰랐고 단번에 빠질만한 매력들이 구석구석에 있을지 생각지도 못했다. SNS 사진을 보고 연락 온 지인을 이국 땅에서 오랜만에 반갑게 만나게 될지, 그 나라 스포츠의 한 역사가 펼쳐질지, 그래서 부러 수수료를 내가며 표를 취소하고 중국을 거쳐 멀리 돌아오는 여정을 기꺼이 선택하게 될지.
호치민 떤선녓 국제공항으로 향하는 택시 안, 룸미러를 흘끔 대던 기사가 수줍게 말을 걸었다.
"한꿔?"
"예쓰"
그러자 그는 웃으며 오른쪽 엄지를 들면서 "바강서!"